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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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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박제형 일본에 대항하던 독립투사
 
                                  일본에 대항하던 독립투사 故 박제형翁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후손들의 몫


故 박제형 翁의 생전 모습
  
해마다 돌아오는 삼일절은 우리나라가 자주 독립국임을 세계 만방에 선포한 날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나라도 평탄하기만 한 역사를 가지진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지정학적인 이유로 특히 수난을 받아온 굴곡 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현재에도 남과 북으로 양분되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고 할 것이다.
자국을 위한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 그 가운데서도 그 옛날 일본에게 나라의 주권을 빼앗겨 온 민족이 광분해 있던 때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역사의 한순간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투사를 자처하며 독립운동을 벌이고 일제의 무력 정치에 대항하여 항일운동을 꾸준히 행하였던 독립 투사들과 만날 수 있다.
당시, 마음속으로는 누군들 독립투사가 아니었을까마는 우리 민족의 후원속에 자신의 가족과 삶을 희생했던 독립투사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리라. 이에 본지에서는 경북 영주시에 거주하는 박태서(80)씨의 제보와 함께 서병극(전국시도향교재단이사장협의회 경상북도향교재단이사장)씨의 안내로 독립운동을 앞장서서 했음에도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독립운동가 故 박제형 翁의 지인들과 선조의 공적을 찾아주기 위해 애쓰는 후손들을 만나보았다.

■  영주지역 곳곳에 활동상은 남아있지만 묘소엔 비석하나 없어
박태서(80)씨는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의 독립운동 행적을 듣고 보며 자랐죠. 독립운동가였던 故 박제형 翁의 활약상을 직접 보기도 했고 전해 듣기도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제보자이기도 한 박태서씨 또한 1945년 8월까지 항일투쟁을 했으며 그의 백부인 박승인씨는 신채호, 김창숙, 안재홍, 송영호, 여운형 등과 상호 동지였으며 그 영향을 받아서 소년시절부터 위국고력(爲國苦力)을 다하였다고 한다.
기자를 안내했던 서병극씨는 “지역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지역에 독립투사가 있었음에도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전한다. 그의 말처럼 영주지역에서는 故 박제형 翁의 활약상들이 기념비와 역사기록물 등에 나와있음에도 정작 그의 묘소는 비석하나 없이 쓸쓸하기만 했다.
고종19년인 1882년 7월, 영주군 문수면 탄산리에서 출생한 박제형 翁은 학식과 인품으로 인망이 두터워 영주에서 유도청년회, 신간회 등의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고장의 청소년을 계도하고 항일 독립정신을 함양시켰다고 영주 지역에서는 전해지고 있다.
그러한 분명한 그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로 이름이 남지 않음은 그의 후손들뿐 아니라 그 지역주민들조차 안타깝게 여기기는 마찬가지다.


영주지역의 주민들이 함께 모여 독립운동가 박제형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좌측에서 세번째가 제보자 박태서씨다 
 
