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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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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곽공 휘 동열東說 행장 고찰


남곽공南郭公 휘諱 동열東說 행장行狀 고찰考察

남곽공파 도유사 근 서 根緖

아! 우리 중씨仲氏 깨서는 빼어난 용모에 어질고 믿음직한 덕을 지니셨다. 세상에서 한 때 재사才士를 이야기하고 정승의 그릇을 논할 때면 반드시 우리 중씨를 거론하였다.
이는 대개 품행이 순수하여 하시는 일이 진실로 부족한 바가 없었을 것인데, 수명은 60
년도 채우지 못했고 지위는 가진 덕에 미치지 못했으며 10년을 앓아 조그만 사업도 펴지 못하였다. 나실 때는 하늘이 크게 쓰려는 듯 했으나 돌아가실 때에는 마치 곤액을 당하는 듯 하늘이 흐릿하고 믿을 수 없으니 선을 행하는 이들이 누구를 믿겠는가? 중씨가 막 임종하였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애초에 염殮하기도 어려웠으나, 사람들의 부의賻儀가 후한 덕택에 상례를 마칠 수 있었다.
중씨의 친구들 가운데 당대에 도덕과 문장으로 명망이 있어 입언立言 군자가 될 수 있는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신현헌申玄軒이월사李月沙 같은 분들과는 40년간 사귀면서 한결같이 행동하여. 친척들보다도 가까웠으니 나 같은 재주 없는 동생은 슬퍼하는 마음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일을 기록할 뿐이다. 눈물을 훔쳐내며 감히 돌아가신 형님의 혼령의 도움을 구하고 집사들을 번거롭게 할 뿐이다.
중씨는 가정嘉靖 갑자 1564년 4월 23일에 태어났다. 휘는 동열東說이고 자는 열지說之이며 호는 남곽南郭이다. 어렸을 때 놀이를 별로 즐기지 않았고 영리함이 보통 아이들과는 남달랐다. 5세에는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당시 숙부인 남일南逸 선생은 사림의 영수로서 공무에 여가가 생기면 번번이 여러 조카들을 불러다가 ≪시경詩經≫ ≪예기禮記≫등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다. 중씨 역시 책을 옆구리에 끼고 와 학문을 배우려 하였다. 숙부께서는 “너는 장차 어디에 뜻을 두려고 하는가?” 하셨다.
조모인 정경부인 홍씨는 여든의 나이에, 안팎의 손자들이 수십 명에 달했다. 하루는 여러 손자들을 불러, “너희 할아버지께서는 장원급제를 하셨는데 누가 그 자취를 이을 수 있겠는가?” 중씨가 일어서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제가 할아버지의 자취를 이을 수 있습니다.” 작은아버지인 국구國舅 반성부원군께서 그 일을 들으시고서는 기이하게 여기고, 데려다가 4~5년을 가르쳤다. 화려한 의복
과 음식이 갖춰졌고 수많은 노복들이 있었는데도 중씨는 담박하고 화평하게 지냈다. 세상을 원망하며 스스로 피하려는 기색도 없었지만 또한 출세를 부러워하는 마음도 없었으니, 위 아래가 모두 마음이 잘 맞았고 모두들 기뻐하였다. 반성공은 더욱 아끼며 필시 큰 그릇이 되리라고 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에 학문은 날로 진보하였고, 과거 시험을 보는 날이면 반드시 그 명의命意와 운사運思가 어떠한지를 묻고서야 물러갔다.
신사년1581에는 한성에서 치른 시험에 급제하였다. 백부伯父인 사재감정공司宰監正公께서 말씀하시길, “아무개의 재주로는 당연한 일이다. 다만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는 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다.” 을유 1585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명의 동료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경사經史와 백가百家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전고典故에 이르기까지 빠짐 없이 넘나들며 공부하였다. 사람들은 중씨를 마치 태산북두처럼 우러렀고, 난새나 봉새처럼 본보기로 삼았으며. 혹 자신에 대해 한 마디 말이라도 들으면 번번이 영광으로 삼았다.
기축 1589년에 정여립의 역변逆變이 일어났다. 공경대부에서부터 포의布衣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교유를 맺고 지낸 것을 드러낸 말들이 많았기에 임금의 노여움이 엄청났다. 임금께서는 가까운 친척들에게 몰래 자문을 구해 중씨를 사건을 처리할 적임자로 임명하셨다. 중씨가 그들을 대신해 화합을 이끌어 내는 데에 힘쓰자, 사림들이 크게 안심하였다. 일은 비밀에 부치고 공개하지 않았다. 정국이 급변하던 시기에 장차 성균관 유생들의 논의가 엄하여 유림들은 얼굴에 핏기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중씨가 오는 것을 보고서야 서로들 축하하며 말하기를, “이제야 걱정이 없겠습니다.”하였다. 중씨는 과연 문제를 잘 처리하여 제멋대로인 의론이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
임진 1592년 에는 대부인과 반성부인을 모시고 병화兵火를 피해 산골짜기로 숨었다 반드시 공족公族들을 피해야 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으므로, 비록 가까운 친척이라 할지라도 함께 가려는 이가 없었다. 이로 인해 다른 이들보다 더욱 고생하고 떠돌았다. 창졸간에 사람들 사이의 정과 예가 다 없어졌고, 시간이 오랠수록 더욱 심해졌다.
