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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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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쓰기세보와 세로쓰기세보

몇 년 전에 대종중에서 세보(족보)를 만든다는 공고를 보았습니다. 반남박씨라는 씨족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문헌이라 매우 반가웠습니다. 특히 반남박씨 세보 편찬사상 처음으로 한글가로쓰기 형식으로 세보를 제작하기로 결정ㆍ공고하였는데 매우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제작상의 어려움 때문인지 대종중에서는 며칠 전 전통적인 방식의 세로쓰기로 환원했다고 공지하였습니다.

세보는, 첫째, 내용이 정확해야 하고, 둘째, 알아보기 쉬워야 하고, 셋째, 부피와 무게가 적어야 합니다. 첫째 조건인 <내용의 정확성>은 기본 중의 기본이니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둘째 조건과 셋째 조건은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족보(세보)는 한문 세로쓰기로 제작하였습니다. 이번에 새로 만드는 족보는 그러한 관행에서 벗어나 한글 가로쓰기로 제작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한글 가로쓰기로 세보를 만들겠다는 의도는 대단히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글 가로쓰기 세보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예비 지식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잘 알다시피 한자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한문을 쓰면 긴 이야기를 압축하여 표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면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한글로 풀어쓰게 되면 당연히 지면이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한문은 알아보기 힘들지만, 한글은 아무래도 읽기 편합니다. 다시 말해서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세보의 형식상의 차이는 어떻습니까? 우선 전통적인 세로쓰기 방식은 공백이 많이 나옵니다. 세보를 꺼내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페이지는 거의 3분의 2 정도가 공백으로 비어 있습니다. 심각한 낭비입니다. 이렇게 되니 족보가 자꾸 두꺼워져 부피가 늘어나게 되고 무거워집니다. 운반하기도 힘들고 보관하기도 불편합니다. 당연히 경비도 늘어납니다.

그렇다면 가로쓰기 방식은 어떨까요? 현재 언필칭 가로쓰기라고 하는 족보들이 더러 나와 있기는 하지만 대표적으로 언급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즉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족보 편찬을 맡으신 분들이나 출판사 측에서도 아무런 개념이나 지식 등, 준비가 거의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까요? 그것은 바로 한글 가로쓰기 세보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글 가로쓰기 세보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머리 속으로는 전통적인 한문 세로쓰기 방식의 세보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데 그것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은,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한글로 쓴 국문(國文)을 사용하고, 자손 계보도와 방주(傍註)를 분리하여 방주는 인명사전 형식으로 편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계보를 한 눈에 살필 수 있고, 찾아보기도 쉬울 것이며, 부피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백과사전 크기로 3단으로 편집하면 어림잡아 3천-4천쪽 정도면 되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우리나라 족보 편찬ㆍ출판사(史)의 신기원을 이룩하는 획기적인 업적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러나 대종중에서는 결국 가로쓰기 세보를 포기하고 세로쓰기 세보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가장 큰 걱정은 뒤죽박죽 족보가 나오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한글을 사용한다고 하면서 세로쓰기 방식을 택해 얻는 것도 없이 책의 부피와 무게만 잔뜩 늘려 놓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굳이 세로쓰기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면 경신보와 마찬가지로 한문을 쓰는 것이 옳습니다. 어설프게 한글을 사용하여 원문의 일부를 빠뜨리거나, 의미를 훼손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원문보다 더 알아보기 힘든 이상한 문장이 나오게 된다면 차라리 원래의 한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내용 왜곡 방지를 위해서 더 나을 것입니다.

한글을 사용하는 가로쓰기 세보는 현대적인 도서 편찬 방식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세로쓰기를 해야 한다면, 차라리 원래대로(경신보처럼) 한문을 그대로 사용하고 인명에만 한글로 독음을 달아주는 방식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