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박씨 홈페이지:::
 
::: 자랑스런 반박인 :::
본 게시판은 명문대가의 음덕을 이어받아 근. 현대를 힘차고 왕성히 곧게 살아가는 자랑스
런 반남박씨를 소개하는 공간으로 로그인 한 후 회원이면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습니다.

0
Name  
   박찬무 
Homepage  
   http://www.bannampark.org
Subject  
   박규수, 하물며 벗의 아버지라 한들
이글은 < 암행어사 입니다 > 홈페이지에서 갖어온 글입니다.




하물며 벗의 아버지라 한들
1854년(철종 5) 경상좌도 암행어사 박규수


어사 박규수가 경상도 밀양땅에서 겪은 이야기. 박규수는 밀양군수 서유여의 비리를 전해 듣고 그가 절친한 벗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고민하지만 끝내 公私를 구분해 그의 죄를 낱낱이 적발해낸다.  

“나는 이 곳 운부암에서 문서를 처리한 후에 비로소 다른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 짐작했던 것보다 일이 고되고 어려움이 많지만 그 때마다 할아버지의 책에서 읽은 구절들을 떠올리며 힘을 얻고 있다....”
철종 5년 (1854) 2월 25일 경상도 영천 은해사의 말사 운부암에서 박규수가 동생 박선수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조선말기 대표적인 개화사상가였던 환재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그 해 1월 4일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임명돼 남루한 행색을 하고 영남지방을 암행하는 중이다.
박규수는 효명세자에게 주역을 강의하고 그와 국정을 논의하는 등 스무살 무렵에 이미 문명을 떨쳤지만 효명세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어머니, 아버지의 연이은 사별로 크게 상심하여 20년간 칩거했다. 그러다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고 실학의 학풍에 눈을 떠 마흔두살에 비로소 과거를 치르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병조정랑, 부안현감 등을 거치면서 실사구시의 학풍을 실현해가던 그가 고된 암행길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오십이 가까울 때였다. 때가 때이니 만큼 체력 좋은 젊은 신진기예들보다 애민정신이 투철한, 진정한 목민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몇 년째 계속되는 지독한 가뭄과 흉년으로 배를 움켜쥐고 유랑하는 백성이 팔도 곳곳에 넘쳐나고 있었다. 요즘 은해사에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누렇게 뜬 얼굴로 집도 밭도 다 버리고 다만 먹기 위해 산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박규수는 하루에도 몇 명씩 볼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일차 정보를 수집한 그는 상황이 매우 심각함을 깨달았다. 그런데 가뭄도 가뭄이지만 백성을 이 지경으로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아무리 아끼고 밤낮으로 일해도 아전들이 부리는 이런저런 농간에 배겨날 수가 있어야죠. 오죽하면 아전의 술 한 잔이 환자(還子)가 석 섬이라는 말도 있겠소? 조그만 미끼를 던져 덥석 물게 해놓고는 나중에 그 몇 곱을 받아 가로챈단 말입니다. 하긴 수령은 이방한테서 돈을 뜯고 이방은 아전들한테서 돈을 뜯으니 아전은 어디서 돈을 뜯겠습니까? 차라리 머리깍고 중이나 되면 이 꼴 저 꼴 안보고 살 수 있잖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해 중앙이고 지방이고 할 것 없이 관리들이 줄서기와 자기 배 채우기에 정신 없을 때였다. 그러니 탐관오리들이 횡행하여 갖은 명목으로 수탈하는 것도 물만난 고기처럼 당연한 현상이었다.