갑오 1594년에는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 “신묘 1591년에 정철을 유배 보낸 일에 대해 경인 1590년에 임금의 물음에 답할 때, 최영경에 대해 효행이 있고 우애가 있으며 공무를 잘 집행한다고 말씀 드렸던 것 들어 보지 못하셨습니까?” 이에 단독으로 장계狀啓를 올려 그 억울한 상황을 열거하였는데, 그 언사와 뜻이 모두 정대하고 엄중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체직하라고 비답批答하셨다. 당시에 홍익성洪益城은 병이 위중하였는데 탄식하며 말했다. “박 아무개가 인물이로구나. 내가 그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유감이다.”
얼마 후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어 해주海州의 관청으로 갔다. 을미 1595년에 조정으로 돌아왔고, 병신 1596년에는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제수되었다. 접반사의 종사관으로 다시 영남嶺南에 내려갔다. 정유 1597년 에는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영변판관寧邊判官이 되었다. 영변은 중국으로 가는 경로에 있었으므로 공억供億과 비만飛輓의 일이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 중씨는 일과 휴식을 번갈아 가며 백성들의 힘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고, 병량이 잘 공급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웃한 마을은 모두 무너져 우물이 마르고 성이 텅 비게 되었으나, 유독 영변부만은 평안하였으니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그 일을 칭찬하고 있다.
무술 1598년에 부친상을 당했다. 경자1600년에 탈상을 하고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 신축 1601년에 홍문관의 수찬 교리가 되고 문학 사헌부지평을 역임한 뒤에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이조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겨울에 원접사 종사관으로 용만龍灣에 갔다가 모친의 병환 소식을 전해 듣고 먼저 돌아왔다.
임인 1602년에 검상檢詳 사인舍人이 되었고, 다시 사성司成상례相禮통례通禮로 전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통정에 가자加資되고 황주목사黃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중씨가 부임하여 고을의 한 해 동안의 살림살이를 헤아리고 삼가하여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킬 때에는 비록 아주 세미한 일이더라도 손수 장부에 기록하였다. 기한을 확정하고 법도를 정하여 털끝만한 오차도 없게 하였다. 한 해가 지나자 모든 사무에 알맞은 조리가 생겼으므로 백성들은 병들지 않았고 관아에는 넉넉한 재정이 생겼다. 정치가 맑아지고 송사가 사라졌으며 모든 일들이 알맞게 시행되었으니 백성들은“백 년 이래 이렇게 훌륭한 수령은 없었다.”
고 말했다. 암행어사와 방백方伯이 탁월한치적을 조정에 보고하여 임금께서 옷감을 주시어 표창하였다.
예조참의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갈 때, 황주의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중씨를 기렸다. 중씨가 훗날 방백이 되자 이 송덕비를 없앴는데, 중씨가 돌아간 뒤에 백성들이 다시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얼마 후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다시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당시 나라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임금께서는 하교를 내려 방책을 구하셨다. 당시는 최영경崔永慶이 국권을 잡은 지 6년이 되던 때로, 조정을 어지럽히며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나 세상에서는 감히 이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중씨는 왕의 말씀을 대신하여 여섯 가지 조목을 들어 그 위급한 상황에 대해 극렬하게 간언하였다. 그 말이 통렬하고 절실하였다.
겨울에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세상을 안정시킬 포부를 지니고 업무를 돌보고 정치의 대체를 견지하는데 힘썼으며 청렴하고 부지런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탐관오리들을 뿌리 뽑았다. 관리들의 고과考課는 한결같이 지극히 공평한 마음으로 시행하였고 친척이나 권세가 에게도 용서하는 바가 없었으니 황해도 전체가 엄숙해졌다. 무신 1608년 가을에 조정으로 돌아와 형조참의가 되었다.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충주목사忠州牧使에 보임되기를 청하여 충주목사가 되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했다. 신해 1610년 에 상복을 벗고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상소를 올려 퇴계 선생과 회재 선생을 문묘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있는 힘껏 제멋대로 주장하였다. 선비들이 모두 분노하여 정인홍을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중씨는 요속僚屬들을 인솔하여 군주는 유생들을 예로 다스려야지 위세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중씨는 다시 상소를 올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 후에 예조참의에 임명되자 시사時事가 올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 방황하고 탄식하였다. 조정에 남아 있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다가 외직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다.
