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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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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명의 개척자 - 박승빈
♣경향신문 1984년 7월 7일

여명의 개척자  박승빈 선생
   (국어학자,교육자,변호사,사회운동가)

국어문법연구 · 대중계몽에 심혈
表音”고집 조선어학회「맞춤법통일안」反旗
최남선 · 오세창 등과 잡지발행 신생활운동 이끌며 抗日

국어학자 朴勝彬은 그리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글연구초창기에학자로서 독자적인 업적을 남기고 국어수호에 앞장선 잊을수없는 공로자중의 한사람이다. 일제시대 「조선어학회」에 비견되는 「조선어학연구회」를 설립, 국어연구와 보급에 힘을쓴 그는 周時經의 이론과는 달리 표음주의적입장에서 국어학을 연구했다.

이같은 그의 이론은 오늘날 학계 한모퉁이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그는 국어학자일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에 활약한 한국인변호사중 한사람이었고, 7년간 普專(現고려대학)교장을 역임한 교육자였고 최남선·오세창등과 함께 「啓明俱樂部」를 조직, 민중계몽에 힘쓰기도 했다. 朴勝彬그는 舊韓末·日帝하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하려고 진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국운이 이미 쇠퇴한 1880년 강원도 鐵原에서 朴景陽의 독자로 출생했다. 그의 집은 조용히 은거하던 학자 집안. 어린시절 漢學을 공부했고 舊韓末 왕실관비유학생으로 일본中央大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 시절 그는 영어와 일본어를 배우면서 국어문법에 관심을갖기시작했다. 이후 관심은 점점커져 국어학에 대학 열정이 그의 마음을 가득채우게된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대한제국검사를지내다 한·일합방을 맞아 유혹을 물리치고 변호사 사업을 한다. 이후 1925년까지 규모가 큰 민사사건을 주로 취급, 변호사로서 활약한다.
그러나 변호사로 업을삼는중에도 한번 뿌리내린 국어연구에의 정열 때문에 조선어문법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1935년에 펴낸 대표적인저서 「朝鮮語學」서문에 보면 우리글과 말에 대한 그의 관심이잘 나타나 있다. 「언어는 그민족형성에 가장 중요한 관계를지닌 유전물」이라고 지적한 그는 「건실하고 발달된 언어를 소유할 때 민족의 흥성과 발전에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갈파하고 있다.

1905년 李容翊이설립한 普成전문은 20년대들어 심한운영난을 겪게 된다. 普專이 어려움을겪던 1925년 그는 교장에 취임했다. 이후 7년동안 「복잡한재단운영, 평의회의파쟁속에서 거중조정에 온갖노력을기울여 학교경영에 힘썼던 교장 朴勝彬의 노고는 크게 평가되어야 할것」이라고 고대70년사를정리한 「石塔70년」은 기술하고 있다.

朝鮮語硏究會 창립

그가 애써 지켜온 普專은 1932년 仁村 金性洙씨가 인수, 튼튼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교장으로 근무하면서도 학교의 아카데믹한분위기속에서 그의 조선어문법연구도
더욱 체계를 잡았다.

1931년에는 「계명구락부」를 조직하여 「啓明」「新天地」「新民公論」등의 잡지를 발행, 민중계몽과 일제에의 저항을 계속했다. 이에 11월 계명구락부주최로 조선어강습이 열렸고, 다음달 20여명이 모여 「朝鮮語硏究會」를 창립했다. 이회는 1921년에 설립된 「조선어학회」와 周時經의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朴勝彬의 입장은 훈민정음창제이후 전통적으로 지켜져 온 「소리나는대로 적는다」는 表音主義였다. 그는 음운을 문법에앞세웠다. 1933년 7월 조선어학회가 주동이되어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제정, 발표되자 그는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해 7월 「한글식철자법성명서」에서 그는 「周時經의 학설을 배운 인사들이 이를 기초로 조선어 記寫法의 改變을 도모하고있다」고 비난했다.

두 學會 치열한 論戰

이에 두학회는 한글맞춤법을둘러싸고 치열한 논전을 전개했다. 그는 34년 2월 기관지 「正音」을 간행, 자신의 이론적 근거를 밝혔다. 이잡지는 이후 1941년 폐간될때까지 10년간 일제에 항거, 국어연구와 연구조성에 이바지했다. 두학회의 논전속에서 결국 그의 이론은 반영되지 못했지만 그는자신의 입장을 계속 견지했다. 오늘날 맞춤법통일안의 모순이지적되기도 하는 가운에 학계일각에서는 그의 연구업적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국어문법에 몰두하면서도 계명구락부 활동, 연설·신문기고등을 통해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구습의 타파와 의식과생활의 근대화를 위해 벌인 新生活運動은 커다란 민중의호응과 동조를 얻었다.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고 미신을 타파하며 사치와 허례허식을 배격해야 한다는 등 생활의 개선을 주장했다. 그는말한 것을 직접 실천하려고 애썼다고한다. 집안에 비단등 사치한물건을 들여놓지 않고 가난한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지급했다. 식구들에게 잘더렵혀지는 흰옷을 입지 못하게 했고 그자신아버지 朴景陽이 세상을 떠났을때 집안어른의 매를 맞으면서까지 흰상복을 입지 않았다고한다.

妥協 모르는 理想主義

그의 손자 朴贊機교수(고대·독문학)는 『할아버지는 고집이세고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분이었고 이상주의자였다』고 회상하고 『개인적으로 할아버지의의견에 동조하며, 그가 쌓아온업적이 우리나라 국어학계의 발전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해 왔다』고 평가했다. 그의 저서로는 앞에서 설명한 「조선어학」과 「朝鮮語學講義要旨」(1931년), 「簡易朝鮮文法」(1937년)등이있다.

普專을 그만둔뒤 보전이나혜화전문(現동국대)에서 조선어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는 1943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떠났다. 그의 후손에는 학자가 많다. 3남1년중 장남 朴定緖씨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국어의 장래와 한자의 재인식」이라는 책을낸 국어학자이고 딸 朴成媛씨는 외국어대 초대 일본어과과장을 지냈다. 장손 朴贊雄씨는 연세대·인하대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박찬기씨는 독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소설가 朴泰洵씨는 『일제식민지하에서 우리의 얼과 넋을 지키기위해 국어연구에 몸바친 선인들의 고귀한 뜻은 대단히 의미깊은것』이라고 말한다.

李演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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