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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빛나는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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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

연암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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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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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협. 안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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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 박지원론(燕巖 朴趾源論) ]
연암 박지원은 18세기말 활동한 인물로 북학파(北學派) 실학자(實學者)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당시 고루하고 속된 선비들, 소위 지배계급에 속한 이들을 통렬히 비판하고 풍자하여 가식과 허례를 버리고 실제적인 생산기술을 습득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청국(淸國)의 선진 문화와 발달한 물질문명을 받아들여 과감하게 수용해서 우리의 생활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보려는 탁월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그 당시의 경직된 사회제도 아래에서는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을 수 있는 놀라운 개혁사상이라 하겠다.
이들 사상가를 북학파라 하는데 이들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일파의 학풍과 청조(淸朝)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용실사(實用實事)를 주로하고 박학다문(博學多聞)을 표방하는 학파이다. 실학의 학문적 계보는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에 속하며 18세기 후반 현상답보에서 안주할 것이 아니라 상공업 발전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유통과정 확대와 생산체제의 기술적 혁신으로 생산력의 향상을 촉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 당시 정부에서 이러한 사상을 과감하게 수용했더라면 우리 나라의 경제발전과 역사가 완전히 바뀌어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완고한 사대부 양반들의 고루하고 편협된 면에 대한 비판과 그들 학파의 실학사상을 박지원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혹은 지방행정관으로서의 활동을 통해서 실생활에 펼쳐보고저 노력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 당시 사대부 계급에서는 상업이나 공업의 기술 습득은 양반이 할 수 없는 일이며 천민들이 해야하는 것으로서 가장 하류계급에서 하는 직업으로 취급했다. 이러한 시기에 연암의 개혁적인 사상과 주장은 혁명적인 도약이요 획기적인 사고였다고 사료된다. 생산기술에 대한 선비들의 태도와 이용후생의 자세가 서있지 않았기 때문에 농.공.상업이 침체되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것은 경제사상 특히 중농사상을 통해 사회 발전에 유익한 대안으로 승화되어 나타났다.
연암은 또 양반사회의 식충(食蟲)과 같은 비생산적이요 비리나 모순된 사고를 소설을 통해서 풍자적으로 비판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교훈이 되고 각성할 점이 있다고 보고 그 러한 병폐를 고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그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사상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해도 그의 고향인 서울이 완전히 변해버렸기 때문에 그가 남긴 유적이나 유물, 그의 발자취가 별로 없으며 그 당시의 형태는 완전히 사라지고 빌딩 숲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1) 사회, 경제적 측면(내재적 측면)
연암 박지원이 주요하게 활동하였던 18세기 후반기는 분명히 낙후와 동란, 침체와 변혁이 동반되던 시대, 근대 여명을 앞둔 어두운 시대였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엽까지 전후 50년간에 걸친 임진왜란, 병자호란, 두차례의 전란은 나라 경제를 파산상태로 밀어 넣었다. 전쟁과 그에 따른 기아와 병이 무수한 생명을 빼앗아감으로 해서 전국의 인구는 대폭 줄어들었고, 경작지는 태반 황폐화된 상태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33년11월정묘조(丁卯條)에는 "봉산(鳳山)으로부터 경성(京城)일대에 이르는 연도에 인연(人煙)이 끊기다보니 왕래하는 관리나 상인들이 투숙할 곳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사방으로 유리걸식하였고, 나라에서도 이를 구제할 힘이 없었다. 당시의 문인 윤국형(1543~1611)도 자기의 《문소만록(聞韶漫錄)》에서 "임진란 이후에 백성들은 이산되고 비록 대가 세족이라 할지라도 거의 모두가 생업을 잃었다. … 우리나라에서 변란의 화가 이처럼 혹심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고 썼다. 이렇듯 두차례 전쟁의 피해가 엄청나게 컸고 혼란한 사회상태를 기화로 한 봉건착취배들의 부정한 수탈이 혹심한 가운데서도 비록 그 발전이 매우 느리었으나 18세기 상반기에 이르러서는 사회경제가 전쟁전 수준에 거의 이르렀다. 1650년에 효종이 즉위해서부터 여러분야에 걸쳐 일련의 개혁책을 실시함으로써 사회생산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사회가 점차 안정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수리를 다스리고 경지면적을 확대하였으며 농업 기술을 개진하였다. 특히 조정에서는 이시기 상평통보의 유통을 실시하고 민간 수공업의 발전을 장려하였으며 숙종년간부터는 집시무역 금압(集市貿易 禁壓)정책을 폐지하고 전국 각 도, 군들에서 여러 가지형태의 집시무역과 상품유통이 활발히 진행되게 하였다. 또 이시기의 국제 무역도 매우 큰 발전을 가져와 한중 변경무역과 한일 무역도 대폭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국내외 무역은 개체 상업의 자본 축적과 사회적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은 자본주의적맹아의 출현과 발전을 촉진하였다. 