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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박종서 
Subject  
   정경부인 남양洪씨 할머니에 대한 고찰
야천(朴紹) 할아버지(1493~1534)의 부인, 남양洪씨 할머니(1494~1578)는 한성부윤 홍심(洪深)의 증손녀이며, 대사헌 홍흥(洪興)의 손녀이고, 사섬시정 홍사부(洪士俯)의 따님이시다. 어머니는 청주韓씨로 영중추부사를 지낸 서원부원군 한계미(韓繼美)의 손녀이고, 사복시부정 한절(韓岊)의 따님인데, 조모(한계미의 처)는 파평윤씨로 정희왕후(세조의 비)의 친언니이다. 洪씨 할머니의 아버지는 남양홍씨 당홍계열 익산군파 후손이고, 어머니는 청주한씨 문양공파 후손으로서, 洪씨 할머니의 성품은 명문거벌(名門巨閥)인 두 가문의 가풍을 이어받으신 것으로 생각된다.

사암 박순(朴淳)이 지은 야천 할아버지의 신도비명에는 ‘정숙한 덕이 있어 현모양처로서 본받을 만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며, 현석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야천 할아버지의 묘지명에는 ‘인자하고 정숙한 자질로 능히 군자(君子)의 배필이 되어 며느리와 어머니로서 모두 법도가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소고 박승임(朴承任)이 지은 洪씨 할머니의 묘갈명에는 ‘기도(氣度)가 온순(溫順)하고 성품(性稟)이 근검(勤儉)하였으며 집안에서 일을 처리할 적에는 전일(專一)하게 하고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았으며 선조의 제사를 받들 적에는 반드시 성경(誠敬)을 다하였다. 비록 질병 중에 있더라도 기일(忌日)을 만나면 세대(世代)의 원근(遠近)을 따지지 않고 모두 소식(素食:채식)을 하면서 재계(齋戒)를 다하였고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손들을 인도할 적에는 엄격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범하기 어려운 위엄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야천 할아버지는 8살에 아버지 조년(兆年)을 여의고, 어머니 파평윤씨 슬하에서 자랐다. 대대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연산군 9년에 민가가 많이 철거되어(연산군이 사냥/사치(흥청망청)/음행(淫行:신하의 처를 겁탈)을 일삼는 등 폭정을 하면서 보안유지를 위해, 궁궐 주변에 금표를 설치하고, 경기도 고양 일대를 사냥터로 만들어 민가를 철거했음) 정착할 곳이 없어서 어머니께서 아들들(紹,綰,緝)을 데리고 친정인 합천군 야로현으로 남하하였다. 야천 할아버지의 외조부는 단성현감을 지낸 윤자선(尹孜善)으로 합천군 야로현은 파평윤씨 대언공파 가문의 세거지이다. 야천 할아버지는 8년 여간 가야산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고, 18살 되던 해인 중종5년(1510)에 洪씨 할머니와 결혼하셨다.

중종13년(1518) 향시에 응시하여 향공(響貢) 3과에 모두 장원을 차지하고, 이듬해인 중종14년(151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중종15년(1520) 어머니 파평윤씨를 여의고, 영남에서 상여를 모시고 김포 선영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중종17년(1522)에 탈상을 하고, 홍문관부수찬으로 시작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중종25년(1530)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이때에 김안로 등의 훈구파를 탄핵하려다가 일이 착수되기 전에 사간원 정언 채무택의 밀고로 김안로 일당에게 반격을 당하여 성균관 사성으로 좌천되었다가 그해 12월에 파직되었다.

