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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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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bannampark.org
Subject  
   향토사학자가 본 우리성씨의 유래-부도유시
                           향토사학자가 본 우리성씨의 유래
                          (鄕土史學者가 본 우리姓氏의 由來)
   본문은 금년도에 발간예정(發刊豫定)인 나주시(羅州市) 성씨와 역사 소개(紹介) 자료를 입수하여 우리 반남박씨의 근원을 지역과 사적을 참작하여 여러 갈래로 논하여 져 있어서 전연 생소한 사람이든지, 또는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지 간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게 저술 되여 있어 이를 간추려 여기에 소개합니다. 반면 박씨선원보(朴氏璿源譜)에는 전혀 근거나 사적자료도 없이 우리시조인 호장공(戶長公)을 밀양박씨(密陽朴氏) 밀성대군(密城大君)의 분파(分派)이라고 하여 오지만, 여기 성씨의 발상지에서의 향토학자는 우리들의 선조의 기원을 객관성 있게 다루고 있다.

  반남박씨(潘南朴氏)
  시조는 박응주(朴應珠). 고려조에 호장을 지냈다. 호장공유사(戶長公遺事)에 보면, 그 당시에 주현(州縣)의 촌락(村落)은 대게 1천호 혹은 1백호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박응주도 반남호장(潘南戶長)이 되었다고 한다.
널리 알여진대로 박씨는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조(唯一祖)로 하기 때문에, 반남박씨세보(潘南朴氏世譜)에도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고 박응주를 선조(先祖)라 하고 있다.
그리고 박혁거세와의 소목(昭穆)이 분명치 않아 혈손(血孫)이면서 계대(系代)를 이을 수 없어 박응주로부터 기세(起世)하고 있다. 언제부터 반남을 관향으로 삼았는가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6세 박 은(朴 訔)이 조선 초기에 추충공신(推忠功臣)에 책록되어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진 것을 연유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박 은 의 윗대에서부터도 반남에 대대로 세(勢)를 떨치며 크게 번성해왔던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곧 4세 박 수(朴 秀)가 고려 충렬왕 때에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 上護軍)을 지냈고 그의 아우 박 려(朴 麗)가 금성현장(錦城縣長)을 지냈다는 것과 5세 박상충(朴尙衷)이 우문관 직제학(右文館 直提學)을 지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반남박씨는 문중(門中)에서 조선조에 문과급제(文科及第) 215명, 상신(相臣) 7명, 대제학(大提學) 2명, 왕비 2명 등 많은 인물이 배출 되었으며 특히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연암 박지원(燕岩 朴趾源)은 학자로서, 박영효(朴泳孝)는 철종의 부마(駙馬)로 한말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박씨는 “증보문헌비고” 제계고에 311개 본관으로 나타나지만 85년 조사에서는 127개 본으로 나타났다. 이중에 나주 반남을 본관으로 하는 박씨가 조선조에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해 밀양박씨와 더불어 박씨의 대표적인 문중을 자랑했다.
반남박씨들의 이 같은 정계진출은 경기도 양주의 공암면 마산리(?) 출신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의 친명책에서 비롯했다. 그는 정도전(鄭道傳, ?-1398), 임 박(林 樸) 등과 더불어 이인임(李仁任) 등에 대항해 신흥 중국세력인 친명론을 주장하다가 장살 당했으니 결국은 이성계 장군이 이들의 사상을 수렴해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비명에 간 상충(尙衷)의 아들 박 은(朴 訔1370-1422)은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이미 부모를 잃은 고아 신세가 되었으나 그의 외삼촌이 목은 이 색(牧隱 李 穡1328-1396)이었던 덕으로 무난히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외삼촌인 이 색은 뒤에 이성계의 왕위찬탈에 반대했으나 은(訔)은 동조한 뒤 1401년 제2차 왕자의 란(亂)에 공을 세워 3등 공신이 되었다.
이후 태종의 신임을 받아 우의정, 좌의정 등 지위를 누렸으며 그의 세 아들 규(葵) 강(薑) 훤(萱)도 모두 벼슬을 살아 반남박씨를 조선시대 양반으로서 자리를 굳혀 놓았다. 그러므로 반남박씨는 이성계 혁명세력에 가담함으로써 새로운 명문이 된 셈이다. 1406년 전라 감사로 부임했던 박 은(朴 訔1370-1422)에 의해 나주 반남의 벌 명당이라는 선조 묘역도 크게 손질된 듯싶다.  (1409년 전라 순촬사 “全羅 巡察使”의 임무도 받음 바 있음)
  반남박씨들이 시조(선조)로 내세우는 박응주(朴應珠)의 묘는 반남면 흥덕리(면소재지)에 있다. 응주의 아들 박 의(朴 宜)의 묘는 공암면 마산에 있다고 했으나 아직 찾지 못하고 있
고 응주의 손자 박윤무(朴允茂)의 묘는 응주의 묘와 같은 벌안에 있다. 비명에 간 상충(尙衷1332-1375)은 윤무(允茂)의 손자인데 그 중간이라 할 박 수(朴 秀1298-1373)가 비로소 송도에서 벼슬을 살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그의 묘 역시 찾지 못 하고 있다.
“반남박씨세보”는 상충과 은이 모두 공암현 마산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상 공암현(孔岩縣)은 경기도 양천의 옛 이름이라 나주 반남과 동떨어진 곳이요 송도와도 먼 곳이라 문제가 있다.
  반남박씨세보에서 박 의(朴 宜)의 사적기를 보면  공암의 마산이란 지명은  나주군 동강면에 있을 뿐이다. 반남박씨들의 선대 묘역이 반남에 집중해 있는 것을 보면 경기도 양천보다는 반남에 자리 잡은 호족이 분명하다. 조선초기의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조에 반남의 성은 홍(洪), 조(曺), 박(朴), 채(蔡), 송(宋)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적힌 각 고을 인물을 보면 반남박씨들이 나주목조에는 나오지만 양천현에는 없는 점을 본다면 이들 박씨세보가 공암면 마산을 출생지로 적고 있는 것은 서로 혼돈이 내재된 듯싶다.
  반남면 흥덕이란 마을은 원래 봉덕이란 마을 이름이 변한 것이고 흥덕이란 지명은 반남박씨들이 융성해진 뒤 박응주의 묘역에 관련해 지여 진 이름으로 볼 때 오히려 마을 뒷산 자미산의 옛 이름이 마산이 었을거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 산 밑에 도마란 지명이 있고 자미산은 옛날 후백제 견훤장군이 진을 첬을 때 마장겸 말 조련장으로 썼다는 전설이 있다. 다만 반남면이 공암현이 된 적이 없다는 점이 이 세보상 기록의 문제점이다. 왕곡면의 옛 이름이 마산면(馬山面)이였고. 이곳에 박포(朴浦)리(化丁)와 태마산(泰馬山)등이 있으므로 이곳에서 고총을 찾아봄이 어떨까 싶다?.