계축 1612년 4월에 반적 박응서朴應犀가변란을 일으켜 나라에 큰 옥 안이 되었다. 나동량東亮은 정협鄭浹의 무고誣告를 받아 하옥되었고, 장차 헤아릴 수 없는 큰 화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 그 일의 곡절을 밝혀 보고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라 여겨 석방하였다. 중씨는 먼 지방에 계시면서 걱정하는 마음을 풀 길이 없었기에 사람들만 만나면 번번이 술을 내어 대취하고는 하였다.
6월에 적노賊奴 김응벽金應璧을 붙잡아 나주에 가두게 되었다. 김응벽이 중씨에게 술과 음식을 청했으나, 중씨는 주지 않고서 말하길, “죄인은 그저 굶주림과 갈증을 면하여 죽지만 않으면 충분하다. 어찌 감히 도리어 방자하게 구는가.”하였다. 김응벽은 조정에서 추국推鞫을 당할 때에 평소에 질시하던 수령과 방백들을 일일이 거론하였다. 다만 공에 대해서는 성명을 알지 못하고 “현재 나주목사를 맡고 있는 자입니다.”하였다. 임금은 다른 이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중씨만을 불러들였다. 중씨가 서울로 올라올 때 날씨가 무척 더워서 금석도 모두 녹아버릴 정도였고, 여정도 길었기에 기력이 모두 다해 버렸다. 중씨가 옥에 갇히던 날 밤에 큰 비가 쏟아져 땅이 흠뻑 젖었다. 다음날 형틀을 목에 매고 공초하는 곳에 불려갔는데 대답을 다하기도 전에 갑자기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손발이 말을 듣지 않으며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눕게 되었다. 임금이 친히 살피고서는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부터7~8년간 철석鐵石으로 목욕을 하며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결국 올해 1622년 7월병인 일에 일어나지 못하게 되셨다. 아 이것은 시운時運인가 아니면 명운命運인가? 아! 애석하구나.
중씨는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서 이조참판에 추증되셨다. 이 해 9월 병오일에 양주楊州금촌金村 모좌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신씨申氏로 동지중추부사 발撥의 따님이다. 덕성이 진실하고 청순하며 바르고 온화하였다. 평소에 먹을 것이 없어도 가난한 것으로 개의치 않았으며 음식을 만들고 집안일을 다스리는데 한결같이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중의 사람들이 모두들 사모하고 본받으려 하였다.
아들은 셋을 두었다. 장남 호濠는 진사로판서 신흠申欽의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두었고, 후배後配로 윤헌민尹獻民의 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차남 황潢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지냈다. 승지 홍서봉洪瑞鳳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다. 참판에 추증된 종형 봉산공鳳山公이 후사로 취했다. 삼남 정渟은 참판송일宋馹의 딸과 결혼하여 1자 2녀를 두었다.
장녀는 전적典籍 윤순지尹順之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승문저작承文著作 이행원李行遠에게 시집을 가서 1녀를 두었다.
중씨는 타고난 성품이 중후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너그러워 포용력이 있었고 굳세되 화합할 수 있었다. 말씨에 비근하거나 천근한 빛이 없었고 흠이 있으면 덮어주려고 하였다. 선대부께서는 자제들에게 성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학문을 하도록 하였는데, 중씨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는 법이 없었다. 아침이면 일어나 책을 암송하였는데, 반드시 남보다 앞섰다. 친구들이 장난을 쳐수업받은 책을 숨겨놓고 복습하지 못하게 해도 수업을 시작할 때에는 이미 그 내용을 외우고 있었다. 제자서諸子書와 역사서를 섭렵하여 한 번에 여러 줄을 읽어내려 갔으며, 주제에 임해 글을 엮어낼 때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월등하게 뛰어넘었으니, 문사들도 감히 함부로 자신을 견주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시험을 봐 글을 지을 때 번번이 높은 등수에 올랐다. 회시에 대여섯 번 응시하였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선대부께서는 조금도 굴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큰 재주를 가진 이는 늦게 성공한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선배들은 수치로 여겼다.” 정시庭試에 장원하였을 때 숙부叔父와 같이 이름이 올랐다.
