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박씨 홈페이지:::
 
::: 회원 글마당 :::
회원 글마당은 로그인 하신 회원들만 글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으로, 글의 주제나 내용은
특별히 없고 붓 가는 데로 회원들이 자유롭게 쓰고 싶은 글을 올릴 수 있는 공간입니다.

0
Name  
   박찬무 
Homepage  
   http://www.bannampark.org
Subject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연암(燕巖) 지원(趾源)  (오창공 후)

선조 야천(冶川) 선생 증(贈) 영의정(領議政)문강공(文康公)의 묘소가 합천의 화양동(지금의 묘산면(妙山面) 화양리(華陽里))에 있으니 관청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0리 거리이다. 제전(祭田)은 사라져 상민들의 토지가 되어 버렸고 묘지기도 가난하고 단출하여 애초부터 이른바 병사(丙舍)라는 것이 없었다. 본 고을 사또(郡守) 이의일(李義逸)이 성묘 차 산소에 와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탄식하기를,“선생의 높은 도의는 아직도 후학들이 우러러 사모하고 있는데 하물며 내가 외후손으로 이곳의 수령이 되었으니 어찌 감히 묘에 관한 일에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하고, 바로 선생의 8대손인 안의현감(安義縣監) 지원에게 찾아와 제전을 되돌려 받을 방책을 의논했다.
이에 지원이 감사를 표하며,“그렇고 말고요! 무릇 선생의 후예라면 내외손(內外孫)을 막론하고 이미 대대로 더욱 번창하여 세상에서 화주현벌(華顯閥)을 일컬을 때는 반드시 우리 반남 박씨(潘南朴氏)를 먼저 들게 되니, 이 어찌 선생이 선행을 쌓으신 여복(餘福)이 아니며, 또 이 묘에서 음덕(陰德)을 받은 덕분이 아니겠소. 다만 그 묘지가 서울에서 800리나 멀리 떨어져 있고 시대가 200여 년이나 지났으므로, 그 동안 성묘를 때맞춰 하지도 못하고 산소의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 히였으며, 묘제(墓祭)도 지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고 목동들이 훼손하는 것도 막지 못하였소. 이는 실로 후손들로서 크게 송구스러운 바인데 지금 사또는 외후손으로 홀로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으니 이 어찌 우리 본손(本孫)들의 부끄러움이 아니겠소.
지금 선생의 후손들로 이 도내에서 수령된 자가 다섯 사람이니 마땅히 우리부터 먼저 해야 할 것이오.”하고는 마침내 종제(從弟) 선산 부사(善山府使) 수원(綏源), 족제(族弟) 문경 현감(聞慶縣監) 이원(彛源), 족질(族姪) 진주 목사(晉州牧使) 종후(宗厚)와 영덕현령(盈德縣令) 종경(宗敬)에게 서한을 띄워, 이후李侯의 의리를 칭송함으로써 그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하니, 이에 다투어 봉급을 떼어 도왔다.
대구판관(大邱判官) 이단형(李端亨)이 이 소문을 듣고,“나도 또한 외후손인데 어찌 합천군수만 아름다운 이름을 독차지하도록 하겠는가.”하였고, 당시 감영(監營)에 있던 7대손 사회(師誨)와 족제 임천군수(林川郡守) 지원(知源)도 역시 각각 돈 꾸러미를 내놓으니, 전후로 모인 돈이 모두 합쳐 330냥이었다.
그 돈으로 팔려 간 제전을 사서 되돌려 놓고 도기로 되어 깨어지기 쉬운 제기는 나무 그릇으로 바꾸어 옻칠을 했으며, 한편으로는 남은 돈으로 병사(丙舍)를 새로 지으려 하니, 고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화암서원(華巖書院)은 선생을 단독으로 제향하는 곳으로 선왕께서 사액(賜額)한 사당이다.
묘제(墓祭)는 연중 한 번에 불과하지만 서원이란 영구히 제사 지내는 곳이며 게다가 한 골짜기 안에 있으니 어찌 이 제전을 서원에 부속시키지 않겠는가.”하였다. 그러자 사또가 그에게 타이르기를,“물건에는 제각기 임자가 있고 예절 또한 정(情)에 따라 다른 법이다. 무릇 묘송(墓松)을 쳐다보며 슬픈 마음을 달래는 것은 후손이 조상을 추모하는 효(孝)요, 제기를 벌여 놓고 존앙(尊仰)하는 정성을 바치는 것은 여러 선비들이 어진이를 흠모하는 예(禮)이다. 이것이 묘소와 서원이 다른 까닭이니 어찌하여 이 제전을 옮겨다 서원에 붙인단 말인가?”하였다.
얼마 후 선산부사, 문경현감, 진주목사가 전후로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니 이 사또가 탄식하기를,“관(官)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 이 병사를 내 뜻대로 마치지 못한단 말인가.
하고는 드디어 목수를 불러 모아 재목을 내려주고 산 아래에다 집터를 닦아서 신속하게 다섯칸 집을 지었다. 좌우에 방을 두고 중간에 대청을 만들고는, 도면을 그려 지원에게 보이며 말하기를,“나는 다만 이 지역의 수령으로서 그 역사(役事)를 도왔을 뿐이니, 방법을 마련하여 지켜 나가는 것은 오직 그대에게 달려 있소. 그대는 기억하기 바라오.”하였다. 이에 지원은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예전에 합사(合祀)하던 선생의 신주를 합천으로 돌려보낼 때 나의 할아버지〔大考 박필균(朴弼均)〕께서 당시 경기감사였으므로 종족들이 감영 안에 다 모였는데, 금평위(錦平尉)는 나이 90의 고령으로 궤장을 이끌고 나왔고 문경공(文敬公) 역시도 한강을 건너 찾아왔다. 이때에 서로 나누는 말씀이 모두 선생에 대한 일이었다. 빙 둘러앉아 듣는 이는 모두 노인들이었는데, 그 중에 눈물을 흘리면서 젊은이들을 돌아보며,“뒷날엔 너희들의 일이니라.” 말씀하신 분도 있었다.
나는 그 무렵 나이는 비록 어렸으나 거마를 잇달아 동작나루까지 보내던 광경을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때 후손으로서 하직 절을 올린 자가 400명도 넘었으니 얼마나 성대한 일이었던가! 아, 선생은 큰 덕과 깊은 학문으로 이른 나이에 영기(英氣)를 드날렸으며 인품이 빛나고 문장이 뛰어났다.
임금께 간쟁(諫爭)하고 정색으로 토론함으로써 장차 임금을 보필하고 큰 정책을 펼치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소인배의 배척을 받아 자취를 감추고 떠돌다 외가인 윤씨(尹氏)집안에 의지하게 되었다.
윤씨는 본관이 파평(坡平)인 대성(大姓)으로 대대로 합천에 살았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여러 아드님들이 모두 어려 고향으로 운구(運柩)할 가망이 없었으므로, 윤씨 가문에서 불쌍히 여겨 땅을 빌려 주어 우거하던 집 뒤에 장사하였으니 지금의 해좌(亥坐)의 언덕이 바로 이곳이다.
부인 홍씨(洪氏)가 어린 자식들을 이끌고 곧바로 서울로 돌아왔는데,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고 손녀는 의인왕후(懿仁王后)로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원비(元妃)가 되었다. 홍씨부인이 돌아가자 나라에서 양주(楊州)에 장지를 내려 마침내 선생의 묘소와 천 리나 떨어진 곳에 따로 장사 지내게 되었으니, 거리가 멀고 힘이 분산되어 세월이 자꾸 흘러감에 따라 차츰 게을러져 방치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원이 가까운 고을의 원이 되어 일찍이 한두 번 성묘한 적이 있었는데, 그 김에 가서 그 형국을 살펴보니 산세가 중후하고 물이 깊었다. 그것은 마치 존귀한 인물이 의젓이 당(堂)에 앉아 있어 단정한 그 기상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멀리서 바라보고 두려움을 느끼다가 막상 얼굴을 뵙고 말을 나누어보니 온화한 모습을 띠고 있는지라 자연히 친애 감이 들어 오래도록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아! 슬프다. 선생이 이곳에 묻히게 되었을 때 당시의 군자들은 깊이 슬퍼하였다. 그러나 이미 크고 이름난 산악이 신령한 기운을 감추고 기다리고 있어서 끊이지 않는 복을 발하여 후손들이 세신(世臣)과 귀척(貴戚)이 되어 국가와 영원히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게 되었으니, 옛날의 득의하여 뽐내던 소인배들은 도리어 몰락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 어찌 이른바 ‘부르지 않아도 절로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조상의 묘를 위하여 장구한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는 제전을 마련하는 일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제전이 있어야 묘지기를 존속하게 할 수 있고, 묘지기를 존속하게 하는 데는 병사(丙舍)를 두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지금 이 몇 뙈기의 토지와 조그마한 집은 묘를 지키는 자가 받는 것이자 후손들이 멀리서 조상에 대한 그리움을 위탁한 것이다. 백 년을 두고 못 하던 일을 하루아침에 이 사또〔李侯〕를 만나 끝을 맺게 되었으나, 나나 이사또는 모두 관직에 매여 있고 관직에 매인 자는 때가 오면 돌아가고 말 것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돌보아 주는 의리를 이 화양동 에사는 윤씨들에게 더욱 바랄 수밖에 없다.



