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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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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이조사화 (사색) - 부도유사 정서
 

                   이조사화 (사색)
                              (李朝士禍, 四色)


    사색이라 함은 노론(老論), 소론(小論), 남인(南人), 북인(北人)의 4대당파(4大黨派)를 가리킨다. 사색이 이조의 519년 중에서 약 340년간에 걸쳐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정치상, 사회상의 특이한 당쟁이다. 사색이란 말이 생긴 것은 인조, 효종 시대(1623-59)로서 노론과 소론은 서인(西人)에서 분파 되였고, 남인과 북인은 동인(東人)에서 분열된 것이다.
    흔히 이조당쟁의 기원은 선조(宣祖) 때의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패싸움에 의한 동. 서 양파의 대립에 두고 있으나 실은 그 원인(遠因)은 훨씬 이전부터의 일이다. 즉 그 원인(遠因)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1.유학파(儒學派)의 대립,  2. 왕실 외척의 편당화
와,  3, 제도상의 결함 등으로 흑백논리(黑白論理)의 국민성이다.
    주자학의 결정적인 단점은 자기주장만이 옳다는 흑백논리로 시종(始終)하여 국가의 의식보다 자기 권력의 유지를 위한 사소한 명분 싸움 이였다. 이 주자학은 고려조 후반기에 충청도 란포(蘭浦)의 백신정(白頣正)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성리학 性理學)을 도입한 후 고려 말에는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으로 계승 되여 이조에 와서 길재(吉再)로부터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 일두(壹蠹)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등 석학이 배출된다. 이 성리학자가 자연 정계에 진출하여 이 유학파와 기득세력인 즉 무오사화의 내용은 유자광(柳子光)과 김종직(金宗直)이, 이극돈(李克墩)대 김일손(金馹孫)의 사적감정으로 나타난 보복행위로서 이 결과 사류(士類)의 일대 숙청으로 비유학파의 승리로 많은 유학파의 학살이 따른 수난 이였다.
    이 무오사화는 다시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발전하여 이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사색당쟁의 원인을 마련하게 된다. 이와 같이 신진사류의 숙청이 계속된 다음은 외척간의 정쟁 개입한 당쟁으로 비화되다. 대윤(大尹) 윤임(尹任),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의 외척 싸움은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의 계속 이었다.  
다음 이조당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전랑(銓郞)추천, 인명을 하는 재도 이다. 이 전랑의 직책임명은 직접 상관인 이조판서에 주워지지 않고 하부직책인 정랑과 좌랑본인이 후임자를 삼사(三司), 즉 홍문관(弘文館),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관원 중에서 가장 덕망과 인격과 학식이 높은 사람을 추천 임명하도록 되어있는 재도 이다. 따라서 이 직책에는 여러 특권이 있으며 이 직책을 거치면 자연 재상(宰相)의 길도 열이여 저 있어 모든 관원이 꿈꾸는 자리이기에 뒷말이 많은 자리이다.  직속상관의 결정권이 없는 임명은 계속 물의를 일으켜 오다가 선조 8년(1575)에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으로 폭발 되였다. 이후 약 300여 년간에 걸친, 정치와 사회를 파쟁(派爭)의 소용돌이에 휘 말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국책운영으로 오늘날의 현실과 같은 당리당략의 정책만이 주장하여 민생복리는 뒷전에 두고 싸우는 흑백논리로 일관하였다.  김, 심 양인의 감정싸움에 인한 반목은 김효원은 김종직 학파에 속하는 학자로서 일찍부터 문명이 알려져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이 높았다. 그런 반면 심의겸은 명종(明宗)왕비의 친아우 심강(沈綱)의 아들로서 김효원보다 7세나 위였고, 행정수완을 발휘하여 38세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는 능력을 인정바다온 인재이다. 그런데 심의겸이 공사로 당시의 권세가 윤원형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김효원이 그 집 문객으로 있음을 보고 선비로서 권문 세도가의 집에 출입함은 전랑과 같은 청관에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심의겸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 후 7-8년이 지나 김효원이 전랑에 뽑히어 신진인재를 많이 등용하고 올바른 정사를 행하여 소장사류의 지지를 많이 받게 된다. 마침 이때에 심의겸의 아우 충겸(忠謙)이 전랑의 물망에 오르게 되었는데 김효원은 외척(外戚)이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다. 심은 이를 자기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하여  이로부터 심, 김 양인의 반목이 점차로 심하여 저 노골화 되여 간다. 차차 사류간의 편 가르기 싸움으로 발전하여 가는데 당시에 김효원이 서울의 동쪽 낙산(洛山)밑에 살았음으로 이 일파를 동인이라 하였고,  심의겸은 서쪽인 정동(貞洞)에 집이 있어 이 일파를 서인이라 하였다.  동인에는 정엽(鄭曄)이 영수가 되고 서인에는 박순(朴淳)이 영수가 되어 당쟁은 본격화 되어갔다.