특히 영남지방에서는 그 폐해가 가장 심했다. 이 곳으로 오기 위해 거쳐온 경기 충청지역과 비교해봐도 알 수 있었다. 이에 박규수는 “영남은 재화와 보물이 풍부한 고장으로서 풍속이 아름답고 인재 배출도 일찍이 팔도의 으뜸이었으나, 지금은 삼정(三政)이 모두 병들어 온갖 폐단이 고질화됨이 또한 팔도에서 가장 심하다”며 한탄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박규수와 대화하는 것을 듣고있던 한 걸인이 끼어들며
“그래도 아무렴 밀양 사람들보다 더 할라구요?” 라고 한마디 한다. 그러자 먼저 신세한탄을 하던 자가 “하긴 그렇지. 그런 부사 만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지.” 하며 거드는 것이다.
그들의 대화에 박규수는 귀가 번쩍 트이는 것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밀양은 그나마 좋은 부사 만나 형편이 좀 낫지 않소?”
그러자 걸인이 손사래를 치며 기가 막히다든 듯 한 마디 한다.
“보아하니 이 곳 사람 아닌 것 같아 내가 참겠는데 말이지, 혹시라도 밀양에 가거들랑 그딴 얘기 꺼내지도 마슈, 맞아죽고 싶지 않거든 말이오. 어이구...”


박규수는 서둘러 문서를 처리하고 밀양으로 떠났다. 직접 보고 듣기 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밀양부사라면 서유여, 바로 그의 절친한 벗 서승보의 부친이 아니던가? 어렸을 적 한두번 뵀지만 늘 예의를 갖춰 대하던 분이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대인의 풍모를 간직했던 그 분이 이다지도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될 줄은 짐작도 못했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령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박규수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밀양의 부정부패를 보고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소문대로 밀양의 백성들은 아사 직전에 놓인 상태로 부사 이하 모든 관리들에 치를 떨고 있었다. 특히 조유전 작곡의 폐단이 극심했다. 밀양에서는 환곡의 일부를 작전하여 감영에 바치기 전에 그 돈으로 조유전 작곡이라 빙자하여 작곡하고, 환곡으로 분급하여 그 색락미를 착복하는 수법을 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본색환(本色還; 미곡으로 걷는 환곡)은 상정가보다 비싸게 돈으로 걷고 대봉조(代捧條; 돈으로 걷는 환곡)는 상정가로 걷어 그 이문을 착복하고 있었다. 환곡의 분급도 유명무실하여 부자들은 뇌물을 주어 방환을 하고 빈민들만 부득불 환곡을 받게끔 했다. 창리(倉吏)들은 이 환곡을 다시 헐값에 사모은 뒤 원총(元總) 이외에 추가로 분급하고, 이를 걷을 때 작전하여 이익을 나눠먹었다. 밀양이 그 어느 곳보다 원성이 자자한 것은 바로 이 조유전 작곡을 빙자하는 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부사 서유여는 바로 이 부정의 선봉장이었다. 1852년에 부임한 뒤 조유전(漕留錢; 조창 마감시에 남은 돈)을 작곡(作穀)한다는 등 갖은 명목과 수단을 만들어 환곡의 색락미(色落米; 毛色이나 손실분 보충을 위해 가외로 걷는 쌀)를 착복했다. 그 해 봄 진정(瞋政) 때에는 각종 명목으로 백성들로부터 돈을 걷었는데 그 중 3천여냥이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제 출도해서 문서들을 조사하기만 하면 수많은 비리가 적발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날 밤 박규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의 눈앞에 서승보와 함께 학문을 공부하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승보는 문자와 도의로 사귄, 그의 몇 안되는 지인이었다. 그와의 친분을 생각하면 출도는 아니될 말이었다.

그 무렵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암행어사 제도도 예전처럼 엄격하게 관리되지 못하여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거나 권세가에 빌붙는 어사가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박규수는 설령 동생이 그런 부정을 저질렀다 해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처리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벗의 아버지라 한들 그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뻔히 보고도 어찌 묵인하겠는가. 이는 자신은 물론 할아버지 박지원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이었다.