야천 할아버지는 관직에서 물러나 남양촌사(南陽村舍-서울역 근처 라는 설과 화성시 남양읍 남양홍씨 세거지라는 설)에 물러가 계시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그 가까운데 있는 것을 꺼리므로,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외가댁이 있는 경상남도 합천(陜川)으로 옮기셨다. 합천으로 내려가신 지 4년 만인 1534년 8월에 돌아가셨는데, 5남2녀 중 딸 둘과 큰아들은 결혼하였고, 나머지는 어려서 울음소리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당시에 첫째 응천(應川)이 18살, 둘째 응순(應順-3살부터 고모부 군수 朴秀榮이 양육)이 8살, 셋째 응남(應南)이 7살, 넷째 응복(應福)이 4살, 막내 응인(應寅)이 2살 이었다.

야천 할아버지 묘소와 관련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가 있어서 소개한다.
[야천선생이 살아계실 때에 경북 성주(星州)에 사는 생원 진조당(眞操堂) 이광(李光, 1485-1551)과 절친한 사이였다.
야천선생이 병환으로 임종을 짐작하고 홍씨부인에게 말하기를 “성주(星州) 이(李)생원 댁에 사람을 보내 나의 임종을 알리고 묘탑을 잡도록 부탁하라.”고 하였다. 홍씨부인은 즉시 노비를 보내 이 사실을 전하였다.
소식을 접한 이생원은 미투리 신에 대지팡이를 짚고, 20리 밖에서 산꼭대기를 넘어 즉시 야천선생 댁에 도착하니, 야천선생은 이미 운명하셨고, 홍씨부인이 나와서 반갑게 영접하였다.
이생원은 야천선생 댁 뒷산에 이르자 큰 소리로 “야천 선생!” 이름을 부르며, “장사 지낼 만한 곳을 얻었노라. 야천선생이 어질면서도 장수 못한 것을 슬퍼하여 자손을 위하여 좋은 땅을 구득하려고 하였더니 이제 과연 구득하였다.” 하고 묘탑을 잡아놓고 이내 내려와 통곡하였다.
이생원은 홍씨부인과 상의하여 장사는 유월장(6개월후 장사하는 유교 장의법)으로 정일하고, 말하기를 “이 묘탑은 후손 중 고관대작이 나오고 관료가 이어진다.”고 예언하였다.
야천선생 댁은 가난하여 외가의 도움으로 가사를 유지해 오고 있는 형편이었다. 유월 장례기간 중 파평윤가(家)에 초상이 났는데, 윤씨네가 이생원이 잡아 놓은 야천선생의 묘탑을 양보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홍씨부인의 응답이 없자 “너희들은 이생원에게 다시 부탁하면 되겠지만, 나는 부탁도 못하니 양보하라.”고 더욱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홍씨부인이 이 사실을 이생원에게 전하니, “딱한 사정은 이해하나, 그런 묘탑은 다시 구할 수 없다.”고 하며, 묘책을 홍씨부인에게 알려 주었다.
그 묘책은  「윤씨家에 그 묘탑을 일단 양보해 주고 장일 전야에 산 아래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이어다, 파 놓은 묘탑 관구자리에  갖다 붓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윤씨네가 와서 묘탑에 물이 고여 있는 광경을 보고, 필경 행상을 다른 산으로 옮겨 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홍씨부인은 노비녀들에게 이생원이 말한 묘책대로 지시하여, 묘탑에 물을 길어다 부었다. 그 후 윤씨家에서는 장사준비를 마치고, 장사 당일 행상을 차려 산에 도착하여 파놓은 묘탑 관구자리를 보니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윤씨네는 “이생원도 별 수 없구먼.ㅉㅉ”하며 행상을 돌렸다고 한다. 그 후 홍씨부인은 유월장기를 끝내고 남편인 야천선생의 분묘를 그 자리에 썼다.
야천선생이 작고한 후 가세가 약해지니 노비 수를 줄이면서 나이 많은 늙은 노비녀를 내보냈는데, 그 중 전날 묘탑에 물을 이어다 부었던 노비녀가 윤씨 家에 찾아가서 종전의 이생원의 묘책 사실을 토로하니 윤씨家에서 대노하였다. 외면하고 도움도 안주고 행패가 점점 심해져서 그곳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 洪씨 할머니께서는 3년 상을 치르시고, 야천 할아버지의 묘 자리를 잡아주셨던 생원 진조당(眞操堂) 이광(李光, 1485-1551) 선생께서 성균관에 올라가실 때에 소달구지를 타고 자제분들과 함께 상경하여, 친정인 한양 도저동(桃猪洞-남대문로5가와 용산구 동자동 사이에 있던 마을)으로 이사하셨다.

