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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당신도 틀렸소, 영남일보[자유성]

[자유성]
연암, 당신도 틀렸소

변종현 편집위원 겸 주말섹션팀장
영남일보
기사내보내기 2013-06-03

“마을의 꼬마 녀석이 천자문을 배우는데 읽기를 싫어하여 꾸짖었답니다. 그랬더니 요 녀석이 말하기를, ‘하늘을 보니 파랗기만 한데 하늘 천(天)자는 푸르지가 않아요. 이 때문에 읽기 싫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한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의 인물)을 주려 죽일 만합니다.”
연암 박지원이 보낸 편지를 유한준이 공개하는 바람에 온 조선에 알려진 내용이다. 연암이 천자문의 병폐(?)를 꼬집은 것이다. 연암 집안은 이후 대대로 천자문을 배우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도 천자문을 읽는 것이 가장 나쁜 버릇이라며, 아예 ‘아학편(兒學編)’을 따로 만들기까지 했다. 이는 당시 실학이라는 학문적 풍토가 대세였다는 점을 감안해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천자문은 사실 어린 아이용 한자학습서가 아니다. 999개의 한자로 구성된 125개의 문장은 동양의 신화·역사·문명의 뿌리를 이해하는 인문서 역할을 한다. 천자문의 첫 문장은 ‘天地玄黃宇宙洪荒(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이다. 하늘을 푸르다하지 않고 검다고 한 것만을 보더라도 저자 주흥사의 통찰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만약 자연과학적 관찰이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욱 놀랍다. 연암은 하늘이 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애써 외면했을 것이다. 실용학문이 갖는 한계다.
21세기 대한민국 학문이 또한번 ‘실용’에 함몰된 듯하다. 수능시험에서 한국사는 기피과목이 됐고, 대학에서는 국문학, 철학, 서양화 등 인문·예술학과가 잇따라 폐지되고 있다. 기초과학 학문도 외면받기는 마찬가지. 대신 그 빈자리는 취업 잘 되는 실용학문으로 대체되고 있다.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얕은’ 학문만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대구를 찾은 노벨화학상 수상자, 로저 콘버그 스탠퍼드대 교수는 “노벨상은 ‘발명’보다 예상치 못한 ‘발견’을 높이 평가한다”며 “한국정부가 응용이나 실용적인 목적보다 지식 추구 그 자체를 위한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한 연암의 답이 궁금하다.

변종현 편집위원 겸 주말섹션팀장
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