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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박태서 
Subject  
   潘朴人들이 중심이 된 국채보상 운동


國債報償趣旨文
                    (국채보상취지문)
國可以無民乎아 民吾知其爲國本也니라 民可以無國乎아 國吾知其爲民仰也니라
然則國無民이면 國不可以爲國이요 民無國이면 民不可以爲民이라 故民失有秋하여 稱貸以益則 爲國者必爲之減租發품廩하여 以救凍餒하거든 況民之於國에 譬猶手足之垾頭目하고 子弟之衛父兄하며 踏刃赴湯도 有所不辭하나니 況병力出義하여 措國家於安寧者乎아.

나라에 백성이 없으면 되겠는가 ?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성은 나라가 없으면 되겠는가? 나라는 백성이 의지하는 바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라에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될 수 없고 백성이, 나라가 없으면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흉년을 만나 세금 내기가 힘들면 나라를 거느리는 자가 반드시 조세를 감면해 주고 창고를 풀어서 추위와 굶주림을 구제하는 것이다. 더구나 백성들은 나라를 위해서 손과 발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고 아들이나 아우가 아버지와 형을 모시듯이 위험을 무릅쓰고 칼날을 밟고 끓는 물에 담그는 일도 사양하지 않으면 힘과 의리를 다해서 나라를 편안케 해야 하는 것이 안인가

今者國債가 至於壹千三百萬圜之多하니 是出不得已而 債務旣重하여 無力以報하여 受侮强隣이 亦旣不少하니 玆豈非一般國民의 所共憤恥者乎아 河幸廣文社長徐相敦諸氏가 自嶠南으로 創起國債報償會하여 一人倡聲에 萬口合辭하여 達于畿甸하며 雖田更野叟市井皀隸라도 或捐勞動之金하고 或賣所藏之寶하며 穉幼罄出囊錢하고 婦孺典賣衣釵하여 一心鼓動하여 來聚竝合하니

지금 우리 국채가 일천삼백만 환에 이르렀으니 이는 마지못함에서 나온 것이지만 채무가 이미 너무 많아서 갚을 힘이 없으므로 부강한 이웃나라에게 수모를 당함이 적지 않으니 이 일이 어찌 일반 국민들이 분개하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겠는가? 다행히 광문사장 서상돈 제씨가 영남에서부터 국채보상회를 창립하여 한 사람이 소리치자 만인이 합심해서 며칠 사이에 경기도 까지 전파되었으니 비록 시골관리와 초야의 노인과 시정의 종들에 이르기까지 혹은 노동한 품삯을 내놓기도 하고 혹은 간직해 두었던 보화도 팔매 어린이들이 주머니 돈을 털어놓고 부녀자는 의상과 패물을 전당 잡히어 하나같은 마음으로 고동시켜 모으고 합하자

皇上이 降嘉獎之詔하고 朝著無依違之心하니 此曷故也오 誠以秉尋之天이 애 然隨感하여 不以賢愚貴賤而有間也로다 部何白里近邑이 寂寞無聞하여 滔滔一夢이 尙在長夜하니 豈畿嶺之多賢而湖西之獨無人也아 噫라  斯民也는 亦五百年休養赤子라 爲國圖忠이 庸詎多讓於也省이리오 有未之思언정 思無不爲하고 有未之倡이언정 倡無不動하여 損己小有하여 爲國大用者를 其肯拒而辭乎아 鄙等不偳잠僭忘하고 茲以 布告于道內士民하노니  願父老는 上而勉下고 老而勵幼하여 各出義今하여 其物以多少爲拘하라.

황제께서는 가상하게 여겨 권장하는 조서를 내리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참으로 타고난 본성이 느낌에 따라 왕성해서 어질고 어리석음과 귀하고 천함으로 인해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해서 백리 가까운 고을에서는 조용하고 적막해서 아무 소식도 없이 캄캄한 밤 꿈속 같으니 어찌해서 경기도와 영남은 어진선비가 많은데 호서에는 홀로 사람이 없단 말인가? 아! 이 백성들은 오백 년 동안 잘 보호해 온 백성들이니 나라를 위해 충성을 도모함이 어찌 다른 고을보다 못하리오. 생각을 하진 못했을지언정 주창만 한다면 움직이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다.
자기의 조그마한 소유를 덜어내어 나라의 큰일에 쓰는 것을 그 누가 거절하고 사양하고 피하겠는가? 우리들은 참람되고 망녕됨을 헤아려 보지 않고 이렇게 온도내의 선비와 백성들에 포고하니 원하건대 애비와 노인들은 위에서 먼저 해서 아래를 권고하고 독려하고 늙은이는 어린이들을 격려해서 각각 의연금을 출자하되 많고 적음을 가지고 구애 받지 말게 하라 하였다.

