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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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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당, 군포의 폐해를 왕에게 아뢴 어사
이글은 < 암행어사 입니다 > 홈페이지에서 갖어온 글입니다.



군포의 폐해를 왕에게 아뢴 어사 박세당 

1664년(현종 5) 평안도 암행어사 박세당(1629-1703)


어사 박세당이 황해도 땅에서 겪은 이야기. 어사 박세당은 밤새워 군포를 짜느라 고생하는 여인네들의 애환을 목독하고 이를 시정할 대책을 임금님께 아뢴다.


드르륵. 드르륵. 밤이 깊어 가는데 황해도 산골 집의 정재 방에서는 북틀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여인네들이 베를 짜는 소리입니다. 베를 짜는 사이사이 여인네들은 한숨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얘야. 아무래도 막내를 큰집에 양자로 보내야겠다."
"갓난아기를 어떻게... 보내려면 큰 아이를 보내야지요."
"애비도 없는 마당에 큰놈은 우리 집 대를 이어야지."
"하지만 막내는 아직 핏덩인데..."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화입니다. 마치 그 대화를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갓난아기가 울음을 터트립니다. 며느리는 아기를 추스르며 또 한숨만 내쉽니다.
아기의 울음소리에 옆방에서 잠자던 박세당은 잠을 깨고 말았습니다.
"남들은 줄줄이 아들 손주만 본다고 부러워하지만... 그놈의 징글징글한 군포 때문에..."
어렴풋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황해도 지방을 암행하던 박세당이 산아래 작은 마을에 도착한 것은 밤이 깊어서였습니다. 산자락에 붙은 농가에 들어가 하룻밤 묵어갈 뜻을 비치자, 늙은 여인네가 말했습니다.
"빈방이 하나 있긴 하지만, 아이들과 여인네들만 사는 집이라서..."
"산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다른 집을 찾아갈 기력도 다 떨어졌습니다."
몸종인 덕대가 간곡히 부탁을 하자 할머니는 겨우 승낙을 했습니다. 쌀을 내주어 밥을 지어 달래서 먹은 박세당은 곧바로 잠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아기 울음소리에 눈을 뜬 것입니다.
"너와 내가 손이 발이 되도록 일하면 우리 다섯 식구가 굶기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죽은 사람과 갓난아기한테까지 군포를 물리니 도무지 살아갈 방도가 없구나."
여인네들의 말을 듣다보니 참 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농가는 모두 장정 다섯 명 몫의 군포를 짜서 바쳐야 했습니다. 오래 전에 죽은 시아버지와 몇 달 전 이질로 죽은 남편, 그리고 일곱 살, 다섯 살 난 두 아들과 갓난아기까지. 군포는 산 사람, 그 중에서도 성인 남자만이 내는 것인데도, 관아에서 갓난아기와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물리는 것입니다.
"헤어져 사느니, 차라리 아랫말 호장님 집에 전부 노비로 들어가는 것이 낫겠어요. 노비가 되면 군포를 안 물어도 된다 잖아요."
군포에 얽힌 백성의 고충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때문에 사내아기가 태어나면 눈물을 흘리고, 전 가족이 노비가 될 생각까지 한다는 건 충격이었습니다. 게다가 박세당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함께 친척집을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여인네와 아이들만 남은 이 집의 사정이 더 딱하게 느껴졌습니다.
박세당은 1629년 이조참판 박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어머니와 함께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의 친척집을 떠돌며 살아야 했습니다.박세당은 13살이 되어서야 고모님 댁에서 안정된 삶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는 박세당의 총명함을 어여삐 여겨서 글공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1660년 박세당은 32살 창창한 나이에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습니다. 그는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고, 그 뒤 예조좌랑과 병조좌랑을 거쳐서 1664년 가을 황해도 암행어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암행어사를 하면서 박세당은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가장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은 군포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상민인 성인남자는 나라를 지키는 군역의 의무를 져야 하는데, 평상시에는 군역 대신 군포를 내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관아에서는 할당된 양을 채우기 위해서 죽은 사람과 갓난아기의 몫까지 군포를 내라고 닦달을 했고, 그걸 견디다 못해서 도망을 가면 이웃에게 대신 물게 했습니다. 박세당은 한양으로 돌아와 임금님께 이런 사정을 보고했습니다. 박세당의 보고를 들은 임금님은 황해도 지방의 군포의 양을 탕감해주었습니다.

