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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현에 남겨진 실학의 흔적들
19세조 연암 박지원의 치적을 중심으로 ①
희 서 (남곽공 후 광주지회장)
연암 박지원에 관련된 학술회의가 지난해 ꡐ연암 서거 200주년ꡑ을 기념하여 두 곳에서 열렸다. 10월 12일 경기도 주최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ꡒ18세기 조선 새로운 문명기획ꡓ이라는 주제의ꡐ박지원 ․ 박제가 서거 2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ꡑ와 3일 뒤인 10월 15일 경남 함양문화원 주관으로 함양군청 대회의실에서 가진 ꡐ연암 추모학술회의ꡑ다. 함양문화원이 주관한 학술회의에 참관했던 필자의 글을 몇 차례 나누어 게재할 예정이다. 글의 유연성때문에 조상에 대한 경칭 생략을 두고 필자가 몹시 고민했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편집자 주>
연암에 관련한 글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그것은 그가 실학의 대가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과 그의 개혁사상이 200여 년이 흐른 오늘에 더욱 빛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암의 얘기를 잘못 꺼냈다가는 오히려 훌륭한 선대의 발자취에 오점을 남기지 않을까 퍽 조심스런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글을 쓰기 전에 우리 종보에서 그 동안 연암에 관련하여 어떠한 글을, 어떻게 다뤘나 살폈더니 대체로 신문이나 잡지 등에 보도했던 것들을 발췌하거나 인용했던 것들이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필자가 여기에서 살피려는 부분은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의 치적이 중심이다. 그러나 치적만을 중심으로 글을 쓰기란 매우 어렵다. 글은 그 상황과 그 배경을 쓰려면 과거를 오가면서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의현감 이전의 얘기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안의현감 시절의 상황을 보충설명하려는 의도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이 글은 지난해 학술회의에서 함양군이 만든 자료집을 근거로 하고 궁금한 것은 함양군 김성진 문화원장의 도움말을 참고로 하여 집필하였음을 밝혀둔다.
연암이 안의현감에 제수된 것은 1791년 12월이다. 정조 15년,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연암은 34세 때 국자감에서 시행하는 감시에 수석으로 합격, 입궐하여 침전에서 시권을 낭독함으로써 영조로부터 칭찬까지 받았으나 그 시험이 일종의 예비시험(소과)이라 관직에 등용되지는 못했다. 그가 관직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50세 때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유언호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이라는 낮은 토목 직으로 출발했다. 53세에는 평시서 주부로 승진하고 54세에는 사헌부 감찰로 전보되었으나 부의 명칭이 자기 중부 이름(사헌)과 음이 같다하여 그 직을 사퇴하였다. 정조는 다시 그를 한성부 판관에 제수했다가 그 해 연말 안의현감으로 전보한 것이다.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것은 1792년 1월이다.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앉아보는 ꡐ고을 수령ꡑ이라는 자리는 그에게 있어서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안의현의 면적은 현재 함양군의 7개 면과 거창군의 5개 면을 합친 12개 면에 해당한다. 오늘날의 함양군과 거창군의 일부를 합친 면적이나 동헌은 현재의 함양군 쪽(안의초등학교)에 있었다. 당시 안의현은 200명의 관속들이 있었고 주민들은 5,000여 호에 2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
당시의 지방 수령들은 행정권은 물론, 사법권과 조세 징수권까지 갖고 있었기에 오늘날의 자치단체장보다는 훨씬 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러한 권력의 구조 때문이었을까? 고을마다 송사가 끊이질 않았고 이를 둘러싼 투서들이 수령이 바뀔 때마다 더욱 심해졌다. 안의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한 분란은 정작 현을 움직여 가는 아전들 때문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ꡐ안의현감 박지원ꡑ의 치적은 연암이 부임할 때 12살이었던 차남 종채가 쓴 과정록가운데 나오는 ꡐ나의 아버지 박지원ꡑ(박희병 역)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후 계속되는 ꡐ현감 박지원ꡑ의 정치 얘기도 이 책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안의현의 아전들이 대단히 교활하고 간사하여 매번 수령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익명으로 투서하여 서로의 비리를 들추어내곤 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리 밑에 편지가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버지는 (그것을)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냥 내버려 두셨다. 그러자 한참 있다가 (그 편지가)절로 없어졌다. 그 후 어느 날이다. 동헌에 나 앉은 아버지는 통인 아무개를 내쫓으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그러나 아전들은 그 통인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러시는지 영문을 몰랐다. 아전들이 물러나와 그 통인에게 물으니, 그는 곧 이전에 익명으로 투서한 자였다.
그 후 또 어떤 자가 관아의 뜰에다 투서한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께서는 그 편지를 아예 뜯어보시지도 않고 아궁이 불 속으로 던져버리셨다. 아버지는 며칠 뒤에 아전 아무개를 잡아들이라 하여 매를 때려 내쫓아버렸는데 그가 곧 뜰에다 투서를 한 자였다. 아전들이 깜짝 놀라 ꡒ귀신같다ꡓ고 여겼다. 그 후 아전들의 투서질이 없어졌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연암의 예리한 판단력이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얻은 정보(혹은 증거)는 아예 무시해 버리면서 사건의 배후는 재빨리 간파하고 그에 대한 응징 방식 또한 간결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건발생에 대하여 일정한 시간적, 공간적 장치를 만들어 판결에 대한 검증 시간과 오판에 대한 장애를 함께 제거하면서 판결의 간명함과 단호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이러한 방법으로 조직의 안정과 투명한 공직사회를 만들어 갔다.