나 역시 승지의 직책으로 축하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 한 번은 홍문관교리로서 강연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했는데, 보던 이들이 물러나 말하기를 “평상시에 책을 읽을 때에는 소리를 내지는 않았는데, 이제 보니 그 음성이 크고 화창하며 비유를 끌어 깨우침이 완곡하고 진지하니 실로 겁이 없다고 할 만 하다.”하였다. 중씨가 그 말을 듣고서 웃으며 말했다.
“경연의 자리에서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평상시에 갈고 닦는 것이다. 어찌 위축되어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겠는가!”중씨와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사람 가운
데 가장 친한 이가 있었는데, 겉으로는 청렴한 듯하나 실제로는 좋은 관직에 뽑히는 일을 꾀하는 이가 있었다. 중씨는 내심 그를 경박하다고 여겼다. 그 사람이 중씨를 원망하고 원수처럼 미워했는데 중씨는 말하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전랑의 관직을 거치면, 크게는 화를 면치 못하고 작게는 원수가 많아진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과연 헛된 말이 아니구나.” 하였다.
중씨가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막하에 있다가 이치와 형세가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다는 점으로써 사람들을 깨우쳤고 음빙飮氷의 의리로 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즉석에서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그 사람에게 주니 그 사람이 감동하여 마침내 떠났다. 오성은자주 중씨에 대해 사람을 잘 다룬다고 칭찬하였다.
승정원에 있을 때는 권세 있는 대신[權相]이 국정을 맡았는데,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가강[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는 “임진년의 일은 저희가 알 바가 아니니 청컨대 사신을 보내어 예전의 우호를 회복하였으면 합니다.”하였다.
이 일을 거절하면 임금과 틈이 생길까 걱정하였다. 스스로 의견을 건의하여 진술하기를, 만약 왕릉을 침범한 왜적들을 포박해서 보내오면 화의和議를 허락하는 데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왜구는 곧바로 병졸 둘을 포박해서 데려와서는, “이들이 그 도적들입니다.”하였다. 조정에서는 반색을 하고, 권상 역시 요란하게 자신의 공을 일컫고 장차 종묘에 아뢰어 축하를 드리고 경사를 공표하며 한편으로 공훈을 기록하려 하니 그 기세가 매우 성대하였다.
중씨만이 홀로 이 일에 반대하여 상소를 올렸다. “저들 왜적은 교활하고 기만하는 데 능합니다. 만일 그날 흉악한 일을 했던 왜적이 아니어서 그들에게 속임을 당한다면 사방의 비웃음을 살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저들을 국경에서 목을 베어 미리 그들의 간교함을 꺾어버려야 옳을 것입니다.” 임금께서 변방을 맡은 여러 신하들에게 함께 의논하게 하였는데 오직 오성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제관祭官과 사관史官은 속이는 말이 없어야 한다.’하였습니다. 박동열이 올린 상소는 실로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 말을 따라야 마땅합니다.” 다른 신하들이 모두 위축되어 감히 논박하지 못했다. 마침내 도적들을 불러다가 물으니 한 명은 본래 병이 있어서 바다를 건너 종군하지도 못했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은 나이가 겨우 20살 남짓이었다. 임진년의 나이로 계산하면 10살도 안 되었을 때니, 모든 이들이 중씨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 나 동량은 당시에 기성箕城에 있었는데, 오성이 편지를 보내어 그 일을 다음과 같이 축하하였다. “박동열의 이번 일은 사람들을 상쾌하게 하고 기운을 북돋운 것이니, 어찌 그리 장하던가!”
중씨는 평생 동안 자연에 마음을 두었고 시비에 맞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조금도 사심私心을 가지고 주변에 사람을 두지 않았다. 나주羅州에 있을 때 선비들 가운데 당숙堂叔과 종질從姪이 서로 원수 사이로 지내던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그들의 선영先塋을 서로 파헤치기까지 하였다. 각기 조정 대신과의 인연을 앞세워 위세를 빌려 서로 폭로하는 일이 이어졌다. 중씨는 부임하자마자 마을의 장로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숙과 종질은 서로 가까운 친척이므로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선조가 같다. 그러니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서로 덮어주어야 하는데, 저들은 서로 악행을 일삼으니 어찌 단지 한 가문의 수치로만 그치겠는가? 반드시 극악한 죄로 서로를 공격할 것이다. 나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니 옥 안獄案을 갖추어 조정에 올려 풍속을 올바로 바로잡을 것이
다. 전날의 화목함을 되찾도록 더 이상 권할 수가 없구나.” 나주 사람들은 모두들 그 가르침에 기뻐하고 위세에 습복습慴伏하였다. 중씨가 임소任所에 있는 동안 아무도 감히 한마디 말이라도 중씨에게 간여하는 이가 없었다.