연암 박지원이 관아에 구휼하는 곳을 두어 백성들에게 죽을 나누어 줄 때의 일이다. 그는 뜰에다 금을 그어 남녀를 구분하고 어른과 아이의 자리를 달리한 다음 먼저 죽 한 그릇을 들었다. 그 그릇은 구휼에서 쓰는 것과 똑같았고 소반이나 상 같은 건 차리지도 않았다. 그는 남김없이 죽을 다 들고나서, “이것은 주인의 예(禮)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구휼을 함에 있어서 이와 같다면 어찌 부끄러움이 있겠는가"라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연암의 행적을 되새기며 박규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밀양 영남루에서 “암행어사 출두요!”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순식간에 관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박규수 일행이 마패를 내보이며 관아로 행차하니 갓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옷도 급하게 걸친 아전들이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는 꼴이 가관이었다. 밀양부사 서유여가 황급히 뛰어나와 사모관대에 청색포를 입은 어사를 맞는데 그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더니 하얗던 낯빛이 도로 환해진다. 바로 어렸을 적부터 자식처럼 돌보아온 박규수가 아니던가? 굽혔던 허리를 펴며 서유여가 아는 체를 하는데 박규수가 차갑게 외면을 한다. 그리고 관아 문서를 모조리 가져오도록 지시하더니 불법을 자행한 문서를 낱낱이 가려내는 것이었다.

서유여는 사람들 눈 때문에 그러는가 싶어 박규수에게 바싹 다가가 소곤거린다.
“환재군. 날세. 그만하면 대충 됐으니 어서 안으로 드세나!”
하지만 박규수는 여전히 그를 외면하고 추상같은 표정으로 일에만 몰두했다.
창고로 가서 장부와 곡물을 일일이 대조하니 그가 적발해낸 불법문서만도 십여 장이 되었다. 조사 결과 밀양부사 서유여의 부정에 관한 소문은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그 외에도 서유여가 1852년과 1853년에 걸쳐 관속과 민간에서 환곡을 포탈한 금액은 무려 1만3,000여냥, 2만4,000여석에 달했다. 어사 박규수는 부득이 봉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이에 ‘봉고’ 두 글자를 쓰고 마패로 답인하여 창고문에 붙였다. 이어 어사의 권한으로 밀양부사 서유여를 파직시켰다.

서유여로서는 억울하고 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무렵에는 이런 부정들이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어서 크게 법을 어긴다고 생각하는 이가 거의 없는 지경이었다. 서유여는 어찌 내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냐며 박규수에게 호통도 치고 애원도 해봤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박규슈는 관례에 따라 겸관(兼官; 수령의 자리가 비었을 때 이웃 고을의 수령이 임시로 맡아봄)에게 송부하기 위해, 부사 서유여로부터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거두고는 그 날 밤으로 밀양을 떠났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서승보는 박규수에게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며 절교를 선언했다. 이를 두고 박규수는 동생 박선수에게 편지를 써서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서승보는 평생 심복하던 벗이다.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절교하는가? 천하에 이런 도리가 있는가? 이 일로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차고 머리는 몹시도 띵하다. 잠도 아니 오고 밥맛도 없어 방안을 돌며 방황하니 이런 경우는 일생에서 처음 당한다. 가족들은 매번 객지에서 병들까 걱정하지만 이러한 고충은 전혀 알지 못하리라.”

그로부터 오랫동안 밀양에서는 박규수의 대쪽같은 성품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박규수의 동생 박선수도 훗날 암행어사가 되었는데 역시 절친하게 지냈던 김상현의 종형을 탄핵 파면시킨 바 있다. 서유여는 당시 파직됐지만 훗날 공조판서까지 지냈다. 서승보는 2년 뒤 과거에 급제해 충청암행어사로 임명돼 박규수 못지않은 활약을 했다. 하지만 그 후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었는지 여부는 알려진 바 없다. 박규수가 크게 우려했던 대로 몇 년 뒤 이 곳에서는 환곡의 폐해가 절정에 달해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바로 진주민란이다.


