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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반남의 여인

  인성왕후 - 인종 의인왕후 - 선조가순궁 - 정조가순궁동가의절부원군, 돈영부
 
 


◎ 가순궁 (嘉順宮)

반남박씨 20세손으로 1770년(영조46)에 태어나셔서 1822년(순조22)에 돌아 가셨고 조선 22대 정조의 빈(嬪)으로, 원호(園號)는 휘경(徽慶)이고, 시호는 현목(顯穆)으로 현목수빈(顯穆綏嬪)이라 하였고 조선23대 순조의 생모(生母)이시다.
판돈령부사(判敦敦府事) 준원(準源)의 딸로써 1787년(정조11)에 수빈(綏嬪)이 되어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고 참봉공 東民의 8世孫이다. 예절이 바르고 착한 행실이 많아 그 현숙(賢淑)함을 칭찬 받았다.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그가 잉태될 때 어머니 원씨부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큰 구슬을 바치매 그 광채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한다.어릴 때 두 여형(女兄)과 함께 있었더니 별안간 큰 호랑이 한마리가 뜰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두 여형은 놀라서 넘어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으나, 그는 조용히 걸어가서 방안으로 들어가니 모두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1787년(정조 11)에 정조의 빈이 되어 순조와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왕자를 낳은 뒤 왕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를 위로하고 공경하니 온 궁중에 화기(和氣)가 가득하였다.또한 행실이 착하고 예절이 바를 뿐만 아니라 평소에 말이 적으며 의복과 일상용품들을 극히 검소하게 하니 조야에서 현빈(賢嬪)이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어느날 그의 궁에서 시중을 드는 나인(內人)이 의복을 만들 때 작은 천조각을 버렸다가 크게 꾸중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 또한 후궁인 그의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자,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에게 은밀히 귀중품을 진상하였다가 의금부에 잡혀간 일도 있었다.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죽었다.궁호(宮號)는 가순(嘉順), 시호는 현목(顯穆), 원호(園號:무덤의 명칭)는 휘경(徽慶)이며, 효자동 경우궁(景祐宮:七宮內)에 제향되었다, 1823년(순조23)에 경기도 양주 배봉산(拜峰山) 묘좌원(卯坐原)에 장례 하였다.

정조는 (1752년∼1800년). 재위는 1777년∼1800년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으로,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비(妃)로 맞았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조세(早世)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後嗣) 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마음을 기울이며 학문의 연마에 힘썼다. 그리하여 즉위하자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였다.

순조는 (1790(정조 14)∼1834(순조 34). 재위는 1800년∼1834년 이름은 공, 자는 공보(公寶)이고 호는
순재(純齋)이다.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昌慶宮集福軒)에서 정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1800년(정조 24)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이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니,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英祖繼妃 慶州金氏)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1802년(순조 2) 10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1834년(순조 34) 11월 45세로 죽으니, 경기도 광주에 장사지내고 인릉(仁陵)이라 이름지었다.


《 칠궁 》
청와대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 사적지
'칠궁' (사적 제149호, 종로구 궁정동 소재)
칠궁은 조선시대 제왕 중 정비의 출생이 아닌 왕이 그의 사친을 모신 사당이다. 이 곳은 원래 숙종의 후궁이고,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우가 있어 숙빈묘라 하였는데, 영조 20년(1744)육상묘로 개칭하였다가 영조 29년(1753)에 육상궁이라 하였다. 고종 19년(1882)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20년 6월에 중건하였다.
그후 융희 2년(1908)서울주변에 흩어져 있던 여러 사친묘를 합사함에 따라 영조의 후궁이며 진종의 생모인 정빈이씨의 연호궁, 선조의 후궁이며 원종의 생모인 인빈김씨의 저경궁,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의 대빈궁, 영조의 후궁이며 장조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선희궁,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경우궁을 육상궁 분내에 합사함으로써 육궁이라 했는데, 1929년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덕안궁을 이곳에 이안하면서 칠궁이라 하였다.
정문을 들어서면 남북축에 맞춘 2채의 재실이 있고, 그 뒤로는 동에서부터 남향한 육상궁, 연호궁, 덕안궁, 경우궁, 선희궁, 대빈궁, 저경궁이 있는데 연호궁과 덕안궁 사이에 있는 냉천과 냉천정, 그리고 주변의 뜰은 전통적인 한국정원의 일면을 보여주며 주위 담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경우궁(景祐宮)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박씨의 신주를 봉안한 궁이다. 수빈은 순조 20년(1820) 12월에 서거하였으며, 그 다음해 신주를 창경궁내 전각에 봉안하여 현사궁(顯思宮)이라 하였다. 순조 24년(1824) 5월에 별묘가 세워지고 같은해 12월에 경우궁으로 명명되었으며 순조 25년 2월에 경우궁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건립한 터는 구 용호영의 터였으며 그 위치는 북부 양덕방(종로구 계동으로 현 휘문고교 운동장)에 있었다. 건립 후 성일각에는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함께 봉안하였다. 이는 육상궁의 냉천정에 아들 영조의 어진을 함께 봉안한 예와 같다.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갑신정변에는 고종이 경우궁에 이어하여 혁신내각을 이곳에서 조직, 하루를 묵고 다음날 18일 이재원의 집 계동궁에 이어하였다가 창덕궁에 환어한 사실이 있다. 이일이 있은후, 경우궁을 이건하는 의논이 있어 고종 23년에 양덕방에서 인왕동(현 옥인동 45-46번지 일대로 중부병원 자리)으로 이건하였고, 다시 융희 2년에는 제사친묘를 합사하는 조치에 따라 저경궁·대빈궁·연우궁·선희궁 등과 더불어 경우궁도 육상궁내에 이안하게 되어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