洪씨 할머니는 친정아버지 홍사부의 도움을 받아, 사문(斯文) 유조순(柳祖詢 주1)을 초빙하여 자식들을 가르쳤고(막내아들 응인(應寅)은 유조순의 동생 유조인(柳祖認 주2)에게 배움), 그 후에는 소선(笑仙) 성제원(成悌元 주3),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 주4) 등 훌륭한 스승을 구하여 교육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서봉(西峯) 유우(柳藕 주5)의 문인이다. 사서오경 중 하나인 예기(禮記)의 학기(學記) 편에 ‘옥불탁불성기(玉不琢不成器) 인불학부지도(人不學不知道)’라 했으니, 洪씨 할머니께서는 누구보다도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알고 계셨던 것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교육을 위해 세 번을 이사하였다는데, 洪씨 할머니는 단계별로 세 명의 스승을 구하여 자식들을 가르쳤으니, 사람들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 비유하였다.

야천 할아버지의 자손들을 5응17동이라고 하는데, 할아버지께서는 합천에서 큰아들 응천(應川)을 가르치고 일찍 돌아가셨으나, 옛말에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아들을 낳으면 한양으로 보내라’는 말이 있듯이, 洪씨 할머니께서는 지방에 머물지 아니하시고, 40세에 과부가 되셨지만 자식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이주하시어, 자식들 교육에 열성(熱誠)을 쏟으셔서 아들 5명 중 문과 급제2명, 사마시 합격3명으로 각각 사재감정, 영돈령부사, 대사헌, 병조참판, 돈령부도정 벼슬을 지냈고, 손자 17명 중에는 문과 급제6명, 사마시 합격6명으로 각각 이조정랑, 건원릉참봉, 승문원부정자, 의빈부도사, 예빈시참봉, 의정부좌참찬, 사복시정, 온양군수, 토산현감, 세자익위사부솔, 형조참의, 길주목사, 형조판서, 절충호군 등의 벼슬을 지냈다.

선조2년(1569) 둘째아들 응순(應順)의 딸이 선조(宣祖)의 왕비 의인왕후(疑仁王后)로 책봉되어, 둘째아들이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에 봉해지고, 그 귀(貴)로 인하여 야천 할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되셨고, 洪씨 할머니는 정경부인에 제수되셨으며, 날마다 전성열정(專城列鼎-한 고을의 수령이 되어 진수성찬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말함)의 봉양을 받으시고, 선조11년(1578) 11월에 향년85세로 돌아가셨다.

