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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반남 박씨의 특질
-소설가 박완서 (오창공 후)-
나는 개성에서 20리가량 떨어진 벽촌에서 태어났다. 20호가 채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홍(洪)씨들의 씨족마을에서 반남 박씨는 우리 집 하고 또 한집, 단 두 집 밖에 없었다. 그 친척집의 웃어른은 우리 할아버지하고 비슷한 연배였는데 나하고 같은 항렬이고 촌수로는 나하고 십촌간이라고 했으니까 그 두 집도 가까운 친척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의 조부님 함자는 주(冑)자 양(陽)자시고, 아버님 함자는 영(泳)자 노(魯)자시다. 아버님은 사남매 중 맏이여서 같은 항렬자를 쓰는 아우가 두 분, 누님이 한분 계셨다. 가까운 친척은 서울과 강화도 쪽에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강화도 쪽 친척은 아버지하고 같은 항렬인데도 항렬자로 泳자를 쓰지 않고 勝자를 썼고, 서울 쪽 친척은 거의가 泳자를 썼다. 어려서는 그게 그런가보다 왜 그런지 모르다가 훗날 梅泉野錄을 보고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매천 황현의 기록에 의하면 갑신정변 때 주모자들은 모두 대대로 벼슬하던 대족으로 일시에 역적이 나란히 나오게 되니 종친들은 부끄러워하여 주모자와 같은 그들의 항렬자를 고쳤다고 나와 있고, 일일이 예를 든 가문 중에 반남 박씨는 泳을 勝으로 고쳤다고 되어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집안은 갑신정변의 주모자중 한사람이었던 금능위(錦陵尉)박 영효네 집안과는 성과 본이 같을 뿐, 촌수를 따질 수 있는 친척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는 금능위를 자랑스럽게 여겨 툭하면 우리 가문의 양반자랑을 할 때, 이씨왕조 오백년 동안에 부마를 세 분이나 배출한 집안이라는 걸 강조하셨다. 그 세 분의 부마는 금양위, 금성위, 금능위이고 우리는 금양위 자손이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오빠하고 단둘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오빠하고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된다. 중간에 삼남매나 잃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오빠는 공부 잘 하고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난 모범생이었지만 반골기질이 강했다. 할아버지의 양반타령에 은근히 비판적이었다. 부마를 세 명이나 배출한 집안, 그거 조금도 자랑할 게 못된다면서 오죽 못났으면 임금의 사위노릇을 하냐고 비웃었다. 나한테도 우린 금양위 자손 하지 말고 燕岩 자손하자고 꼬드겼다. 연암이 누군지도 모를 때였다. 오빠의 이런 반골기질은 훗날 좌경화로 나타나서 집안에 화를 불렀고, 제 명에 못 죽었다. 오빠를 많이 따랐고 서로 우애가 지극한 남매간이어서 그 충격과 상처는 지금까지도 내 정신의 깊은 골짜기에 아물지 않고 남아 있다.
박 영효네 집안과는 동성동본일 뿐 촌수가 가까운 친척은 아니었다 해도 개화파의 기질 같은 건 반남 박씨가 공유하는 DNA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로는, 나는 31년생에다 아주 보수적인 촌구석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전혀 남녀차별을 안받았다는 걸 들 수 있다. 우리 집안은 여식이 태어나도 이름을 지을 때는 항렬자를 따라서 지었고 제사나 차례 때도 여자라고 빼놓지 않고 참예를 시켰다. 당시만 해도 그건 딴 집안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 집안만의 가풍이었다. 내 이름을 지을 때 할아버지하고 아버지 두 분이 밤새도록 이마를 맞대고 고심 끝에 지었다는 걸 철나면서 전해 듣고는 내가 이 세상에 올 때 환영받았고, 충분한 사랑과 존중을 받았다는 게 느껴져 두 분께 감사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었다.
우리집안이 우리 마을의 딴 집안하고 확연하게 달랐던 것 중에 유별난 교육열도 빼놓을 수 없다. 지주가 따로 없이 다들 그만그만하게 사는 자작농들이어서 사는 정도가 비슷했는데 조금 잘 사는 집은 논밭 외에 삼포를 가졌거나 개성시내의 부자들 소유의 큰 삼포 일을 맡아보는 일을 가진 농가였다. 우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숙부 한 분은 일찍부터 외지로 떠돌아 노동력의 부족으로 삼포 일을 한다는 건 엄두도 못내 겨우겨우 사는 형편이었다. 넉넉한 집에서도 계집애는 언문이나 깨치면 잘 가르쳤다고 여길 때, 나는 소학교부터 서울서 다닐 수 있는 특혜를 누렸다.
또한 시골사람뿐 아니라 서울사람들도 양력설은 일본설이라고 배척하고, 어떡하든지 일본사람들이 금하는 음력설을 조선 설이라고 쇠는 걸, 마치 독립운동 하는 것처럼 비장한 사명감으로 하던 식민지시대에 우리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독불장군으로 우리 집만 양력으로 설을 쇠게 하셨다. 서울 손자들이 겨울방학해서 내려와 있을 때, 음식장만도 하고, 차례도 지내야 한다는 게 그 분의 소신이셨다. 뿐만 아니라 음력의 절기가 더 농사에 맞는다고 믿는 동네사람들에게까지 양력의 절기는 음력처럼 들쭉날쭉 없이 일정해서 농사에 더 잘 맞는다는 걸 역설하셨다. 동네사람들에게 친일적으로 보일 이런 행동을 서슴없이 하던 할아버지는 그러나 창씨개명은 끝까지 못하게 하셨다. 우리 동네 홍씨들이 일제히 도꾸야마(德山)가 된 후에도 우리 마을의 반남 박씨 두 집은 성을 갈지 않고 외롭고도 당당하게 박씨 문패를 달고 살았다.
호학(好學)하고 합리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꼭 지켜야할 지조와 신념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게, 할아버지를 통해 유추해낸 반남 박씨의 특질이라고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글은 【반남박씨 종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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