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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 지키려했던 ‘변호사 박승빈’


훈민정음 지키려했던 ‘변호사 박승빈’

시정곤 2010년 09월 27일 월요일    

    
▲ 시정곤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과 교수
“동아일보에서 내 표기법을 그대로 써 주시오!” 박승빈이 7년 동안 맡아 온 보성전문학교를 1932년 인촌 김성수에게 넘겨주면서 한 말이다. 김성수가 동아일보의 사주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탁한 것이었다. 새로운 형태위주의 표기법(현재의 표기법)을 만들려는 주시경 학파의 주장과 전통을 지키려는 박승빈의 주장이 첨예하게 부딪혔던 당시, 이 말은 박승빈에게는 절박한 부탁이었다.

박승빈(朴勝彬)은 1880년 9월 29일 강원도 철원 묘장면 대마동에서 박경양(朴景陽)의 6남매 중 독자로 태어났다. 지금은 비무장지대여서 가 볼 수는 없지만 옛날 그곳이 반남 박씨 집성촌이었다. 그의 가문은 철원부사를 지낸 선조 때문에 철원이 제2고향이 된 셈이었다. 그의 부친은 3000석의 재력가였으므로 그는 매우 넉넉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개화의 물결이 도도히 흐르던 1898년, 19살의 박승빈도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온다. 27세가 되던 1907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박승빈은 법관으로 활동을 하지만, 이내 한일병합이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변호사 개업을 선언한다. 나라 잃은 설움에 가득 찬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변호사의 길을 택한 것이다.

박승빈은 변호사이자 애국계몽운동가였다. 사재를 털어 계명구락부를 지원하고 이곳에서 벌이는 다양한 계몽사업에 앞장섰다. 신문에 글을 쓰고 대중 강연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립과 자주독립을 외쳤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구습을 타파하고 의식과 생활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간편한 생활을 위해 흰옷을 입지 말고 색깔이 있는 옷을 입자는 운동도 펼쳤다. 그 즈음 박승빈은 부친상을 당하지만 상복이 흰옷이라는 이유로 상복을 입지 않아 문중에서 지탄을 받게 되었다. 박승빈이 신생활운동에 얼마나 몰두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박승빈이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의 제9대 교장에 취임한 것은 그의 나이 45세(1925년)때였다. 한창 나이에 변호사 일을 멈추고 재정난에 빠진 보성전문학교를 맡아 7년 동안 학교 재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박 교장의 뜨거운 정성은 학교 역사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라는 세인들의 평가처럼 교육 현장에서도 박승빈은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박승빈은 훈민정음을 사랑한 국어학자이기도 했다. 독립된 국가를 표방하고 있던 대한제국 시절, 우리말로 된 법전이 필요했다. 박승빈은 곧 우리말 법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착수했다. 그러나 이내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그것은 우리말 표기법의 문제였다. 표기법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 법전을 편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박승빈이 국어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다.

박승빈의 국어사랑은 해가 갈수록 더해 갔다. 사전편찬, 표기법 논쟁, 국어문법 저술 등 그는 총 5권 저서와 30여편의 논문을 남기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애정을 쏟았다. 박승빈은 1935년에 자신의 문법관을 집대성하여 <조선어학>이라는 책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주시경 제자들이 만든 조선어학회에 맞서 조선어학연구회를 만들어 조선어학회가 주장하는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저지하고자 했다. 주시경식의 한글맞춤법의 잘못을 지적하고 전통적 철자법으로 표기법을 통일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언어는 그 민족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관계를 가진 유전물이니 그 후손은 반드시 경건의 태도로써 이에 임함이 가함이라.” <조선어학> 서문에 쓴 말이다. 박승빈은 언어는 민족의 유산이며,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전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언어생활은 전통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박승빈이 왜 전통적인 세종대왕식 표기법을 고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박승빈은 1941년까지 기관지 <正音(정음)>을 계속 펴내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나 흐름을 되돌리지 못하고 해방을 앞둔 1943년 10월 30일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만다. 말년에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같은 친일단체에 참여했다는 과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변호사, 사회운동가, 교육자, 국어연구가로서 박승빈이 한평생 보여준 애국애족의 열정은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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