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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우 
Subject  
   의왕시 의일마을 반남박씨 토산공후<의왕시사>
의일마을 반남박씨 남일공 토산공후
의왕시사 에서 인용

의일마을은 100여 호 가운데 반남박씨가 반 정도를 차지하였다. 이 외에, 광주이씨 및 동래정씨 등이 함께 거주하며 반남박씨와 함께 양반으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의일마을의 반남박씨는 남일공파(南逸公派) 가운데 토산공파(兎山公派)이다.
반남박씨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구전에 따르면 남일공 박응남 때라고 하나 실제로는 사후에 묘지를 쓰게 되는 시기부터로 보인다. 박응남은 1527년에 태어나 1572년에 사망하였으며, 대사헌과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호는 퇴암(退菴)과 남일(南逸)이며, 자는 유중(柔仲)이다. 박세채가 쓴 행장에 의하면 박응남은 명종에서 선조 연간에 언관으로 현저한 활약을 보였으며, 과감하고 곧은 언행으로 원망을 사기도 했지만 사림의 신망을 받았던 인물이었다.40) 그의 족손인 박세채는 박응남의 묘소를 참배하고 난 감회를 적은 시에서 그의 언관으로써의 강직함과 유림에서의 신망을 강조하기도 했다.41)
박동점은 박응남의 3남으로 토산현감을 지냈으며42), 17세기의 대 문장가인 신흠(申欽)의 문집에서 그에 대한 만시를 찾을 수 있다.43) 만시에서 신흠은 박동점의 생애를 질병 속에서 학문에 전념한 중국의 황보밀(皇甫謐)과 30이 되도록 자식이 없다가 요절한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에 비유하였다(玄晏一生唯抱疾 顔回三十更無兒). 즉 신흠은 박동점을 질병 속에서도 높은 학문과 인덕을 구비한 인물로 평가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학의동의 반남박씨는 17세기 전반 서인의 명문이었으며, 그에 걸맞는 교우관계와 경력을 쌓고 있었다. 그러면 반남박씨가 이곳에 세거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는 박응남이나 박동점 모두 문집 등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인 입향 시기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전후의 사정을 고려할 때 적어도 박응남의 묘소를 조성한 이후에는 의일 마을에 반남박씨가 거주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곧 선조의 묘지 조성을 통해 동족마을이 형성되는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실제 반남박씨가 입향하는 시기는 아마도 박응남이 사망하고 그의 묘소를 조성한 토산공 박동점 대 이후로 판단된다.
앞서 살폈듯 박세채가 박응남의 묘소를 참배한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박세채가 활동하던 17세기 중엽부터는 반남박씨 가문에서 의곡의 박응남 묘소가 갖는 위치가 중요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1733년에는 이조판서와 우찬성을 역임한 박필주 등의 주도로 의해 묘비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박응남의 묘는 현재 학의동 백운호수 서안 산록에 위치하고 있다. 당대 반남박씨 가문의 위상으로 보아 적어도 박세채가 박응남의 묘를 참배하고 추모시를 쓴 17세기 중반을 전후해서 이미 동족마을의 형태를 보이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이렇게 정착하게 된 의일마을의 반남박씨는 현재까지 약 400여 년 이상을 이 지역에 세거해 왔다.
의일마을 반남박씨의 시제일은 음력 10월 10~13일까지였다. 10일은 남일공 박응남의 시제를 지내고, 이후 사흘 동안 다음 대의 시제를 지내 모두 12명의 시제를 각각의 묘에서 지냈다. 그런데 남일공 박응남의 시제와 합천에서 지내는 그의 아버지 야천공 박소의 시제가 같은 날로 겹쳐, 남일공의 시제는 음력 10월 12일로 옮겨졌다. 다음 대의 제사는 공휴일에 현재의 사당인 의곡재 자리에서 합동으로 제사하고 있다. 2000년 재실인 의곡재(義谷齋)를 지은 이후에는 사당에서 역시 아래 대의 제사를 모시고 있으나, 남일공 박응남의 제사는 여전히 묘소에서 지낸다.
이상에서 살펴보듯 반남박씨의 묘소는 가문을 한 곳으로 모으고 동족 마을의 결집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반남박씨 마을의 선조 묘소는 다른 성씨의 묘지기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구전에 따르면 일제시대 반남박씨 묘소를 관리하던 묘지기는 6집이었다. 이들은 위토를 경작하고 각 집안에서 두 반상을 차렸으며, 묘지기 생활을 통해 밑천을 쌓으면 그만두고 나갔다고 한다.
주로 중인 계층에서 묘지기를 담당했는데 한국전쟁 이후 농사를 지어도 수지가 맞지 않아 묘지기를 하려는 사람이 없게 되자, 묘지기를 두지 않게 되었다.