나주는 호남 지방의 큰 고장이라서 좋은 물산物産이 모이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팔도 가운데 으뜸가는 곳이었다. 또한 광주光州의 선비들과 교류하여 문예를 겨루는 모임을 갖게 하여 스스로들 힘쓰도록 하였다. 한 번은 어느 산사山寺에 모였는데 서로들 말하기를, “우리가 이전에는 서로 파派를 나누고 추향하는 바를 달리 하였는데 과연 어째서 그랬을까? 이런 수령이 없으셨다
면 이런 모임도 없었을 것이다.”하였다.
시의 풍격風格은 청신하였고 진부한 말은 힘써 제거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원접사遠接使가 되었을 때 중씨는 이자민李子敏홍휘세洪輝世와 함께 종사從事가 되었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황주黃州 시절의 작품을 보고서는 중씨의 시를 문단을 주름잡을 작품이라고 허여하였다. 당시에 최동솔崔東率이 평양平壤에 우거했는데 강운强韻으로 화답을 구하다가 중씨의 시를 읽고서는 역시 찬탄을 금치 못했다. 고명誥命을 기초起草할 때에는 엄정하고 장중하였다.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영남의 방백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위험에 임해서 명을 받았으니, 경은 자신의 몸도 잊고 늙을 때까지 양친과 떨어져있어야 한다. 이는 내가 실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로구나.” 방백이 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문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왕이 보내는 글의 체격을 깊이 터득한 글이다.”하였다.
나 동량이 임금의 은혜를 입어 벼슬길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중씨의 병이 더욱 심해져 더 이상 서울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다. 송추松楸 근처에 초가를 만들어 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오성 역시 독포禿浦에 은거하였으니, 서로 간에 거리가 10리가 채 되지 않았으므로 이따금 지팡이를 짚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서로 오가기도 하였다.
내면의 수양에 돈독하였고 시종일관 같은 모습이었다. 당형堂兄인 활당공活塘公이 집을 떠나 먼 곳에 머물 때 병에 걸렸는데 열이 무척 심하셨다. 자제들은 모두 먼 곳에 있었고 동복童僕들도 모두 누워 있었는데, 중씨가 손수 약을 지어 먹이며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불행히도 활당공이 돌아가셔서 염을 하고서야 떠났다.
둘째 아들 황潢은 오래 전에 홍휘세洪輝世의 집안과 결혼을 약조하였다. 임자년(1612)의 옥사 때에 홍휘세 집안은 원수 집안의 무고誣告를 받아 화를 가장 혹독하게 입게 되었다. 그런데 황은 출계하여 반성군의 제사를 모셨다. 궁중에서는 화를 입은 집안의 자손이 국구國舅의 제사를 모셔서는 안 된다고 하며 여러 방법으로 으르고 협박하였다. 중씨는 처음에는 그 말을 좇는 듯이 하였으나 몇 년 후부터는 결연한 모습으로 홍씨 집안과 혼인의 예를 행했다. 사람들은 이를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재산을 나누던 날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선대의 재산은 본래 적은데,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대부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니 어찌 늙은 누이와 과부 형수님에게 관습에만 의거하여 재산을 나누어 주겠는가.”하고는 재산을 모두 두 집안에 귀속시키고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친척을 보살펴 한결같이 정성으로 대우하여,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구제하고 위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도왔다. 자제들에게 학문을 성실하게 하라고 가르쳤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어맞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자제들을 불러 읽게 하고는 그 지취志趣를 깨우쳐 주었다. 만약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이 있으면 또한 반드시 가려 뽑아 자제들로 하여금 익숙하게 외도록 하였다. 쓸 데 없이 넓게만 교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말씀하길,“실질적인 보탬은 없고,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만 받을 수 있다.”하셨다.
선대부께서는 왕실의 인척이 된 뒤로는 공무에서 물러나 전연 참여하지 않으셨다. 중씨는 가훈을 잘 받들었으며, 확실하게 지키는 바가 있었다.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고자 하였는데 당시 의론이 어지러워 한 걸음을 걷는 사이에도 자세히
살피는데 이르렀다. 이 때문에 주저하다가 용만龍灣의 역려逆旅에서 인사를 올렸고 나아가 배운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반드시 한 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우계 선생도 중씨를 자주 허여하며 말세의 인물이 아니며, 비록 재상의 자리에 기용하더라도 지나친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이 돕지 않아 오래 고생하다가 빨리 데려가셨으니, 애통한 일이로다! 아우 오창공梧窓公 동량東亮 지음