참고자료

박규수의 서계
전전부사(前前府使) 서유여(徐有畬)입니다. 본 읍의 환곡은 보리과 벼가 쌀과 콩보다 많으면 색락(色落: 세곡이나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 간색과 낙정으로 인하여 축날 것을 채운다는 구실고 덧붙여 받는 곡식)은 많은 부분이 아전과 백성들에게 돌아가고, 쌀과 콩이 보리와 벼보다 많으면 색락은 많은 부분이 관가의 쓰임으로 돌아갑니다. 조유전(漕留錢: 조창에 머무르는 돈 또는 모여진 돈)은 쌀로 바꾸어 그 해에 올리데, 환곡 총량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색락 2두 3승은 어떤 경우는 관아에서 모두 잘못된 전례로 사용되니 모두 색락(色落)으로 많이 걷기 때문입니다. 각 곡식은 날로 변해서 쌀 환곡이 되니, 원래의 환곡은 조유(漕留에) 혼돈되어서 붙게 되는 것이 반드시 이르는 형세입니다. 이 때문에 쌀을 받는 것이 무너지고 결손이 생기고 퍼져갑니다. 임자년(1852년) 칠월에 부임하여 그 해 환곡을 거둘 때에 본래의 환곡 중에서 6.720석령을 떼어내어 경술년(1850년) 조창의 돈에서 돈으로 바꾼 것을 유래조(流來條: 여러 해 동안 쌓인 것에 대한 조목)라고 하였고, 색락미(色落米)인 1.300석령을 돈으로 바꾼 것이 3.091량인데 모두 가져다 썼습니다. 임자년(1852년) 환곡을 걷지 않았을 때에 각 곡식을 모두 돈으로 환산하여 따로 책자를 만들고 돌을 환곡 장부에 섞어서 계축년(1853년) 가을 세금을 거둘 때, 추작전(秋作錢)이라 하여서 곡식에서 손실된 부분을 돈으로 바꾸어서 모두를 챙겨서 썼습니다.
(중략)
굶주린 사람 당 급식된 것이 (쌀)1두와 보리 2분전이며, 이방이 스스로 자기 허벅다리를 찌르고 읍민들이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해치는 모두 놀랍고도 놀라운 말들입니다. 장부를 조사한 나머지는 일단 창고에 봉했습니다. 그 죄를 관리에게 처리하게 하십시오.


이글은 < 암행어사 입니다 > 홈페이지에서 갖어온 글입니다.

--------------------------------------------------------------------------------
반남박씨 홈페이지 관련글 바로가기
    ■  [ 암행어사 (暗行御史) ]■
--------------------------------------------------------------------------------



0
158 11 8

 no 
 subject 
 name 
 date 
 hit 
 vote 
53
   박승봉 한국 초기 교회 설립에 힘쓴 지식인

박찬무
2005/12/16 4583 0
52
   박승무 심향선생 추모사업 추진-대전시

박찬무
2005/12/01 4294 0
51
   박승만 농학자, 학술원회원

박찬무
2005/06/12 3772 0
50
   박세당, 군포의 폐해를 왕에게 아뢴 어사

박찬무
2011/02/26 2886 0
49
   박성우( 朴成雨) '장군 진급'숙천공 후

박찬무
2007/11/23 7710 0
48
   박선수, 조부의 뜻을 이어 양반 비리 응징

박찬무
2011/02/26 3032 0
47
   박선수, 박지원의 손자, 양반전과 호질을 되새기다

박찬무
2011/02/26 2740 0
46
   박민서 축구선수 ( 부천SK )

朴勝翊
2004/05/25 4723 0
45
   박민서 반부패 국민연대 광주.전남본부 제3회 청백리상

박찬무
2003/11/01 4655 0
44
   박명환 두산베어스 27번 프로야구 선수 [1]

박찬무
2003/11/01 6003 0
43
   박동서 동서한방병원장 서울종친회장

박찬무
2004/05/23 4420 0
42
   박동서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박선우
2005/02/23 4010 0

   박규수, 하물며 벗의 아버지라 한들

박찬무
2011/02/26 2898 0
40
   박규수, 실학의 정신으로 어사 활동(2편)

박찬무
2011/02/26 2958 0
39
   박규수, 실학의 정신으로 어사 활동(1편)

박찬무
2011/02/26 2776 0
[1][2][3][4][5][6][7] 8 [9][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