이 시기 개체 수공업 분야에서 가공업, 제철업, 금속제조업 등이 큰 자극을 받아 품종과 규모가 확대됨으로써 고용노동이 급속히 대량으로 나타났고, 사공임용(私工賃用)이 보편화되어 "무사부농지민(無士不農之民)"들이 여러 경제부분에 쓸어듬과 함께 업주와 피고용자간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들의 관계는 이미 인신 종속관계가 아니라 자유적 경제합동의 관계였다. 이로 인해 사회경제의 양극분화가 촉진되었는데, 상품화폐관계의 전 사회로의 침투는 사대부, 봉건지주와 상인들의 치부욕을가일층 자극하였고, 따라서 그들이 농민들에 대한 착취도 무제한으로 증장하게 되었다. 결과 이것은 광대한 농민들이 극단적 빈궁에 빠지고 소수인들의 수중에 막대한 재부가 축적되게 하였다. "돈이 쓰여지게 된 이래로 부자는 더욱 부해지고 빈자는 더욱 가난해져 백가지 폐해가 뒤엉켜 생겨나므로 실로 경시할 수없게 되었다."고 한 기록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두고 말한 것이다. 상품화폐관계는 농촌에도 전면적으로 침투되어 경제적 수단을 이용하여 파산 농민들의 토지를 돈을 주고 염가로 사들이는 것이 점차 토지 약탈의 주요한 수단으로 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개성상인 몇 사람이 사들인 땅만 하여도 황해도와 경기도 경작지의 거의 태반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조 정부의 수입 내원을 크게 감소시켰고 국세를 급속히 쇠락에로 몰고 갔다. 이를 제한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여러 시책들을 펴보았으나 큰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결국, 국가 재정의 궁핍을 해결하고자 하나에서 백까지 일체의 수요를 불쌍한 농민들에게서 수탈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통치자들의 박삭(剝削)의 수단은 자못, 다종다양하였는 바 잔혹한 황구정(黃口征)..백골정(白骨征), 삼정(三政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등은 그 중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관가와 양반 지주들의 이중 삼중의 착취와 땅 잃고 살 길 없는 농민들은 차라리 일어나 반항하는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17세기 후반기부터 끊임없던 농민 봉기는 18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빈번히 일어났다. 또한 상품유통의 확대와 화폐관계는 신분제도에도 심각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시기 신분 관계 변화의 기본 특징은 각종 신분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고 계급, 계층과 신분간의 불일치성이 날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시기 신분 매매와 매관매직의 현상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전국적으로 노비, 양인들의 절대 수가상대적으로 감소되고 양반 절대수가 대폭 격증되어 있는 상태였다. 또한 이런 현상으로, 생산에서 유리되고 경제적 '경영'을 천시함으로 해서 돈 없어 '납속수직(納贖授職)'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절대 부분의 양반들은 오직 과거 시험을 통한 '入官'을 꿈꿀 뿐이었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의 통계에 의하면 벌써 백년전부터 무의 도식하는 유생의 수가 전국 인구의 과반수나 되며 해마다 과시참가자의 수는 10만을 헤아린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상태하에서 결국 대다수의 유생들은 벼슬길에서 유리되어 빈궁속에서 몰락의 일로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상품화페경제의 발전과 사회적 침투는 사회의 제반 영역에 불가피하게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비록 아직은 봉건 경제의 지배하에 그 부속물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새로운 요소들은 당시의 제반 사회적 갈등들을 점점 첨예화시켰고 사람들에게 새로운의식,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2) 외래적 측면
중국의 선진 문화와 서구 자본주의 문명은 주로 해마다 여러 차례 왕래하는 입연사절(燕使節)들과 상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중종 3년에 중국으로부터 서양포(西洋布)가 들어왔고, 중종 15년에는 입연사절의 통사(通事) 이석(李碩)이 포르투갈이 말레이시아를 토벌했다는 소식을 전하였고, 선조 36년(1603)에는 입명사신(入明使臣) 이광정(李光庭), 권희가 《구라파여지도(歐羅巴輿地圖)》를 조정에 바치었고 인조 9년(1631)에는 진주사(陣奏使) 정두원이 서양총, 천리경, 자명종 등과 함께 천문서, 천문도(天文圖)와 《치력록기(治曆錄起)》,《원경서(遠鏡書)》, 《천리경서(千里鏡書)》, 《서양국풍속기》등 적지 않은 서적을 가지고 왔다. 사적들에서 이러한 기재는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렇게, 서방의 선진적 과학기술문명과 중국의 앞선 문물, 일용 제도는 조선의 양지인사(良知人事)들로 하여금 현실과 비교하는 가운데 현행 제도의 모순, 자기 문화의 낙후성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그원인을 구명하는 길로 추동하였다. 이로부터 조선에서장기적으로 유지되어오던 중국중심론은 철저히 개변되게 되었고, 전통적인 유교 우주관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모든 봉건적 권위는 엄중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3) 사상적 측면(實學)
실학사상은 17세기 중엽부터 하나의 사상조류로 형성되기 시작하여19세기 중엽까지 지속된 우리나라의애국적이며 진보적인 사회사상조류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내재적으로는 17세기부터 봉건제도가 점차 붕괴되어 가기 시작했으며 18세기에는 자본주의적 관계가 맹아적인 형태로 발생, 발전하였고, 외래적으로는 서학과 청의 문물이 들어왔다. 이 시기 봉건통치자들은 '성명의지', '예론'과 같은 공리공담만을 일삼는 주자성리학을 사상적 도구로 삼고 있었고, 그와 조금이라도 배치되는 것은 서슴없이 말살하였다. 이러한 여러 조건에서 일부 양반 계층의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자성리학과 대립되는 새로운 학풍, 쓸모있는 학문을 연구하며 사물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진리를 탐구한다는 실학사상을 창시하였다. 그들은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현실적 문제들과 자연과학과 기술에 관한 학문,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언어, 문화, 풍습에 대한 학문을 연구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학문에 대한 이러한 '실사구시'적인 태도로부터 주자성리학을 비판적으로 대하고 통치자들의 사대주의에 대한 불만과 민족적 자각을 가지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봉건질서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