嗚呼라 穀服絲身之類는 孰非王臣而識理士人이 疇不以此擧爲晩이리오 惟恐小民이 或有怨避者이라 如此者는 以義辭動之而又不從則豈必威劫而力行之哉아  然禮儀吾民이 豈容若是리오 此若不報則 非但不保其國이라 亦不保其家요 非但不保其家라 將不保其世世子孫이리니 吾背之所喪失이 豈若干錢額而止哉아 惟願諸君子期報此債하여 自立於泰平他日이 是某區區之望이라

오호라 곡식을 먹고 옷을 입은 무리는 누구인들 임금의 신하가 아니며 도리를 아는 선비와 백성들은 누구인들 이일이 늦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오직 두려운 것은 백성들이 더러는 원망하고 회피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의리의
말로 감동시켜야 하며 그래도 따르지 않는 이는 어찌 꼭 위력으로 겁을 주어야 하는가 예의를 아는 우리 백성이 어찌 끝내 그러하겠는가?
이 국채를 만약 갚지 못하면 나라만 보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가문도 보존되질 못할 뿐만 아니고 세세자손도 장차 보존할 수 없으니 우리의 잃는 바가 약간의 금전에만 그치겠는가 오직 원하건대 여러분들은 기필코 이 국채를 갚아내고 태평한 세월에 자립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간절한 바람이다.

但斷烟報債云者는 隨其志願之如何而今夫通國吸煙이 未知果有益於衛生乎아 有益於經濟乎아 且如埃及 呂宋等煙之價 昻者는 一年靡不下數百萬圜하니 此而不斷하면 非但國債之難報라 民産將蕩析乃已리니 勉哉로다 同胞는 保彊保族이 不在斯擧乎아 書到諸洞커든 勿留時刻하고 謄書飛傳하라

다만 담배를 끓어서 국채를 갚고자 하는 것은 그 지원에 따르겠지만 지금은 온 나라에 흡연이 과연 위생에 유익한가 경제에 유익한가 또한 애급의 여송 등 담배의 값이 올라서 일년에 소비가 수백만 환에 이르니 이러한데도 끊지 않으면 국채를 갚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국민의 산업이 장차 탕진되고 퇴폐하고 말 것이다. 힘내시라 동포들이여! 강토를 보유하고 민족을 보존함이 이 빚 갚는 일에 있지 않겠는가 이 글이 이르는 대로 모든 고을 백성들은 시각을 늦추지 말고 베끼어 전파하시라.

光武十一年 丁未 二月 日(서기1907년)
忠淸南道 鎭岑郡 下南面 美林 (현 대전광역시 서구 미림동)
發起人   朴始陽  朴齊鳳 吳甡根 朴禹緖 朴駿陽

一  국채 일천삼백오십만환을 일본에 보상함
一  보상방법은 의금으로 모금하되 다소를 불구함
一  위치를 임시사무소로 미림리로 정함
一  각군 각면에 동정상응하는 경우에는 해군해면 신용이 유한 자산가에게 납부하되 영증를 요거함
一  신용이 우편국에 납입하되 영증을 요거함도 가함
一  매월종에 각수금소에서 출의 인원의 씨명과 금액을 한성수금소로 교부록 송하야 신문에 공포케함
一  본회는 각군에 대하야 馳函警告하는 의무만 담임하고 수합전재는 불필불간험
一  본회와 목적을 같이하는 각 단체는 서로 연합해서 목적을 세우기로 기약하되 삼개월로 한정함.