  반남은 백제 때 반내부리라 불리던 곳이다. 신라통일 후 반남군이 되었으나 후삼국 때 견훤편에 섰던 탓인지 왕건의 고려가 들어서고 현으로 강등되었다.
왕건이 궁예의 막장으로 견훤의 배후인 나주를 칠 때 나주의 오씨 세력과 영암의 최씨 세력은 왕건편을 들었으며 반남과 회진토호 세력은 견훤 편을 들어 고려왕실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군에서 강등, 나주에 소속되어 버렸다. 그런데 고려왕실이 망해 갈 무렵 반남의 호족으로 이곳 호장 박응주(朴應珠)의 6세손인 박 은(朴 訔)이 고려왕실을 꺾는 이성계에 협력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이성계 집안은 완주로 도읍을 옮겼던 후백제 견훤과 관련 있는 집안이다. 박 은 은 조선개국 당시에는 반남이란 고을이 있어서 반성(남)군(潘城(南)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 때 임내를 혁파하여 주읍(邑)에 합하는 조치가 이루어져 반남이 나주에 합 하여진 연유로 1412년 금천군(錦川君)으로 개봉된다.

  오늘날 반남박씨 선조 들의 터 자리로 여겨지는 자미산 일대에는 마한부족들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고분 21기가 남아 있어서 사적 제76-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 고분과 유사하다하여 한, 일 상고사 연구의 과제가 되어 있다.  
일본학자들은 이 자리가 마한부족국가였든 반구국(半拘國)자리로 보고 있다. 또한 최몽룡교수는 이곳이 마한 목지국(目支國)의 최후 근거지라고 주장한다.  영산강 유역의 토착농경부족으로 독특한 문화를 이뤘던 이곳 마한부족들이 북쪽 부여족에게 쫓겨 고흥 두원면으로 옮겼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상고문화를 이뤘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으로 이곳 부족들은 경상도로 옮겨가 육부촌장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재야 학계의 주장도 있다.  반남은 오늘날 외딴 시골로 버려져 있지만 치수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많은 사람들이 살았음직한 곳이다.
이런 여러 함수관계 때문인지 범박이천년사(汎朴二千年史) 등이 반남박씨는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沈)의 한 분파라고 적고 있지만 반남박씨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박혁거세를 시조로 삼는 것은 반대하지 않지만 밀양박씨의 파계(派系)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반남박씨는 신라계가 아니라 마한게 전남토착세력이 아니었던가 생각해 본다. (註, 부여, 공주 등의 百濟고분에서는 출토되지 않은 금동(金銅)으로된 왕관등 부장품이 반남고분에서는 출토된바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조선혁명에 가담해 중앙정계에 진출한 반남박씨들은 한말까지 사이에 7명의 정승을 배출했고 두 딸을 왕비로 들여보냈으며 다섯 명의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 들였다.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냈든 박숭질(朴崇質)은 고의로 낙마해 등청을 기피했던 기지로 중종반정 때 화를 면한 사람이다.
박 은(朴 訔)이 중앙정계의 기틀을 닦은 반남박씨의 중조(中祖)라면 박 소(朴 紹, 1492-1534)는 학문으로 이 집안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중조라 할 수 있다. 이 씨족은 매년 음력10월 초하루 반남의 상로재(霜露齋)에모여 시조시제를 모신다.

  이상은 향토사학자가 우리 가문에 시조의 형성 유래를 풀이하여 우리들에게 많은 과재를
안겨주고 있다. 한편 여러 서적(奎章閣資料, 高麗史列傳, 東國與地勝覽, 與地圖書, 王朝實錄, 燃黎室記述, 淸選考, 人名大事典, 相臣錄, 羅州邑誌, 南溪集, 錦川朴氏世乘(朴鼎源1824년 순조24), 潘陽世乘(朴定陽1891년 고종28)을 집대성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논술이기에 공감하여지는 부분이 많다. 약간은 향토적인 견지에서 쓰인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가급적 원문에 충실을 기하면서 옮겼습니다.  
                 2003년 9월 20일          부도유사     丁緖.

이글은 반남박씨 대종중 "부도유사"이신  "정서" 부도유사님께서
향토사학자가 본 우리성씨의 유래 에 대해 보내주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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