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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朴定陽) ]
1882년 5월 22일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되고 거의 5년 반이 지난 1887년 11월 16일『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朴定陽)』은
미국에 부임하기 위해 인천에 정박중인 미국 군함『오마하』호에 올랐다.
오마하호는 서울에 주재하는 미국인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인천과 일본의 나가사키를 왕래하고 있었는데 『조지』함장이 자청해서 박정양 일행을 태우게 되었다.『박정양』은 오마하 호에 탑승할 때 조지 함장 이하 승무원들은 정장을 하고 함상에 정열해서 군악을 연주하면서 태극기를 높이 달고 15발의 예포를 쏘으며 맞이했다.
감격적인 순간 이었다.박정양은 이렇게 미국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부임 길에 올랐다.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홍콩 및 요코하마를 돌아본 후 영국 여객선을 타고 하와이를 거쳐 47일만인 12월 28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1888년 1월 9일 위싱턴에 도착하여 『에비트하우스』에 투숙했다.
1888년 1월 17일 미국 22대 대통령인『그로버 클리브랜드』와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고 악수를 나누어 인사했다.
이로써 『초대 주미 공사』가 된 것이다.역사적인 순간 이었다.박정양은 국서(國書)를 봉정하고 백악관을 물러 나온 후 신임 인사차 워싱턴 주재 각국 공사와 미국의 각부 장관을 예방하고,공사로써의 임무를 본격화 하였고 워싱턴 15번가 1513번지에 자리잡은『피셔』의집을 임차하여 공사관을 열었다.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朴定陽 1841 - 1904 )은 조선의 정치가로 자는 치중(致中)이며 반남박씨 23세손이다. 호는 죽천(竹泉),시호는 문익(文翼)이고 한편 參奉公(참봉공) 東民의 11세손으로 제근(齊近)의 아들이다
1866년(고종 3)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79년 형조참판을 지냈고,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이용사당상경리사(理用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1882년 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좌승지 등을 거쳐 1883년 이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내무협판·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사헌부대사헌·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도승지 등을 지냈다.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거쳐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다.고종이 박정양을 주미 공사로 임명한 것은 1887년 7월 8일로 임명 후 한달 남짓 부임준비를 한다음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미국으로 출발하려고 했다.그러나 출발 직전 청국(淸國)의 항의로 출발을 늦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청국은 외교사절을 서양에 파견하려면 왜 미리 상의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국가 재정이 어려운데 외교사절을 미국에 상주 시킨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었고 또한 외교 사절의 호칭문제를 문제 삼았다.
그러나 교섭을 벌인 끝에 호칭은 全權公使의 호칭을 사용하되 청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청국과 영약삼단(?約三端)이란 조약을 맺었다. 영약삼단의 내용은 한국의 외교 사절은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 대한제국 공사는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를 잡는다 .③ 대한제국 공사는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듯이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양은 미국에 도착해서 부터 영약삼단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했다.워싱턴에 도착한 다음날인 1월 10일 미 국무성으로 『베야드』장관을 예방하여 한문으로 쓴 국서의 부 본과 영문독본을 제출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봉정하는 날자를 잡았다.이러한 사실을 안 워싱턴 주재 청국공사는 박정양에게 사람을 보내어 영약삼단을 이행 하라고 따졌다.
그러나 박정양은 본국을 떠나 올 때 너무 급하게 서둘다가 정부의 지시를 자세히 받지못하고 왔으며 영약삼단을 따를 수 없다고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 『박정양』은 계속『영약삼단』을 지키지않고 청국공사와의 불화 등이 문제가 되어 부임한지 1년이 채 못되어 귀국하게 되었지만『독자적인 외교』를 펼쳤던 박정양의 노력은 높이 평가 받을만 한다.
1889년에 귀국하여 홍문관부제학이 되었고, 1892년 전환국관리(典局管理), 1894년 호조판서·교정청당상·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갑오경장으로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자 회의원이 되었다.1894년 11월 제2차김홍집내각(第二次金弘集內閣)의 학무대신이 되고, 1895년 김홍집내각이 붕괴되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을미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왕궁호위병 교체문제로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유임되었다. 1895년7월 내각총리대신을 사임하고 제3차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살해되자 내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총리대신서리와 궁내부대신서리를 겸임하였다. 1896년 9월 내각이 의정부로 개편되자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었다.
박정양(朴定陽)
반남(潘南)박씨 23 세손으로.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참봉공(參奉公)
동민(東民)의 후손으로 제근(齊近)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출생하시고 1904년(광무 8) 졸 하셨다.
반남박씨 문중에서는 참정공(參政公) 어른이라고 한다 1866년(고종 3)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79년 형조참판을 지냈고,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이용사당상경리사(理用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
1882년 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좌승지 등을 거쳐 1883년 이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내무협판.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사헌부대사헌.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도승지 등을 지냈으며,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거쳐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압력으로 출발을 연기하였다가 그해말에 청나라의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Cleveland, S. G.)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계속된 청나라의 압력으로 1889년에 귀국하여 홍문관부제학이 되었고, 1892년 전환국관리(典圜局管理), 1894년 호조판서.교정청당상.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갑오경장으로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자 회의원이 되었다.
이해 11월 제2차김홍집내각(第二次金弘集內閣)의 학무대신이 되고, 1895년 김홍집내각이 붕괴되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을미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왕궁호위병 교체문제로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일본의 협조로 유임되었다. 같은해 7월 내각총리대신을 사임하고 제3차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었고,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살해되자 내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총리대신서리와 궁내부대신서리를 겸임하였다. 이해 9월 내각이 의정부로 개편되자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하여 시정의 개혁을 약속하였으나 수구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1월 황국협회(皇國協會)가 폭력으로 독립협회를 탄압한 사건이 일어나 내각이 경질되자 다시 내부대신이 되었다. 조선 말기의 불편부당한 온건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가지고 이상재(李商在) 등 개화파인사들의 뒤를 돌보았다.
편저로는 『죽천고 竹泉稿』.『해상일기초 海上日記草』.『일본내무성급농상무성시찰서계 日本內務省及農商務省視察書啓』.『일본내무성시찰기 日本內務省視察記』.『일본농상무성시찰기 日本農商務省視察記』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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