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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박선우 
Subject  
   박승극,수원서 청년·농민운동 주도 25번 구금


박승극(朴勝極 1909 ~ ? )

호군공后
경기도 수원에서 청년·농민운동 주도… 일제 경찰에 25번 구금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박승극의 문학사적 의미 재평가

일제 경찰에 25번이나 구금당하다
박승극은 1909년 12월14일 경기도 수원군(현 화성시) 양감면 정문2리(포당동) 348번지에서 반남박씨 아버지 박흥양과 예안이씨 어머니 이인서 사이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 양감면 사창리에 설치된 보신강습소에서 근대교육을 받다가 서울로 올라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8년 배재고보 4년을 수료한 뒤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대학 예과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학과 공부보다는 사회주의 출판물을 탐독하면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고, 결국 ‘부르주아 교육’을 거부한 채 그해 7월 자퇴, 귀국하였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식민지 조국의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 그는 먼저 고향 정문리에 사재를 들여 신흥학당을 설립하고 빈농층의 무산자 자녀교육을 시작했다. 신흥학당에 수원소년동맹 양감지부 간판을 걸고, 밤이면 머슴살이를 하고 낮에는 부모를 도와 들일을 해야 하는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박승극은 귀국 직후부터 수원을 중심으로 한 각종 사회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 1928년 7월 양감면 반도청년회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수원청년동맹 조직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한 이후 1929~1930년에 걸쳐 일제 경찰의 탄압을 무릅쓰고 수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8년 12월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의 수원지회에서도 조직선전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합법운동 공간의 확보를 위해 조선일보 수원지국을 운영하면서 수원기자동맹을 창립하고 집행위원에 선정되었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 수원지부 결성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여 1929년 4월 설립대회에서 집행위원(서무부)으로 선정되었고 곧이어 지부장이 되었다. 특히 1930년 3월29~30일 이틀 동안 화성학원에서 개최한 제1회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전람회는 당시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비록 프로미전이 전국적 대중적 규모로 진행되지는 못했으나 일제 경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회화, 만화, 사진, 포스터, 조각 등의 작품을 통한 계급투쟁 선전을 위한 최초의 시도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사회운동상에 변화가 나타났다. 즉 이항발, 차재정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청년총동맹의 중앙 간부들이 ‘공민권획득’을 주장하며 합법운동으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수원청년동맹은 반대입장을 표명하였으며, 박승극은 ‘삼천리’ 1931년 5월호에 조선청년총동맹의 해소를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즉 ‘조선청년총동맹 해소투쟁전국위원회’를 조직하여 각 지방에 청년부를 확립하고, 조선청년총동맹을 해소한 뒤 각종 청년단체와 청년운동 관련 연구단체, 학생단체를 망라하여 ‘조선청년협의회’를 결성하자는 주장을 제기하였다(1931년 3월 작성). 그는 신간회 해소대회에도 참석하여 카프동맹원들과 함께 신간회 해소론을 적극 주장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박승극은 수원군과 진위군을 묶어 수진농민조합을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에 적극 관계하였다. 그는 1931년 2월 수진농민조합의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곧이어 빈농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즉 적색농민조합으로의 전환에 적극 참여하여 소작쟁의를 정치투쟁으로 이끌어갔다. 그러나 그해 11월 일제 경찰에 의해 조작된 ‘수진농민조합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1933년 3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1934년 9월에는 그동안 해소를 결정하거나 침체상태에 있던 단체에 대하여 일제 경찰의 요구대로 해산계를 제출하여 관련 단체의 회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사회운동에 참여한 이래 무려 25번이나 구금당했던 그는 이후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글과 사람이 똑같았던 박승극
박승극은 수필과 소설 등의 창작활동과 문학평론에도 적극적이었다. 박승극이 문인으로 등장한 것은 1929년의 일이다. 그는 카프 수원지부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조선지광’ 1929년 6월호에 단편소설 ‘농민’을 발표하였다. 평론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32년 ‘프로문학운동에 대한 감상’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조선일보와 신인문학, 조선문단, 신조선 등에 카프 관련 문학평론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평론은 카프해체론, 사회주의 리얼리즘론, 농민문학론 등에 대한 논의가 중심을 이뤘다. 카프 해소를 적극 지지한 박승극은 1934년 카프 수원지부를 해체하였고, 1935년 5월 카프 중앙본부 임화의 제의에 따라 카프의 해산에 동의하였다.
이후 감옥체험을 소설화한 ‘풍진’, ‘추야장’ 등을 발표하여 ‘치안유지법’으로 감옥에 갇힌 수많은 항일투사들의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배 아래에서도 끊임없이 전개된 치열한 반일 민족해방운동의 실상을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그린 ‘평범한 이야기’, ‘술’ 등 다수의 수필과 소설을 발표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전시체제기로 접어들어 통제가 더욱 가혹해지고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던 1941년경부터는 고향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지냈다.
박승극의 문학비평과 창작활동은 곧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이론과 실천의 통일 그 자체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시종일관 사회주의적 이념에 입각해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사회운동가로서 일제 강점기 농촌 현실에 대한 풍부한 현장성과 그곳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겪은 다양한 체험을 형상화하였다. 그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적 입장에서 평이하고도 쉬운 문장을 사용하여 일반대중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자 노력하였다.
당대의 한 평자는 박승극의 글을 가리켜 ‘아기자기한 문장의 아로새김이나 화려한 문채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사회악에 정면으로 부닥쳐 온 긴장된 생활경험이 풍부했던 만큼 그 문장에는 기상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최근의 연구자들은 그의 소설에 대하여, 단호한 이데올로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주의자 소설의 모범을 제시했으며, 자신이 자라고 활동해온 수원지역을 공간으로 한 활동보고서라고 평가하고 있다.