<의곡재>
반남박씨 토산공파의 계보는 대략 다음과 같다.
1世        應珠                                                                                
2世        宜                                                                                
3世        允茂                                                                                
4世        秀                                                                                
5世        尙衷                                                                                
6世        訔                                                                                
7世        葵                                                                                
8世        秉文                                                                                
9世        林宗                                                                                
10世       億年    兆年                                                                                     龜年
11世                 紹(冶川)                                                                   
12世                 應川   應順   應男( 南逸, 退菴 : 1527~1572)          應福         應寅
13世                                   東點(兎山公)             東烋        東壽                          
14世                                   增                                                     
15世                                   世哲        世鳴        世傑                                   
16世                                   泰來        泰林                                            
17世                                   弼樺                                                

반남박씨는 처음에는 소론의 입장이었지만 이후 적지 않은 인사들이 노론과 뜻을 같이하기도 하였다. 학의동 반남박씨 가문은 소론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소론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이는 부분은 제사진설이다. 과일을 홍동백서(紅東白西)로 놓는 노론과 달리 이곳 반남박씨는 집사자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부터 조율이시(棗栗梨枾, 대추•밤•배•감)의 순서로 놓는다. 그리고 좌포우해(左脯右醢)에서 포는 잦혀서 놓는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반남박씨는 의일마을에서 양반 집안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지역의 일부 성씨와는 통혼의 사례가 없다는 점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반남박씨들은 큰 일이 있을 경우 내손동 능안마을의 전주이씨와 서로 협조하였다고 전한다. 초상이 났을 때 능안마을의 전주이씨들이 의일마을의 반남박씨에게 상여를 빌렸던 것은 그 예라고 힐 수 있다. 내손동 서술 부분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 두 성씨는 의곡면지역을 주도하던 대표적인 양반 집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은 경제적으로도 우위에 있었다. 농토가 많아 ‘백여호 되는 내촌에서 우리 땅이 아닌 게 없었다’는 박창서44)의 증언은 그 예이다. 즉 반남박씨는 전통적으로 양반으로써 지역사회를 주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지위는 경제력으로 뒷받침되었다.
그러면서 반남박씨는 마을의 질서나 전통을 유지하는 데에서도 주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뚜렷한 문헌적 증거는 남아있지 않으나 증언에 따르면 향약과 유사한 형태의 사회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즉 잘못된 일이 있을 경우 이장집 마당에 불러 물볼기를 치는 등의 징벌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장은 양반들이 역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형벌은 중인 이하의 계층에 시행되었으며 양반의 경우는 집안에서 자체적으로 징계하였다고 한다. 곧 뚜렷한 향약 시행의 문헌적 증거는 없지만 마을을 주도하는 양반 사족을 중심으로 향약이나 동계 등 조선시대 향촌의 자치규약과 유사한 형태의 사회질서가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을의 허드렛일은 중인 이하의 계층에서 담당하며, 양반들은 신분적 권위를 가지고 자체적인 통혼권을 형성하면서,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 이후 반남박씨가 가지고 있던 탄탄한 중앙정계에서의 지위는 학의동 반남박씨의 권위를 더욱 높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남박씨의 주도권은 지명 유래에서도 드러난다. 의일마을의 오룡동(오링계)의 유래는 남일공 박응남의 묘 터가 풍수지리 상 용 다섯 마리가 굽어보는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실제 묘소 주변에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백운호수 자리에는 연못이 있어 다섯 용에 해당하는 산봉우리와 조화를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반남박씨 일족은 한편으로 각종 의례를 통해 가문과 마을의 결속을 다졌다. ‘일년 열두달 이름있는 날’은 모두 제사를 지냈다는 증언에서 보듯, 양반의 의무인 제사는 일년 내내 이어졌다. 한편 마을의 결속을 다지는 산신제도 반남박씨 집안에서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에도 박창서씨가 백운산신을 모시는 산신제의 택일과 제관 선정 등을 맡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통마을에서 그렇듯 이 지역에서 전통적인 사회질서가 남아있던 시기는 대략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양반과 상한의 구분이 있었으나, 사회질서가 변화하면서 이러한 신분구분은 점차 사라졌다. 그 결과 몇 가지 풍습의 변화도 나타난다. 이전까지는 마을에 상이 있을 경우 중인들이 상여를 메던 것이 해방 이후 마을에서 사촌계가 생긴 것을 계기로 신분의 구분 없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상여를 메게 되었다. 반남박씨의 경우에는 한국전쟁 이전 몇몇 타성받이들을 묘지기로 삼아 위토의 경작과 제수 마련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사회질서가 변화하고, 위토 경작의 수지타산이 맞지 않게 되자 묘지기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와중에서도 반남박씨 집안의 인사들은 기존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박창서가 산신제를 주관하고 부조계의 설립을 주도하는 등 반남박씨는 여전히 마을 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전근대적인 신분제에 기반한 사회관계는 거의 해체되었다. 곧 해방 이후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사회변화가 마을의 풍습에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근대화의 진전에 따라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학의동의 반남박씨 역시 적지 않은 종원들이 도시로 나가 살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아직도 박응남의 묘와 선조들의 재실인 의곡재(義谷齋)등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계속 결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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