    그 후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서인이면서도 선조 17년(1584)에 돌아가시기까지 10여년에 걸쳐 조정에 있으면서 양파의 대립을 완화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성과 없었다. 다음에 이산해(李山海), 노수신(盧守愼), 유성용(柳成龍)등 동인의 초특급 인물이 등용 되여 반대로 서인의 쇠태시기이다. 반대로 동인의 세력이 비대하여지면서 이 새가 양분 되여 선조 24년 (1591년)에 남인과 북인으로 양분된다.  북인은 이발(李撥)과 이산해 등이 영수가 되고 남인은 우성전(禹性傳)과 유성용이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남북 명칭의 유래는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이발이 북악산 밑에서 살았으므로 각각 그 파를 남인이요, 북인이라고 하였다.
선조 25년 (1592)에 임진왜란이 일러나 그 후 7년간은 민족존망의 앞이라 큰 당쟁은 없었으나 이 전란이 끝나자마자, 유성용은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구실로 실각하고, 대신 북인의 남이공(南以恭)이 정권을 잡게 되여 자연 동인의 명칭은 없어지고 남인도 몰락하였다.
북인은 또 대북, 소북으로 분파, 이 대북이 6파로 갈리어 소위 골북(骨北), 육북(肉北), 중북(中北), 피북(皮北), 청북(淸北), 탁북(濁北)이다. 이 대, 소 양북이 당쟁을 벌리다가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면서 대북의 이이첨(李爾瞻)이 光海15년간의 영수로서 독단정치를 하여 소북은 숙청 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대북은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다. 이 서인도 한동안은 윤서(尹西, 윤방“尹昉”)와 신서(申西, 신흠“申欽”)로 갈라진다.  이 서인이 다음은 공서(功西, 김 류“金瑬”)와 청서(淸西, 김상헌“金尙憲”)로 분 파되고 다음은 노서(老西, 김류), 소서 (少西, 이귀“李貴”)로 다시 나뉘었다. 이가 공서는 또 원당(原黨)과 락당(落黨)으로 청서는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으로 분당 되여 대립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등극하여 병자호란의 수모가 골수에 사무친 왕의 배청정책이 강하여 송시열(宋時烈)과 정책교감이 이루어 저 다음 왕의 현종 초까지는 서인의 집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서인의 집권의 와중에서도 남인은 이원익(李元翼)의 등용으로 명맥을 이어왔고, 북인중 대북은 전멸하였으나 소북은 남아 있어서  서. 남. 소북의 3파 대립이 형성되었다.  이를 두고 3색이라
한다. 이후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파를 일으켜, 이를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의 4색이라 불리어지게 된 연유이다.  1650년 효종이 돌아가시고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예절문제로 송시열이 물러나자 서인은 세력을 잃고, 연준(尹 雋), 허적(許積)등 남인이 집권하여 새를 회복하여 오다가 1675년 현종이 승하한 다음 숙종(肅宗)이 등극하여 김석주(金錫冑), 김익훈(金益勳), 송시열(宋時烈), 윤증(尹拯)등이 중심이 된 서인집권으로 넘어갔다.
    숙종15년(1689) 왕자저사(王子儲嗣)문제로 송시열이 유배(流配), 사사(賜死)한 사건이 일러나 서인이 숙청된 다음에 남인이 6년간의 비교적 짧은 동안 집권하였으나 곧 서인에게로 넘어갔다. 이 서인도 노, 소론으로 분파 되여 서로 세력다툼이 있었으나 숙종의 치세에는 주로 노론의 권력 행사였다.  다음 경종(景宗)이 즉위, 세제책립(世弟冊立)문제로 노, 소론의 대립항쟁으로 소론의 승리, 이가 경종1-2년(1721-22)에 걸친 신축(辛丑)과 임인(壬寅)에 사화로 심인(辛壬)사화라 하여 노론 4대신(김창집, 이신명, 이건명, 조태채)이 처형되는 일대 숙청 이였다. 다음 왕인 영조(英祖)는 당파싸움의 폐해를 통감,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황극탕평책(皇極蕩平策)의 건의를 받아 드려 인재등용을 각파로 안배하여 이 시책이 정조(正祖)시대로 이어져 이전의 파쟁으로 인한 참극은 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양대 영, 정조 때의 정권은 노론이 주도한 정치이었다. 그 다음의 순조 (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시대는 외척의 정치 농간시기 이고 고종(高宗)시대의 정치는 대원군(大院君)의 집권으로 파당타파(派黨打派)정책으로 인재등용, 문호개방시책 등으로 파당을 일소하고자 노력한다.