박세당은 학문이 깊고 인품이 고매했습니다. 당시의 공식적인 학문이었던 주자학만이 아니라 노자를 즐겨 읽고, 노자의 욕심 없는 자연스런 삶을 동경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박세당은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술을 좋아하고 행실이 단정치 못한 관리들을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곡산 군수 유진삼이 그런 경우입니다.
박세당이 곡산 고을에 들어서자 집집마다 술 빚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아니, 이 흉년에 집집마다 술을 빚는다니! "
박세당의 물음에 주막집 주인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사또님의 명령인데, 내일 당장 끓일 식량이 없어도 하는 수 없지요."
"추수 끝났다고 술! 파종했다고 술! 바람 분다, 눈 온다고 술! 관아에서는 연일 술잔치만 벌입니다."
"술에 취하면 트집 잡아서 노비들을 곤장 치기도 하고, 늙은 이방에게 땅재주를 부리라고 시켜서 수모를 주기도 한답니다."
곡산 군수 유진삼은 비교적 이른 나이인 26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30년 동안 관리생활을 해온 사람이었습니다. 박세당이 서리들과 함께 관아 앞에 이르니 풍악소리가 담 밖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녹봉을 받는 관리라면, 마땅히 백성들에게 본을 보여야 하거늘!"
박세당은 한양에 돌아와서 임금님께 유진삼의 행실을 보고하였습니다. 임금님은 그의 벼슬을 떨구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후에 유진삼은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정언이 되고 장령이 되었지만, 남을 헐뜯는 거짓말을 해서 다시 한번 문책을 받습니다. 그 죄로 곤장 100대와 3천리 유배를 선고받지만 나이가 70살인 것을 고려하여 벼슬에서 내쫓기기만 합니다.

암행어사 활동을 잘 수행한 박세당은 곧바로 정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홍문관 수찬으로 있으면서 양반 대신들의 당쟁과 착취로 비참한 지경에 이른 백성들의 생활 안정책과 놀고 먹는 사대부들을 고발하는 상소문인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임금님께 올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바치는 세금을 균등하게 할 것과, 모든 정치·사회 제도를 개혁하고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사대부 양반들은 하는 일 없이 나라의 봉록(俸錄)만 받아먹으니 기생충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병마평사(兵馬評事) 등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리 생활을 포기하고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났습니다. 특히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아들을 잃고 나자, 농사를 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습니다. 이후 그는 집의·사간·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호조참판·공조판서·우참찬·대사헌·한성부판윤·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의 높은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사양했습니다.
박세당의 학문과 사상은 성장기의 고난과 청·장년기의 관리 생활을 통한 개혁 의식, 그리고 당쟁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려운 농촌에서 지낸 경험 등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조호란 등 민족적인 시련이 있었고, 당쟁으로 정치가 불안정하고 백성의 생활은 매우 곤궁할 때였습니다. 그는 이런 나라 안팎의 현실을 바로 보고, 나라를 지키고 민생을 구제할 학문과 사상을 연구했던 것입니다. 그의 학문은 자유분방하고 매우 독창적이었는데, 논어 · 맹자 · 대학 · 중용 등 사서와 도덕경 道德經 및 장자(莊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또 경전의 글은 생각과 취지가 깊어서 본 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의 유학자들이 훼손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 공자와 맹자의 원래 생각을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사변록 思辨錄 을 저술하였습니다. 많은 책과 문집을 쓰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는 1703년 7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고자료
박세당(朴世堂)은 1629년(인조 7년)에 태어나서 1703년(숙종 29)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660년(현종 1년) 증광시(增廣試) 갑과1(甲科1)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 등을 지냈습니다. 35세 때인 1664년(현종 5) 10월 4일, 황해도 어사로 파견되어 탐욕을 부리고 여색을 밝힌 봉산 군수 김하량(金廈樑)과 술주정이 심한 곡산 군수 유진삼(柳晋三)을 적발하여 벌을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특히 황해도 지역에서의 군포 폐해를 상세히 보고하여 이를 개선토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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