참고사항    
국채보상운동이란
  1907년(융희1년) 경향의 관리와 민중들이 모영서 일본에 대한 국채를 갚을려고 조직한 단체.  당시 일본에 대한 국채는 일천삼백오십만환으로 국가의 재정으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었다. 국가는 국가대로 일본 자본에 예속 되었으며 민간은 민간대로 일본에 예속 되었음으로  이 약점을 이용하여 대한제국의 정권을 농락하자  이 상태로는 도조히 자주적인 갱ㅇㅇ생이란 생각 할 수 없다는 민중속에서 일어난 운동. 이운동의 선구는 대구에 살던 서상돈과 김광제등으로 일본에 대한 정부의 빚을 갚자는 주장을 내세워많은 사람의 공명을 얻게 되고 이에 호응해서 국채보상금연기성회가 조직되여 황성신문사  대한매일신보사 보성사를 본부로 하여 각지에서 모금운동을 별였는데, 백서들의 호응을 받아 부녀자들은 금은 장식품을,  시골 농민들은 땔 나무까지 판돈을 내놓았다.  이 운동은 매우 성공적이였으나 일제에 합세한 송병준등이 주도한 일진회의 방해 공작으로 중진되고 말았다.


휘 우서께서는 자는 백규 호는 사은 이시고 임오년 (1882)10월9일 생하시고  경자년(1960) 2월 12일 서거 해시였으며 대제학 정만조 문하생으로 수학 약관 에 석학이 대시였다. 정미년(1907)에 약관 26세 나이로 대덕 진장ㅁ 미림에서 국체보상운동을 주도하시고 협창학교를 설립 후학양성에 힘쓰시고  그 후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 조달 혐의로 8개월간 옥고도 치르시고 학교는 페교되었다.  그 후 다시 고명을 길헌의숙이라 개칭 해방시까지 운영 후학을 양성하신 분이다.




           用雨(西浦公 后 ) 제공

※국채보상운동이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이미 외교권을 빼앗긴 지 이년 후인 정미(1907융희1년) 경향의 민중들이 일본에 진 나랏빚 일천삼백오십만 환을 국가재정으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므로 나라가 일본자본에 예속되는 것을 벗어나고자 일으킨 민중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선구는 대구에 살던 서상돈과 김광제 등으로 국채보상 금연 기성회가 조직되어 황성신문사, 대한매일신보사, 보성사를 본부로 하여 각지에서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많은 호응을 받아 부녀자들은 금은 장식품을, 시골 농민들은 땔나무 판돈까지 내놓았다. 이 운동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송병준의 일진회 방해공작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그때 호서지방에서 반남문중 여러분이 주동되어 이 운동에 참여하셨으니 이 어찌 우리
후손이 자랑스럽고 또한 마음속 깊이 새기지 않으리오 (이글은 원문을 다행히 누군가 보관해오다가 홍우에게 전달 보관중이며 독립기념관에 이양 보관코저 생각중이다.)
諱 禹緖께서는 字는 백규 號는 四隱이시고 壬午年 10월 9일 생하시고 경자년 2월 12일 서거하시었다. 대제학 정만조 문하생으로 수학 약관에 석학이 되시었다. 정미년에 약관 26세로 대덕 진잠 미림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시고 협창학교를 설립 후학양성에 힘쓰시고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 조달 혐의로 8개월간 옥고도 치르시고 학교는 폐교되었다. 그 후 다시 교명을 길헌의숙이라 개칭 해방 시까지 운영, 후학을 양성하신 분이다.
(본문의 복사본은 대종중에서 열람할 수 있습니다. 다른 세분의 출신과 행적을 아시는 분은 대종중 문화재발굴위원회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潘朴人들이  중심이 된 국채보상 운동
   󰡒강토를 보유하고 민족을 보존함이 이 빚 갚는 일에 있지 않겠는가?󰡓
                                          
                                        用雨(西浦公 后 ) 제공

근래 을사5적과 정미7적 등 친일인사의 명단 발표와 이들의 토지 국가 환수  문제가 운위되고 있다. 정미년 당시 이 운동의 발상지였던 大邱에서는 100주년이 되는 해(2007년)를 맞아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등 거국적인 행사를 이끌어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바 우리 선조들이 湖西지방에서 펼쳤던 국채보상운동의 문헌을 찾아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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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4 119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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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8 119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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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潘南人의 精神교육 강사초청 [2]

박원우
2006/05/24 119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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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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