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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박관우 
Subject  
   牛痘朴生員 " 朴勝錫의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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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勝錫의 本은 潘南으로서 조선왕조 후기인 1865년(고종 2년) 경기도 연천군 군내면 상리 일명 방골이라는 마을에서 출생하는데, 원래 방골의 호칭은 밤이 많이 열린다 해서 밤골이라 불리워 졌으며, 坡平尹氏 集姓村이 있었던 곳인데, 과연 언제부터 이 마을에 군민들이 거주하였는지 그 역사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朴勝錫이 방골에서 태어나게 된 연유를 알기 위해서는 선대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없는데, 원래 朴勝錫의 조부인 朴齊廉(1800~1845)은 원래는 삭녕군 출신이나 31세가 되는 1830년(순조 30년)에 당시 방골에 거주하고 있던 일가 아저씨뻘이 되는 朴河壽의 양자로 입적이 되면서 바로 방골로 이주하게 된다.

여기서 朴齊廉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를 하면 朴齊廉은 正祖大王이 승하한 1800년에 태어나서 46세라는 젊은 보령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와 관련된 몇가지 일화가 있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학문이 어느 정도로 뛰어났는지 현재로서는 알길이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과거를 보는 친구들이시험을 잘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 의미에 대하여는 정확히 모른다.

그리고 정작 본인이 과거를 응시하려고 하였을 때는 병이 들어서 그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임종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이미 양자부분은 앞에서도 간략히 소개한 바 있지만 31세에 양자를 가게 되는데, 여기서한가지 주목할 부분은 朴齊廉 사후 제사를 모실 때 함께 모시던 문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양자관련 문서로 추정되는데, 이런 귀중한 문서가 그만 6.25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 언급한다면 朴齊廉이 임종하기 얼마전에 어느 고개길에서 " 내가 언제 모월모시에 죽을것이다 " 고 하였는데, 정말 놀랍게도 그 일시가 정확히 일치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몇가지 정황을 놓고 볼때도 朴齊廉은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이러한 朴齊廉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朴沂陽이고 차남은 朴允陽 이었다.

朴沂陽(1834~1878)은 사실 특별히 알려진 행적이 없으나 한가지 언급할 부분이 있다면 5형제를두었다는 사실인데, 朴勝錫은 이 중에서 삼남으로 태어나며, 바로 밑에 동생인 사남인 朴勝駿은 당시 南溪 朴世采의 宗孫으로 양자를 가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南溪로 말할것 같으면 조선왕조 숙종때 좌의정을 역임한 대학자이면서 동시에 정치가로서 당시 정계의 실세라 할 수 있는 尤庵, 明齋와 쌍벽을 겨누는 인물이었는데, 朴勝駿이 이러한 집안의 宗孫으로 양자를 갔다는 자체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집안의 배경속에서 성장한 朴勝錫이 같은 방골의 일가 친척에게 양자를 가게 되는데, 사실그 경위에 대하여 정확히 모르며, 한마디로 그의 어린 시절은 거의 공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방골에서 최초로 우두시술을 하여그 활동 범위가 연천군을 비롯하여 인근의 철원군까지 영향이 미쳤다고 하며, 당시 군민들로부터” 牛痘朴生員  " 이라는 호칭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朴勝錫이 언제부터 어떤 계기에 의하여 우두를 배우게 되었으며, 그 범위가 연천, 철원군까지 확대될 수 있었는지 그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점에 대하여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또한 당시 군민들이 불렀다는 牛痘朴生員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호칭이었는지에 대한 관련자료 역시 전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총독부 관보 1913년 4월 14일자 기사에서 朴勝錫이 3월 8일부로 種痘認許員으로 등록되었다는 기록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 자료의 가치는 그동안 단지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朴勝錫의 활동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을 뜻하기에 사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본다.

1913년이라면 朴勝錫의 보령 49세가 되니, 거의 50세가 되는 상황이었는데, 과연 이러한 때에 種痘認許員으로 등록하게 된 경위는 무엇이었으며, 그렇다면 種痘認許員 이전에는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와 種痘認許員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행적이 전혀 드러나
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렇다면 牛痘朴生員과 種痘認許員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앞으로이 부분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본다.

한편 朴勝錫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분기점이 발생하니 그것은 방골을 떠나 인근의 大光里로 이주하였다는 점인데, 어떤 연유로 다른 마을로 가게 된 것인지 이 점도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라고생각한다.

끝으로 牛痘朴生員으로 알려졌던 朴勝錫은 결국 광복 8년을 앞둔 1937년 大光里에서 향년 73세를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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