0
478 32 5

 no 
 subject 
 name 
 date 
 hit 
 vote 
418
   오랫만에 글을 올립니다. [4]

박홍근
2011/11/01 1349 0
417
   68명 중 68등

朴俊豪
2011/09/03 1405 0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박찬무
2011/06/05 1454 0
415
   호장공(휘 응주)을‘반남박씨 시조’라 표기한 이유

박희서
2011/06/05 1820 0
414
   남곽공 휘 동열東說 행장 고찰

박찬무
2011/06/05 2096 0
413
   朴紹의 祠宇를 세워 주기를 청하는 鄭潗의 상소 승정원일기

박찬무
2011/05/28 1565 0
412
   좀 봐주세요...저의 뿌리를 알고자

박도현
2011/05/24 1355 0
411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박찬무
2011/05/08 1847 0
410
   朝鮮時代의 文人

박찬무
2011/04/29 1667 0
409
   평도공 박은 묘역, 파주시 향토유적 제25호 [1]

박산명
2011/04/12 1705 0
408
   조선왕조실록, 효자 박장손(朴長孫)

박찬무
2011/02/27 1679 0
407
    창간 얼굴 – 박영효.이상협 선생

박샛별
2011/01/15 1847 0
406
   다대포 박영효의 무덤터 - 부산광역시

박샛별
2011/01/15 2064 0
405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부통령 박영효

박샛별
2011/01/15 1752 0
404
   우리조상 박영효 할아버지 역사관은 과연 무엇인가? [3]

박효서
2010/12/28 1644 0
[1][2][3][4] 5 [6][7][8][9][1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