해방 전에도 밤길을 걸어야 하고, 해방 후에도 밤길을 걸어야했던 박승극
광복과 함께 박승극은 수원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1945년 11월 수원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미군정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이에 대하여 박승극은 자전적 작품인 ‘길’(문학평론 1947년 4월호)에서 8·15 해방의 환희에 날뛰던 그 길이건만 “해방 전에도 밤길을 걸어야하고, 해방 후 오늘에도 밤길을 걸어야만 되는 것인가”라고 한탄하였다. 그의 구속은 해방 이후 구속 문인 1호여서 사회적 관심이 대단했다. 그의 구속 소식을 듣고 여운형과 이강국 등이 수원에 내려와 구명운동을 벌일 정도였다. 해방 직후 공산당에 입당한 박승극은 남조선 수원군당 개편대회를 개최하였고, 1946년 공산당과 신민당 합당을 추진하였으며, 서울로 올라가 조봉암과 함께 경기도 대표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창립대회에 참석하였다.
해방 이후 월북하기 전까지 박승극은 ‘떡’, ‘사랑’, ‘밥’ 등의 농민소설을 발표했다. 특히 ‘길’에서는 자신의 내면세계, 즉 총독정치 아래에서 목숨을 걸고 사회운동의 제일선에 섰으며, 해방 후에는 미군정 통치 아래에서 조직운동을 하면서 토지개혁을 부르짖다 수배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현실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박승극은 1948년 8월께 아내와 아이들, 남동생 승우와 함께 북으로 가서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시기에 그는 잦은 방화로 생명을 위협을 받고 있는 가족을 보호하고, 친일파 민족반역자 대자본가, 대지주를 위한 가짜 민주주의를 거부하며 북한을 선택했다. 194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으며, 문화선전성 문학예술부장 및 기관지 ‘선전자’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박승극은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원으로 내려와 수원군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시기에 동생 승우는 마포구 인민위원장이 되었으며, 고향에서 활동하던 승호는 전쟁 중에 보도연맹 관련자로 예비검속 된 뒤 양감면 야산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
박승극은 북으로 돌아간 이후 국립출판사 사장을 거쳐 1960년대에 청진의과대학교 조선노동당 책임자로 있으면서 창작활동에 전념하였고, 1970년대에는 조선작가동맹 개성시 지부장 및 개성시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정확한 사망시기는 알 수 없으며, 평양의 애국열사 묘역에 묻혔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그의 마지막 소설은 1970년 10월호 ‘조선문학’에 발표한 ‘밤하늘의 별들’이며, 한국 문학사에서는 1988년 월북 문인 해금조치가 이뤄진 뒤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2001년에 박승극 문학전집 편집위원회에서 ‘박승극 문학전집1-소설’을 간행했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박승극의 문학사적 의미 재평가
박승극은 5년여 배움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당시 수원군 양감면 정문리에 살면서 수원지역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사회운동과 문학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도 조선청년총동맹,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신간회 등의 중앙운동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20여년 동안을 싸우고, 해방 후에는 조국의 장래와 민중을 위해 남북이 통일된 단일정부를 지지하며 투쟁하던 그는 사회주의 이념을 놓지 못한 채 결국 북한을 선택하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에는 수원군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박승극의 일생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2009년은 박승극이 태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수원을 떠나 북으로 간지 60년이 지났으나 수원과 화성지역에서는 박승극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분단의 아픔은 여전히 곳곳에 상흔을 남기고 기억으로 재생산 되어 정치적, 감정적 대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지난 어두운 역사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서로 용서하는 포용의 자세를 가지고 남북화해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승극의 사회운동과 그를 바탕으로 한 문학활동에 대한 재평가가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인식과 통일문학사 기술을 위한 예비작업이자 남북통일을 향한 준비라고 하는 시각은 아주 정당하다고 할 것이다.

[경기일보 2009-3-20]  
담당기자 : 박철하 경기기록문화포럼 학술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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