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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박태서 
Subject  
   서거 200주년 연암 박지원의 사상과 세계


          朴趾源 1737--1805  

紹 - 應福 - 東亮 - 瀰
瀰--世橋|--泰斗--弼夏--師正--興源--宗岳(우의정)
.        |          |                 |--昌源.        
,        |          |                 |--明源
.        |          |--弼周
.        |----泰吉--弼均--師愈--趾源--宗采--珪壽(좌의정)
                                                         |--瑄壽

영조13(1737) 음2월5日 生
서울 西小門 밖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박사유와 함평이씨 사이의 2남2녀중 막내로 태여남    
그의씨족인 반남 박씨가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때 사간司諫(임금의 처사에 대해 충고하는사간원의 종3품 벼슬)을 지낸  박소朴紹 이후 높은 벼슬을 한 인물을 허다하게 배출한 명문 거족이다.  박소의 손자인 박동량朴東亮은 임진왜란때 선조를 호위한 공으로 금계군에 봉해짐,  박미朴瀰의 증손이자 연암의 할아버지임 박필균(1685--1760)은 숙종말년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갈리자 분렬된 집안의 당론을 노론으로 이끌었다그 뒤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일시 은둔 했다가 영조즉위후 정계에 진출하여 탕평책에 비판적인 노론측의 일원으로 적극 활동했다 그는 경기감사 참판 지돈령부사 (왕실의 친척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한관청인 지돈령의 (정2품벼슬) 등의 관직을 지냈다.  박필균은 일족인 박명원이 영조의 총애를 받는 부마인 점 등 왕실과 깊은 인척관계로 국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더욱 근신 하며 청렴한 생활을 하여 사대부간에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러한 조부와 대조적으로 연암의 부친 박사유(1703--1767)는 평생 벼슬없이 지냈으며  부모밑에서 평범하고 조용한 일생을 보냈다따라서 연암의 정신적 성장에는 집안의 기둥이던 조부가 부친보다 훨씬 더 강한 영향을 끼첬던 듯하다. 연암은 16살 때 전주이씨와 결혼한후, 장인 이보천과 그아우인 이양천의지도를 받으면서부터 뒤늦게 학업에 정진하였다.  장인인 이보천(1714--1777)은 농암 김창협의 제자인 종숙부 이명화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같은 농암의 제자인 어유봉의사위가 되어 그에게도 사사함으로서 우암 송시열에서 농암 김창협으로 이어지는 노론 학통을 충실히 계승한 산림처사로상당한 명망이 있었다 연암은 이러한 장인으로 부터 사상과 초세면에서 커다란 감화를 받고 시속과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선비의 진정한 본분을 잊지 않은 자세를 배웠다고 한다
   결혼한 후에 뒤늦게 학업에 정진해 20세 무렵부터 연암은 같은 노론으로 절친한 벗인 김소이 황승원 등 과 함께 산사를 찾아다니며 과거준비에 전념했다   장래의 거취 문제로 번민하던   연암은
1771년  마침내 과거를 고만두고 재야 선비고서 살아가기고 결심했다. 그는 바로 전해
1770년  감시(생원 진사를 뽑던 과거)에서 일등으로 뽑힌 뒤 영조로 부터 더할 나위없는 칭찬까지 받았으나 과거를 포기하는 용단을 내린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를 단념한 것은 영조말년의 혼탁한 정국이 큰영향을 미쳤을것으로 추축된다.  연암의 조부와 장인은 모두 노론계로서 영조의 탕평책에 대해 극력반대했다   탕평책이 소론과 노론의 갈 등을 근본 치유하기보다 미봉하려는 정책이라 하여 극력 반대했던 인물들이다
1772---1773  연암은 처자를 경기도 광주 石馬의 처가에 보낸 뒤 서울의한 셋집에 혼자 기거 하면서 홍대용  이서구 정철조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친밀히 교제하며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심화해 나갔다        