안의현은 비록 조그만 산골마을이었지만 환곡과 향곡(향곡, 국량미로 비축해둔 곡식) 및 호조의 저치미(저치미, 백성들에게 징수한 쌀을 중앙에 올려 보내고 나머지는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기위해 비축해 두는 쌀)가 9만여 휘(열 닷 말에서 스무 말을 일컫는 수량단위)나 되었다. 그러나 아전들이 부정과 농간을 부려 포흠(포흠, 관청의 물건을 빼돌려 사사로이 쓰는 것)이 날로 늘어났다. 아버지는 새로 부임하시자 가까이 있는 창고를 점검해 보셨다. 아버지는 그 때 (관계자들의 포흠사실을 알고) 아전들을 닦달하여 곤궁에 몰아넣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셨다.
며칠 후 모든 아전들을 불러 모은 아버지는 ꡒ너희들이 그 일을 숨긴다 하더라도 감추는 데 불과하다. 조사를 받게 되면 절대 죄를 숨길 수 없다. 위로 감영의 점검만이 아니라 암행어사의 조사가 있을 테니 일찍 자수하는 게 낫다. 자수할 경우에는 내가 구제할 방도를 마련해 보겠다. 그렇지 않고 죄상이 드러나게 될 경우 난들 어찌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아전들이 포흠을 실토하니 총 6만여 휘나 되었다.ꡓ
연암은 상급기관인 경상감영에 가서 감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곤 돌아와서 그 해결책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며 이러한 글을 보낸다.
아전들이 나라의 곡식을 도둑질한 것은 법으로 처벌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낼 경우 잃어버린 곡식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실토했으니 그 정상을 참작해 용서해 줄 만 합니다. 만일 이 일의 처리를 저에게 맡겨줘 그 죄를 묻지 않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하되 감영에는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연암은 포흠을 한 하급관리들에게 채찍보다는 당근을 통한 자백을 유도하면서 적절한 대책을 세워 나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관료로서의 매끄러운 업무처리 능력과 사건해결의 현명한 판단, 그리고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법적 판단의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연암은 포흠 사건 해결을 위해 관아의 뜰에다가 아전과 장교, 관노, 좌수, 이정 등은 물론이고 백성들 가운데 나이든 어르신들과 신망이 두터운 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게 하였다. 그러고선 큰 소리로 이들을 향해 묻고 대답하는 식으로 범죄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나갔다.
ꡒ형법에서 나라의 재물과 곡식을 몇 냥, 몇 섬 이상 포탈한 죄인을 처단하라고 했는지 알렸다?ꡓ 하면 뜰에서 일제히 ꡒ예이-.ꡓ하고 화답했다.
ꡒ고을 원이 포흠을 눈감아주었을 때 어떤 처벌을 받는지 잘 알렸다?ꡓ ꡒ예이-.ꡓ
ꡒ이제 6만 휘나 되는 막대한 포흠을 적발하였거늘 오늘 당장 감영에 보고하여 관찰사가 임금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면 형법에 의하여 처벌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몇 개의 목이 달아나고 몇 개의 무릎 뼈가 바스라져 눈앞에서 당장 결딴나고 말 것임을 잘 알렸다?ꡓ ꡒ예이-.ꡓ ꡒ설사 목이 베일지라도 이 6만 휘의 빚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필경 안의현에 책임을 물어 장부대로 해놓으라고 하리라는 것도 잘 알렸다?ꡓ ꡒ예이-.ꡓ ꡒ위엄과 권세가 견줄 데 없는 쟁쟁한 고을 원이 새로 부임하여 죄를 진 아전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숙청한 다음 논밭과 재산을 몰수하고 일가족 친척들을 옥에 가둔다면 피가 낭자하여 고을이 황폐해지리라는 것도 잘 알렸다?ꡓ ꡒ예이-.ꡓ
이러한 방법으로 범죄를 심리하고 취조한 연암은 이어서 사건 해결 방안을 제시해 가는 식으로 강평을 계속한다. 범죄의 심각성을 일깨워 가면서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여유로운 시간을 주면서 그 기한 내에 변제할 것을 선고한다.
ꡒ본관은 여러 아전들에게 약속하는 바 3년 내로 포흠한 것을 채우면 논밭을 몰수하지 않으며 이웃이나 친척에게 연대책임을 지우지 않고 사법적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니 매월 초하룻날 곡식 2천 포대씩을 창고에 들여놓도록 하라. 그렇게 하여 3년이 지나면 너희들 중에 밭이 없는 자는 밭을 갖게 될 것이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갖게 될 것이요. 아내가 없는 자는 아내를 얻게 될 것이다. 내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훗날 다른 수령이 부임해 와 너희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ꡓ
그러고선 포흠이 많아 갚을 능력이 없고 친척도 없는 자 서너 명을 골라 수입이 다소 많은 직책을 줘서 소득이 생기면 갚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관련자들은 문제 해결책에 힘을 얻어 서로 빌려서 갚을 것을 독려하는 등 합심하여 해결하므로 결국 2년 반 만에 포흠한 양을 모두 갚았다. 연암은 죄인을 옥에 가두거나, 곤장을 치거나, 목을 베지 않고도 문제해결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연암은 바로 비폭력 인권주의자였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이글은 【반남박씨 종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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