양주 금촌리(金村里-지금의 남양주시 일패동) 자좌오향(子座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자식들이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는데, 시묘살이의 후유증으로 둘째아들 응순이 병을 얻어 선조13년(1580) 11월에 향년 55세로 졸하여 洪부인묘 뒤편 동쪽능선 신좌자향(辛座子向)에 장사지냈고, 큰아들 응천은 선조14년(1581) 9월에 향년 66세로 졸하여 洪부인묘 아래 자좌오향(子座午向)에 장사지냈으나, 고종37년(1900) 11월 홍릉(명성왕후의 묘-청량리에 있었으나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의 봉표로 ‘해자구역 안의 모든 묘지를 이장하라’는 어명으로 洪씨 할머니의 묘는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야천 할아버지 묘에 합장하였고, 첫째아들 응천의 묘는 그 아래로 이장하였으며, 둘째아들 반성부원군의 묘는 어딘가로 이장했다가 1914년 제자리로 되돌렸는데, 1912년경 반성부원군파 사손 승덕(勝德)이 종산을 이-민승(李-敏承:을사오적 이근택의 아버지)에게 매각하여, 남의 땅에 들어가 있던 반성부원군 묘를 1969년경 원래위치의 능선 너머인 현재 위치로 이장하였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洪씨 할머니의 지극한 교육열과 친정아버지 홍사부(洪士俯)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5응17동 이란 말이 생겨났을까?
조선 중기 이후에 반남박씨 가문이 현달한 가문으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이런 점에서 우리 후손들은 남양洪씨 할머니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교육으로 자식들의 앞날을 열어 주신 것을 본받아 조상님의 은덕을 생각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가열차게 정진(精進)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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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유조순(柳祖詢:생몰년 미상) : 본관은 진주(晉州). 자 순지(詢之), 호 사문(斯文)이며, 유우(柳藕)의 아들이고, 유조인(柳祖認)의 형으로 의정부사인 유자빈의 손자인데, 유자한(柳自漢), 유자빈(柳自濱), 유자분(柳自汾) 삼형제가 모두 문과 급제자이다. 사섬시정 홍사부 댁에 유숙하며, 홍사부의 외손들을 가르쳤다. 명종13년(1558) 별시문과에 병과1위로 급제하고, 현령 벼슬을 지냈다.

주2) 유조인(柳祖認:1522~1599) : 본관은 진주(晉州). 자 인지(認之), 호 범애(泛愛), 아버지는 유우(柳藕)이며,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다. 학문에 근면하고 행의(行儀)가 단정하여 동학들의 존경을 받았다. 1583년(선조16)에 충효와 절의로 천거되어 우봉(牛峰)·이천(伊川) 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위로 제수되어 세자를 모시고 영변까지 갔다. 이듬해 사재감정(司宰監正)을 거쳐 통정대부에 승직되고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임명되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주3) 성제원(成悌元:1506~1559) : 본관은 창녕(昌寧). 자 자경(子敬), 호 동주(東洲)·소선(笑仙)이며,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부사 몽선(夢宣)의 아들로서 유우(柳藕)의 문인이다. 잦은 사화(士禍)로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였다. 이희안(李希顔)·성운(成運)·조식(曺植)·신계성(申季誠)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쌓고 후학을 가르쳤다. 성리학 외에도 지리·의학·복술(卜術)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동주유고》가 있다.

주4) 이중호(李仲虎:1512~1599) : 본관은 전주(全州). 자 풍후(風后), 호 이소재(履素齋)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정의대부 이정(李精)으로서, 유우(柳藕)의 문인이다.
제자들에게 『소학』·『근사록』 등을 우선으로 가르쳤고, 문장에도 뛰어나, 김안국(金安國)으로부터 귀신이 아니면 이런 문장을 지을 수 없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심성도설(心性圖說)」·「심성정도(心性情圖)」·「성리명감(性理明鑑)」·「자경시문(自警詩文)」 등과 『이소재집』 20여권을 남겼다.

주5) 유우(柳藕:1473~1537) : 본관은 진주(晉州). 자 양청(養淸). 호 서봉(西峰). 사문 유조순, 범애 유조인의 아버지이다. 김굉필(金宏弼)에게 사사하여 열심히 학문을 닦았으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스승 김굉필이 극형을 받은 뒤, 모친이 병석에 눕게 되자 의술을 연구하여 손수 약을 지어 공양하였다. 서화(書畵)는 물론 천문 ·음률 ·복서(卜筮) ·의술에 뛰어났고 특히 주역에 통달하여 이름이 났으며,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오직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참고문헌 : 사마방목, 문과방목,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강공 야천 신도비명, 문강공 야천 묘지명, 정경부인 남양洪씨 묘갈명
      반성부원군 묘지명, 남일공 묘표, 졸헌공 신도비명, 오창공 기재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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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계 박세당 사랑채 [1]

박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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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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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남박씨 남곽공파 몇대손인지 궁금합니다.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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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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