■  가산 털어 군자금 조성에 기여한 박제형, 그는 누구인가?
박제형 翁의 투쟁과정은, 독립운동가이자 성균관대 설립자로 알려진 심산 김창숙 翁과 같이 항상 선도적인 위치에 있어 계승 인맥이 존재한다는 것이 영주지방에서는 특이한 상황이었으며, 박승인, 송영호, 정규창, 김화진, 박태서 등으로 해방 때까지 항일운동을 지속했다.
그의 항일 투쟁사를 살펴보면, 영주의 유림청년회(1919~1935)를 결사조직하고 각 부락에 야학회를 설립하여 항일 반일의 사항을 주입하였다. 또한 양조장과 인쇄소를 경영하여 그 자금을 제공하면서 회장으로서 솔선 활동하니 이것이 바로 유림회 사건이다.
일본 침략자들의 만행을 규탄하고 자주와 독립을 호소하는 장서를 파리의 만국평화회의(1919년 1월)를 통해 전파할 목적으로 곽종석, 이만규, 권상익, 김동진, 김창숙 등과 계획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도피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파리장서 사건이다.
또한 박제형 翁은 인쇄소를 경영하면서 결사와 계몽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100여명과 함께 체포, 구금되어 성산 형무소에서 3개월 복역하였으니 이것이 정론사(正論社) 사건이다.
김창숙 등과 독립자금 모금조직에 활동하다가 발각되기도 했으니 이것이 유림단(儒林團)의 군자금모집 사건이다. 이로 인해 박제형 翁은 1926년 체포 구금되어 성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던 중 1927년 2월 대구지방법원 공판에서 면소석방 되었다.
한편 박제형 翁은 신간회(1928~1930)를 조직하여 김창숙, 정규창, 김화진 등과 영주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차후에는 영남의 명사들과 더불어 성동(成東)이란 결사를 맺어 산수에 거닐며 자적하다가 1948년 7월7일, 향년 67세에 사망했다.
박승억씨는 조부의 업적을 익히 아는 문학박사인 이가원씨로부터 墓碣銘(비문)을 받았으나 아직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정부로부터 조부가 독립운동가라는 인정을 얻은 다음에 업적을 기리는 비문을 담아 비석을 세우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보훈처에서는 물증이 미약하다는 이유로 보완을 요구한 상황이어서 아직 비석을 세우는 일도 보류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 조부 박제형 翁의 묘소에는 비석하나 없다고 한다.
故 박제형 翁은 슬하에 遠陽(면장역임), 敦陽(군수역임), 仁陽 등 세 아들을 두었으며 손자로는 원양의 子로 승억·승덕·승극, 돈양의 子로 승엽·승책, 인양의 子로 승종 등을 두었다. 모두들 선조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왕성한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비석 세우기를 보류하고 있는 것은 인정받지 못한 선조의 업적을 되찾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倭警의 가택수색 빈번,독립운동관련 증거물 멸실
박승억(68·박제형 翁의 장손)씨는 “공직에 있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시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조부의 업적보다 덜한 사람도 나라에서 인정하고 적절한 포상이 주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라에서 알아서 선처를 해줄 것이라 여겼습니다. 영주시 쪽에서는 조부가 독립투사로 이름이 나있고 이 지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었죠. 그러니 찾아다니면서까지 알릴 필요가 있나 했던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라고 토로한다.
실제로 故 박제형 翁의 활약상은 영주지, 우리고장의 전통문화(영주시, 영풍군), 우리 고장의 전통문화(수정판), 경상북도사(중권), 문화유적총람(경상북도편), 暴徒史 편집자료(고등검찰요사), 69.2.14 영남일보 횟불반세기, 영주 영풍 향토지, 항일독립투사 기념비 등에 그 흔적과 기록이 남아있었다.
나라에서 인정해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보훈처에서 애국지사들을 발굴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조부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애국지사들을 발굴하기에도 바쁠 터였다. 그래서 박승억씨는 직접 나서기로 했다. 조부의 업적이 담긴 물증과 증언, 기록 등을 수집해 나갔다.
“선친께서 조부의 위대한 獨立運動史科를 밝히고자 당시 구국 활동을 했던 김창숙 옹을 찾았으나 와병중이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김翁마저 별세하셨으니 조부의 숨은 공적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라고 박승억씨는 술회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부의 행적을 잘 아는 鄕內 노년층 및 지역유지들에 의해 공적신청을 권유받게 되었고 증언과 기록을 수집하여 보훈신청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숨어서 하는 일이었기에 왜경(倭警)의 삼엄한 가택수색이 빈번하였던 터라 독립운동에 관련한 모든 문건과 증거물은 멸실되었고 그나마 역사적인 기록에 조부의 행적이 남아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좌)영주시에 세워진 독립운동가들의 기념비 (우)박제형 翁의 독립운동 관련기록이 새겨진 기념비  

■  독립운동가는 일제에 항거 하다가 순국하거나 항거사실이 있는 자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정부가 마련한 것은 사회적인 제도장치를 통해 그들의 유족들에게 혜택을 주는 방식이다. 그 조상들의 업적과 공로를 인정해서다. 그러나 활동을 한 흔적이 분명함에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독립운동가의 명단에 오를 수 없고 유공자들 또한 그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현재, 정부에서 지정한 국내의 독립유공자 대상 자격은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박제형 翁은 지역적으로는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임에도 나라로부터 그 인정을 받지 못하니 그 후손들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비문을 남기고자 하나 이왕이면 조상의 공적을 인정받고 그의 묘소에 공적을 기리는 비문을 제대로 세워주고 싶어도 마음만 있을 뿐이다.
박승억씨는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아직 선조의 훌륭한 업적을 밝혀내지 못한 무능한 후손으로 남게 됨이 무척이나 송구하다”고 토로한다. 독립운동을 한 흔적이 있는 친인척을 가진 사람이거나 후손이라면 어찌 박승억씨의 마음과 같지 않으리오.

■  있음에도 못하는 것은 무능한 탓이라며 눈물
“가족이나 집안어른들 보기가 민망해 몸둘바를 모르겠다”며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못하고 있음에 자신의 무능한 탓 같다”는 박승억씨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독립운동가들의 여러 유형이 있고 국가 역시 할 일들이 산재해 있을 것이니 어찌 일일이 그들의 공적을 다 챙길 수 있었을까마는 그의 회한의 눈물을 보면서 조상의 업적을 기리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그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며느리를 못봤다는 이유로 남의 주례서는 것조차 꺼려하는 그들의 선비 정신을 보면서 순국선열들의 공적을 좀더 세심하게 살피고 그들에게 조상의 업적을 기릴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다양하게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대한뉴스(2003년3월호)  http://www.daehannews.co.kr/ 에서 퍼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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