    이 당파 싸움은 지배계급의 반목과 대립을 조장하여 부질없는 정쟁, 인재등용의 봉쇄와,
민생문재는 도외시하였고 당리당략에 치우쳐 부패하여 국력은 약화되고 대중의 불신과 민생의 생활은 더더욱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사회적으로는 협동정신의 말살, 감정적인 대립의 유발, 사회 각 계급의 반목 등을 일으켰다.  파가 다르면 피차 내왕한다든지,  혼인도 안하였으며, 학문적 교류도 차단되는 상태를 가져와 동족간의 소원(疎遠)은 물론, 광범위한 혼인의 선택이 안이기에 가까운 유전자(遺傳子)끼리의 혼인이 불가피하여 져 자연히 우생학적인 면에서도 악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재 아무리 우수하거나 능력이 있어도 자파만의 등용으로 자연 국가와 사회는 발전 하지 못함이 자명하여지는데 오늘날의 우리나라 실정과 어찌도 흡사하니 안타깝다.
         1 2 사 화 (十 二 士 禍)
   1) 계유정란(癸酉靖亂). 端宗1년 1453년
단종(端宗)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이 되기 위한 전조부터 내려온 조정중신을 역모로 모라 숙청한 사건.  황보인(皇甫仁領相), 김종서(金宗瑞左相), 정분(鄭笨右相)
안평, 금성대군(安平,錦城大君)등 숙청.
    2) 병자사화(丙子士禍) 世祖2년 1456년.
성삼문, 성승부자(成三問,成勝父子)와 유응부(兪應孚)의 중국 사신의 만찬 석상에서 세조 뒤 에서 운검(雲劒)하기로 한 기회를 노려 세조를 없애고 단종을 복위시키려한 거사. 실패하여 사육신 생육신(生六臣 死六臣)이 생길정도의 많은 충신이 희생됨. 김질 고변(金礩告變).
    3) 무오사화(戊午士禍) 燕山 4년 1498년.
영남 유학파와 서울에 기반을 둔 원로와의 대립 감정으로 일러난 사화, 유자광(柳子光)과 김종직(佔畢齊 金宗直)의 대립, 이극돈(李克墩)과 김일손(金馹孫)과의 감정싸움이 번져, 기고만장하고 굳은 선비정신의 영남 유학파의 새 싸움에서 敗退. 燕山君도 학자의 선비정신에는 혐오(嫌惡)하여  정치적으로 숙청됨.  김일손의 사초를 정치적 고려 없이 기록하여 김종직도 이로 인한여 부관참시(剖棺斬屍)됨.
    4)갑자재화(甲子再禍) 燕山 10년 1504년.
이 士禍를 사화(死禍)라고도 한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비참한 죽음을 윤씨의 어머님인 신씨가 간신 임사홍(任士洪)을 통하여 왕에게 알리여  廢妃에 간여한 모든 관료를 숙청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부관참시 하였다.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어세겸(魚世謙), 심회(沈澮),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등 심지여 사약(賜藥)을 가지고간 관리도 숙청됨.
    5) 병인삼화 (丙寅三禍) 연산 12년 中宗원년 1506년.
戊午, 甲子사화에 漏落(누락)된 신하.
    6) 기묘사화 (己卯士禍) 중종 14년 1519년.
중종반정에 공을 새운 훈구파(勳舊派)에 대한 견제새력(牽制勢力)으로 신진사류를 중용하고 있든 차에 이상정치를 주장 실현한다는 신진사류의 영수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반정에 훈공(勳功)이 없는데도 불고하여 훈공자로 있음을 색출하였는데 이에 대한 훈구파의 반발로 남곤(南袞), 심정(沈貞)등 훈구파 영수가 희빈(熙嬪)홍씨의 아버지 홍경주(洪景舟)와 내통하여 조광조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하여 왕이 되고 저  한다는 모함을 하여 신진사류를 일소시킴. 조광조(趙光祖), 김구(金絿), 김정(金淨), 신광한(申光漢)등 숙청됨.
    7) 신사무옥 (辛巳誣獄) 중종 16년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이다. 안당(安瑭)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사건. 남곤, 심정의 권력 난용으로 왕의 성총(聖聰)을 흐리게 한다하여 제거한 모의실패. 송사련(宋祀漣)이 고변.