   박지원은 그가 저술한 <열하일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열하일기> 저술이외에는 겉으로 드러날 만한 업적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오로지 <열하일기> 한 책으로만 유명하다  그가 변변한 관직을지 낸적도 없고 당파를 만들어 정계를 풍미한적도 없는데도<열하일기>하나만으로 유명한 것은 그책의 내용을  가리켜 北學 이라고 부른다
<열하일기> 의 내용과 형식이 얼마나 파격적 이었는가 하는 것은 일개서생이 쓴 그책 하나 때문에 국왕 정조가 이른바 文體反正 지시를 내린 것만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文體反正이란 천박한 이야기체를 버리고 옛  성현들의 품격 있는 문체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도대체 열하일기 가 어떻길래 문제가 되었을까,  문체가 품격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그  내용이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 제70세 생신을 축하하는 정부사절단으로 가는 친척을 따라 같이 청나라에 가서 보고 들은 것과 자신이 느낀 것을 적은 기행문이다.
  그는 이기행문에서 청나라의 발달된 여러 문물을 소개하고 우리도 청나라를 따라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바로 이 점이 우리 나라의 전통 유학자들을 격분케 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 유학자들의 사고방삭은 이른바  소중화론에 깊이 빠져 있었다 . 말하자면 유학의 본거지인   명나라가 문화의 중심지인 중화였는데 그명나라가 만주 오랑캐에게 멸망해 없어졌으니 이제 이 세상에 중화도 없어젔다. 그러나 중화가 아예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니 미흡하나마 우리라도 그중화를 대신해야겠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론이  바로 소중화론인 것이다이 소중화론에 따르면 청은 명을 멸망시킨 원수요  그들의 문화는 한낱 오랑케 문화에 다름없는 것이다.  이러한 풍토에서 청나라를 배우자고 했으니 난리가 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열하일기가 아무도 읽어 주지 않고 사장돼 버렸다면 문제가 안 됐을 것이다 그런데  열하일기는 청년 선비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손에서 손으로 팔사돼 퍼져 나갔던 것이다. 인기의  비결은 박지원의 형삭에 얽매이지 않ㄴ는 시원한 문쳉와 거침없이 토로하는 직설적인 어법에 있었다.박지원은  열하일기 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사대부란 누구냐 중국에서 보자면 예맥 땅 사람들 즉 오랑캐가 아니냐 만주족의 호복을 업신여기고 명나라식 한복을 입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중국에서는 상복에 지나지 않는다. 변발을 흉보며 상투를 고집하고 있으나 남방의 야인들도 상투를 틀고 있다  청나라 사람들보다.  털끝 만큼도 나은 것이 없으면서도  상투 하나 가지고 잘난 체를한다“  
    <열하일기>에 실린 양반전에서는 조선의 양반네들에 대해 직설적 야유를 퍼붓는다 . 정선의 한 가난한 양반이  굶엊죽을 지경이 됬는데도 일할 생각은 도뭊지 하지를 않는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양반이 뭐하는거냐  한푼어치 값도 않되이는 것이 양반이다”라며 조롱한다. 그런데 돈많은 상인이 그에게 돈을 주고 양반을 산다. 군수에게 가서 양반문서를  꾸미는데 거기에 써있기를 “농사도 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지만 명예 되는 일은 도맡는다. 이웃에 농사짓는 상민이 있으면 마음데로 부려먹을 수 있다“. 라고 되있다. 이를보고 상민이 하는말 “이런 맹랑한 것이 어디 있나  나보고 도독놈이 되라는 말 안닌가,”

  박지원이 살던 18세기 말의 조선사회는 이미 신분제도가 많이 해체되 있었고 서양의 문물도어느정도는 소개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 뇌리에는 성리학적 사고 방식이 굳게 뿌리박고 있었다, 그러한 양반들에게 도독놈이라고 야유를 보내니 그가 곱게 보일 리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이것은 박지원이 그면큼 근대화의 선각자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후일 이른바 實事求是와 利用厚生을 중시하는 실학이 대두하는데 박지원은 그실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저서〕
그의 저술은 모두 ≪ 연암집 燕巖集 ≫ 에 수록되었다. 그가 가진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서, 실제로 1900년 김만식(金晩植) 외 23인에 의해 서울에서 처음 공간된 그의 문집은 책을 초록한 형태였다. 그의 손자 박규수 ( 朴珪壽 )가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음은 문집 내용이 갖는 의미를 짐작케 한다.
그의 저술에서 특이한 점은 문집 대부분이 논설을 중심으로 한 문장이 대부분이며, 시는 각체를 합해 42수가 전부이다. 이 점에 대해 아들 종간(宗侃)은 〈 영대정잡영 映帶亭雜 半 〉 (권제4) 말미에 붙인 부기에서 유실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 교유한 문인들의 문집 속에도 그가 많은 작품들을 지었다고 하고 있어, 이 역시 유실되었음을 증명하는 한 예일 것이다.
저서로는 ≪ 열하일기 ≫ , 작품으로는 〈 허생전 〉 · 〈 민옹전 閔翁傳 〉 · 〈 광문자전 廣文者傳 〉 · 〈 양반전 〉 · 〈 김신선전 金神仙傳 〉 · 〈 역학대도전 易學大盜傳 〉 · 〈 봉산학자전 鳳山學者傳 〉 등이 있다

<고은의 북한탐험>에서
  개성 30리 밖 燕巖골에서 洪國榮의 증오를 피해 살고 있던 조선의 文濠를 어찌 앚을쏜가. 그의 호가 바로 이언저리에서 얻어진 것이다.  燕巖골에서 과일나무를 심고 양어장도 만들었으나 그는 농사에 실패한 뒤 개성 시내 친구 잡에서 한동안 신세지기도 했다.

<조선 왕조 실록에서>
.고종 14/04/06《경국대전》 등의 서얼의 등용 금지조항을 폐지하도록 김기룡이 상소하다 》
    전 정언(前正言) 김기룡(金基龍) 등의 상소는 대략 이러하였다.
    죽은 부사(府使) 박지원(朴趾源)이 작성한 글에서는 ꡐ서자의 벼슬길을 영원히 막은    
    것은 왕조를 세운 초기에 좀된 신하가 기회를 타서 앙갚음한데 지나지 않는다.
    라고   하였고    
순종 03/08/19    임징하, 김경복, 정해택 등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하다 》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추증한 박지원(朴趾源)은 문장과 나라를 운영하는 방법이 한
    대에 뛰어났 으며 참정 대신의 벼슬을 추증한 박홍수(朴洪壽)는 학식이 깊고 실천이 착
    실하였으니 응당 표창하    는 조치가 있어여 할 것이다. 다같이 시호를 내리는 특전을
    베풀도록 할 것이다.ꡓ라고 하였다.
순종 03/08/20  서기 등 26명에게 시호를 주다 》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추증한 박지원(朴趾源)에게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를,
    참정 대신의 벼슬을 추증한 박홍수(朴洪壽)에게 문단공(文端公)이라는 시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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