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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장공을 선조로 모시는 이유]
우리 반남이 왜 호장공을 선조로 모시고 있으며 신라 경명왕의 8대군에 대하여 전혀 근거 없는 일로 인정 하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먼저 씨족의 출현 시기에 관하여 살펴 보고져 한다. 사학자인 송준호 교수는 씨족 출현을 고려 건국 前으로 보는 이유는 첫째로
적어도 신라왕경(新羅王京) 에서 상당히 일찍부터 앞에서 정의한 바와 같은 동족(同族)집단,즉 왕실계인 박씨,김씨또는 귀족성(貴族姓)인
인,崔,孫,鄭,裵,薛 등 각 성씨의 집단이 있었을 것이요,
둘째로,저들 각 집단 중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로 왕경을 떠나 각지방 예컨대, 밀양, 상주, 또는 강릉, 선산등 여러지역으로 내려가
그곳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세거하는 자들이 나타났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들 중에는 그 지방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한 자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그 지방명이 붙여진 호칭 즉,밀양박씨(密陽朴氏), 상주박씨 (尙州朴氏), 또는 강릉김씨(江陵金氏).선산김씨(善山金氏)
하는 호칭이 생겼을 것이다. 말하자면 종전에 다 같이 왕경인(王京人)이었던 박씨 또는 김씨들 사이에 분적(分籍)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朝鮮社會社硏究,一朝閣.宋俊浩〕
앞에서 말하듯이 신라가 멸망후 고려가 건국하자 왕족이었던 김씨,박씨등이 경주를 떠나 전국으로 흩어져 분파 하였다. 이렇게 흩어져
오랫동안 살다보니 신라 역사도 흩트러지면서 파계(派系)의 원류(源流)를 자세히 상고할 수 없었다.
이렇게 우리 선조들도 상고할수 없던 일을 1899년 박성민 (朴性玟)이란 者가 발행한 신라박씨선원보(新羅朴氏璿源譜)와 범박이천년사(汎朴二千年史)에
호장공 (戶長公)의 상계를 나열(蘿列)하였으니 도저히 알 수도 없고 고증(考證)할수 없는 일로 가치 조차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두번째로 항열이란 언제 부터 사용되었을까 ? 살펴보기로 하자.
경명왕의 아들을 8대군이라 하여 이름을 만들어 언(彦)자를 항열(行列)로하여 그 형제의 이름을 한자씩 세워서 배열(配列)하여,
조선시대말에 작성 하였던 것이다.
고려 (高麗)중엽 이전에는 항열(行列)이란 것이 없었는데 하물며 경명왕때에 언침(彦沈) 언성(彦成)등의 8언(彦)의 이름자가
있었을까 ?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파척(破斥)해야만 할 것이다.
반남박씨는 숭덕전지(崇德殿誌)를 간행할때 "박씨중(朴氏中)에는 유식(有識)한 자가 그것을 자기선조의 이름 이라 말하되『어느
박씨 어느 박씨는 언(彦)누구, 언(彦)누구의 후손이다』이라고 무식함을 나타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세대가 점점 오래 지나면서 가짜를 진짜로 알게될 염려가 있으므로 박씨된 자(者)는 마땅히 밝게 분간 해야만할 것이다.
신라에서 고려를 지나 조선에 이르기까지 1,000 여년간 옛사람들이 알지 못하던 선조의 이름을 밀양인이 어디서 보고서 기록한
것인가?,이것이 선조를 속이고 반남박씨를 욕되게 함이 심한 것이다. 〔潘南家史序譯文에서 인용〕
세번째로 대군(大君)이란 무었인가 ? 학술적으로 살펴보고져 한다.
국어사전에 대군이란 ①고려의 벼슬,종친에게 주는 정1품의 봉작(封爵)이며 종친부에 속한 최고의 관계(官階)로 정궁(正宮)의 아들에게
수여 하였다. ②조선 시대 임금의 적자, 종친부에 속하였으나 관품(官品)을 가지지 않았으며 벼슬 할때는 영종정경(領宗正卿)이라
하였다. 대군은 원칙적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임금의 사자 세자(世子)의 중자(衆子),대군의 적장자(嫡長子),세자의 중손(衆孫)등은
모두 군(君)이라 하였다. 〔國史大事典 三榮出版社에서 인용〕
여기에서 알수 있듯이 신라시대에 대군이 존재 하였을까?. 전혀 믿을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네번째로 경명왕의 8대군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
박씨는 신라의 왕성인 만큼 고려 시대에 많은듯 하나 실은 김씨보다 월등히 적었다. 다만 고려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박씨가
많은 것이 특색으로,고려 초기에는 박씨왕비가 많았으나 나중에는 거의 없었다.
박씨 족보에는 八대군을 각지에 분봉하여 박씨의 八대 본(本)이 생겼다하여 이사람을 유리왕의 아들 이니 혹은 경명왕(景明王)의
아들이니 하여 신라 왕실에서 분파 되었다고 하나,「삼국사기」에는 유리왕 시대에 八왕자에게 분봉은 커녕 사실상 신화속에 쌓여 있는
때의 허황된 이야기 이다,
또 경명왕이 재위 8년만에 승하하여 아들도 변변히 두지 못하였으므로 동생 경애왕이 계승 하였다고 하나,이것 역시 믿기 어려운
말이다. 다만 경애왕 2년에 고려 태조가 건국 하였으므로 고려국이 되는 동시에 성씨가 많이 생겼다는 암시 밖에 되지 않는다.
제계고(帝系考)에 의하면 八대군은
밀성대군 (密城大君 - 彦枕),고양대군(高陽大君 - 彦成)
속함대군 (速咸大君 - 彦信),죽성대군(竹城大君 - 彦立)
사벌대군 (沙伐大君 - 彦昌),완산대군(完山大君 - 彦華)
강남대군 (江南大君 - 彦智),월성대군(月城大君 - 彦儀)
등인데 신라때부터 밀양,상주 전주,죽산,함양,순천, 고령,경주,등에 본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완전히 조작 된것으로 전혀 돌아볼
가치 조차 없는 말이다.〔韓國의歷史.마당,李相玉에서 인용〕
끝으로 시조(始祖)란 어떠한 인물인가? 에 대하여 사학자 송준호 교수의 말을 빌려보고져 한다.
시조란 그 후손들이 자기들의 조상을 추적한 끝에 도달한 마지막 인물이라는 설명은 한국의 대부분의 씨족에게 해당 되는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그 전형적인 예(例)의 하나를 반남박씨의 경우에서 볼 수가 있다. 시조는 반남지방의 호장을 지냈다 해서 호장공(戶長公)으로
불리우는 「朴應珠(박응주)」이다.
저들에게는 창시보(創始譜)가 되는 1642년「반남박씨족보」를 보면 그 족보의 편찬을 맡았던 박미(朴미)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서 박미(朴미)는 먼저 반남박씨도 한국의 모든 박씨와 마찬가지로 신라 박혁거세의 후손으로서 원래는 경주에 살았는데
신라 멸망후 고려 태조가 경주內의 박씨들을 전국 각지에 분처(分處)할때 자기들의 선조들은 나주의 반남에 배치되어 그곳에서 정착
되었다.〔 朝鮮社會社硏究,一朝閣. 宋俊浩에서 인용 ]
여기에서 결론을 내린다면 반남박씨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윗대 선조들을 찾을 길이없어 부득이 밀직공의 계축호적에서 찾아낸 호장공을
선조로 하고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여 호장공을 1세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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