고변자는 당상관이 되어 30년간 5부자와 함개 영화를 누렸다함.
    8) 을사사화 (乙巳士禍) 인종 원년 1545년.
중종 말년부터 대윤(大尹) 윤임(尹任)과 소윤 (小尹) 윤원형(尹元衡)의 갈등이 심하여 오든 차에 인종(仁宗)이 등극 8개월 만에 승하하여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이 됨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여 왕의 외숙인 소윤 윤원형의 정적숙청이 이루어진다.
  2흉(2凶). 윤원형(尹元衡) 이기 (李己).
  3간(3奸). 정순붕(鄭順鵬), 임백령(林百齡), 정언각(鄭彦慤).
  희생자.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윤임(尹任), 백인걸(白仁傑), 노수신(盧守愼,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등.
    9) 정미사화 (丁未士禍) 명종 2년 1547년.
12사화중 하나. 정엉각, 정순붕등이 문정왕후에게 터무니없는 고변으로 송인수(宋麟壽), 이약수(李若水), 봉림군(鳳林君), 임형수(林亨秀)을 사사시키고 이언적, 백인걸, 노수신을 유배시킨 사화이고, 우리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도 이 사화에 연류 됨.
    10) 계축사화 (癸丑士禍) 光海 5년 1613년.
광해 14년간 이이담(李爾膽), 정인홍(鄭仁弘), 박승종(朴承宗)등 대북의 만행 중 영창대군 살 해 와 국모를 폐비함.
  김제남(金悌男), 이홍로(李弘老), 유영경(柳永慶), 신흠(象村 申欽), 박동량(梧窓 朴東亮),     김상용(仙源 金尙容), 이정구(月沙 李廷龜), 이덕형(漢陰 李德馨), 이항복(白沙 李恒福),
  이원익(梧里 李元翼), 기자헌 (晩全 奇自獻)등 피화.
    11) 경신출척 (庚申黜陟) 肅宗 6년 1680년.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득세한 사건. 당시의 영상 허적(許積 派“濁南”)의 조부 잠(潛)의 시호(文貞公)을 받는 잔치 날 비가 내려 궁중의 유악(油握, 油幕)을 무단(無斷)사용한 것이 원인이 되여 말성이 나면서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이 린평대군(麟平大君)의 아들 삼형제(三兄弟) 삼복(三福, 福昌君, 福善君, 福平君)과 같이 교류하면서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남인이 물러나고 허적과 윤전(尹鐫)등 남인의 거두는 사사(賜死)됨.
    12) 기사황국 (己巳換局) 숙종 15년 1689년.
서인과 대치중인 남인이 정권을 잡는 개기가 됨.  장휘빈(張禧嬪, 당시 昭儀張氏)의 아들로 원자로 삼고저한 왕에게 시기상조 함을 주장한 서인은 왕의 노여움으로 몰락하고 남인이 대신 정권을 잡게 된다, 남인의 영수는 권대운(權大運).  서인으로 숙청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송시열(尤庵 宋時烈), 김수항(文谷 金壽恒), 김수흥(退憂堂 金壽興), 민정중(老峰 閔鼎重), 이단하(畏齋 李端夏), 김석주(息庵 金錫冑), 이상진(만암 李尙眞)등 숙청되고, 다음 삼인 박태보(定齋 朴泰輔), 오두인(陽谷 吳斗寅), 이세화(雙栢堂 李世華)은 처형되나 후일에 삼간신(三諫臣)으로 높이 평가 되고 충신의 기감으로 추앙 밭고 있다.
   13 신임사화 (辛壬士禍)  경종 1-2년 1721-22년.
경종 1년 1721년 신축(辛丑)과 2년인 임인(壬寅)에 걸친 왕세재(王世弟 후의 영조 英祖)대리 문제로 노론 4대신이 왕을 시역(弑逆)한다고 하여 노론이 숙청된다.  사사(賜死)당한 노론의4대신은 김창집(몽와 夢窩 金昌集), 이신명(疎齋 李頣命), 이건명(寒圃齋 李健命), 조태채(二憂堂 趙泰采)등이고 영조(英祖) 원년인 1725년에 4대신은 신원(伸寃)되여 소론이 정계에서  쫓겨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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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반남박씨 대종중 부도유사  의학박사 丁緖 님께서 보내주신글 입니다.
     항상 홈페이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시고 옳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는
     반남박씨 대종중 부도유사 의학박사 丁緖 님께 머리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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