<반남박씨 종보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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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
   오랫만에 글을 올립니다. [4]

박홍근
2011/11/01 1349 0
417
   68명 중 68등

朴俊豪
2011/09/03 1405 0
416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박찬무
2011/06/05 1454 0
415
   호장공(휘 응주)을‘반남박씨 시조’라 표기한 이유

박희서
2011/06/05 1820 0

   남곽공 휘 동열東說 행장 고찰

박찬무
2011/06/05 2095 0
413
   朴紹의 祠宇를 세워 주기를 청하는 鄭潗의 상소 승정원일기

박찬무
2011/05/28 1565 0
412
   좀 봐주세요...저의 뿌리를 알고자

박도현
2011/05/24 1355 0
411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박찬무
2011/05/08 1847 0
410
   朝鮮時代의 文人

박찬무
2011/04/29 166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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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도공 박은 묘역, 파주시 향토유적 제25호 [1]

박산명
2011/04/12 1705 0
408
   조선왕조실록, 효자 박장손(朴長孫)

박찬무
2011/02/27 167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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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 얼굴 – 박영효.이상협 선생

박샛별
2011/01/15 184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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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대포 박영효의 무덤터 - 부산광역시

박샛별
2011/01/15 2064 0
405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부통령 박영효

박샛별
2011/01/15 1752 0
404
   우리조상 박영효 할아버지 역사관은 과연 무엇인가? [3]

박효서
2010/12/28 164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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