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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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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전후 연천의 중등교육과 박승철


해방전후 연천의 중등교육과 박승철
연천근대사 탐구여행

   194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에 『38 이북 소식: 자주독립은 교육에, 연천서 중학교 신설』이라는 기사가 다음과 같이 났다. “38 이북에서도 교육열은 점점 높아가 고등 교육시설이 없어서는 아니 되겠다고 경기도 연천군내 유지들은 연천중학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유지 박승철씨가 기성위원장이 되어 각 방면으로 활동 중인데 서울 최남씨는 이 뜻에 찬동하여 연천에 있는 부동산 시가 백만여 원을 기부하여 왔음으로 오는 4월에 임시 교사로 연천에 있는 일본인 소학교를 이용하여 개교키로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박승철은 통현리 새말에 살던 독일 베를린대학 출신의 인물로 해방되자마자 주민들에 의해 연천군 자치위원장(현재의 군수에 해당)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연천에 있던 일본인 소학교 자리는 현재 에스엠마트가 있는 자리이며 이 때 세워진 학교는 3년제 농업학교였다. 현재 연천읍 상리에 거주하는 홍기수(71세) 옹이 이 학교를 1950년 7월에 졸업했다고 한다.

   박승철은 대지주이면서도 일제 말기 통현리 주민의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농장을 개척하고 기와공장을 세워 일자리를 제공했기에 인심을 잃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다른 대지주들과 달리 해방 직후 재산이 몰수되지 않았고 오히려 자치위원장(후에 인민위원장)까지 될 수 있었다. 어쨌든 연천 교육사상 최초의 3년제 중학교는 박승철이 기성위원장이 되어 1946년 4월에 개교한 이 농업학교이다.

   일제 강점기하 연천농업실수학교는 1년제 단기 실업교육기관이었던 반면 해방 후 우리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이 농업학교는 정규 중학교로서 1950년 전쟁 때까지 존속했다. 당시는 인민공화국 치하였기 때문에 훗날 어느 누구도 공식적으로 이 학교의 존재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에 의해 수복된 연천 지역에서 1956년에 세워진 연천중학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박승철을 조명하는 글을 써왔는데 여기서는 교육자로서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본다. 그는 조선말기 초대 주미공사와 대한제국 총리대신을 지낸 박정양의 아들로 일찍이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나왔다.
   1920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하는 길에 동아일보의 후원을 받아 부산부터 서울까지 전국 순회 계몽강연을 김준연(해방 후 법무장관) 등과 함께 벌였다. 1922년 김준연과 함께 독일 베를린대학으로 다시 유학한 그는 1925년에 귀국하여 중앙, 보성, 배재 학교 등에서 서양사를 강의했다.

  1926년에는 안재홍 등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운동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국에서 일제에 전면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는 실력양성론적 민족운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32년 서울에서의 모든 사회 활동을 접고 연천읍 통현리 새말로 이사하여 초야에 묻히게 되었다.

   오랜 해외 유학에서 얻은 지식은 묻어둔 채 연천의 시골 생활에 적응하던 그에게 마을 주민들은 통현리 일대에 논을 풀자고 제의했다. 주민의 청을 받아들여 농장을 만들고 현재의 고인돌 공원 아래쪽에 기와공장을 만들어 바쁘게 지냈다. 1938년 5월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그는 요시찰 대상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아 두문불출하는 편이었다. 다만 절친한 친구 김준연(해방 후 법무장관)이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어 은대리 해동농장 관리인으로 내려와 있었기에 자주 만나 위안을 삼으며 해방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김준연은 해방 일주일 전에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서울로 올라갔지만 박승철은 16일에야 서울에 올라가 사정을 살펴본 후 연천에 돌아와 눌러 앉았다. 그가 1947년 3월 월남하기까지 연천군 자치위원장으로 연천중학 기성위원장으로 활동한 사실 외에 더 자세한 사항은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한편 그는 월남하자마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문교부 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재능을 인정해서 사회부 장관으로 농림부 장관으로 계속 입각을 권유했다고 한다. 마냥 거절하던 그가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이 남선전기(지금의 한전) 사장이었는데, 전쟁이 터졌고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머물러 있다 납북되고 말았다. 전쟁 직후 평양 근교 변전소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후 생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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