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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
[ 연암의 생애(生涯) ]
청년시절의 번민과 『 방경각외전 』
연암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 음력 2월 5일 서울 서소문 밖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박사유(朴師愈)와 함평 이씨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반남박씨(潘南朴氏) 19 세손(世孫)으로, 조선 중종 때 사간(司諫)을 지낸 야천(冶川) 박소(朴紹 1493~1534) 이후 세신귀척(世臣貴戚)을 많이 배출한 명문 거족이었다. 박소의 손자인 오창(梧窓)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은 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한 공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으며, 금계군의 아들로 선조의 사위가 된 분서(,汾西) 박미(朴瀰 1592~1645)를 비롯해서 부마(駙馬)가 된 후손들도 적지 않았다. 한편 반남 박씨가에서는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1~1695)와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 1665~1748) 같은 저명 학자, 박미와 같은 뛰어난 문인들도 배출하였다.
박미의 증손이자 연암의 조부인 장간(章簡)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은 숙종 말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자, 분열된 집안의 당론을 노론으로 이끈 뒤, 신임사화 때 일시 은둔해 있다가 영조 즉위 후 정계에 진출하여, 탕평책에 비판적인 노론측의 일원으로 적극 활동했으며, 관직은 경기감사 참판지돈령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일족인 박필성(朴弼成, 1652~1747)과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이 각각 효종과 영조의 부마인 등으로, 왕실과 깊은 인척 관계에 있어 국왕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그럴수록 척신(戚臣)의 혐의를 피하고자 더욱 근신하며 청렴한 생활을 하여, 사대부 간에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러한 조부와 대조적으로, 연암의 부친 박사유(1703~1767)는 평생을 포의(布衣)로 지냈으며, 부모 밑에서 평범하고 조용한 일생을 보냈다. 따라서 연암의 정신적 성장에는 집안의 기둥이던 조부가 부친보다 훨씬 더 강한 영향을 끼쳤던 듯하다. 연암이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조부 슬하에서 자랐다고 잘못 알려진 것은 아마도 이러한 사정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생각된다.
연암은 열여섯 살 때 전주(全州) 이씨와 결혼한 후, 장인 이보천(李輔天)과 그 아우인 이양천(李亮天)의 지도를 받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학업에 정진하였다. 유안재(遺安齋) 이보천( 1714~1777)은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인 계양군(桂陽君)의 후손으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제자인 종숙부 이명화(李命華)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같은 농암 제자인 어유봉(魚有鳳)의 사위가 되어 그에게서도 사사받음으로써, 우암(尤庵)에서 농암으로 이어지는 노론 학통을 충실히 계승한 산림 처사로 상당한 명망이 있었다. 연암은 이러한 장인으로부터 사상과 처세 면에서 커다란 감화를 받고, 시속(時俗)과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선비의 진정한 본분을 잊지 않는 자세를 배웠다고 한다. 한편 홍문관 교리를 지낸 영목당(榮木堂) 이양천(1716~1755)은 시문(詩文)에 뛰어나, 주로 문학 면에서 연암을 지도했는데, 그에게서 배운 『
사기 』의 심대한 영향은 연암의 작품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20세 무렵부터 연암은 같은 명문가 자제로 절친한 벗인 김이소(金履素). 황승원(黃昇源) 등과 함께 근교의 산사를 찾아 다니며 과거 준비에 전념했다. 1756년에 지은 그의 초기 한시 「원조 대경(元朝對鏡)」에는 학업에 정진하던 당시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그가 봉원사(奉元寺)에서 윤영(尹映)이란 이인(異人)을 만나, 「허생전(許生傳)」의 소재가 된 옛이야기를 들었다는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당시의 연암은 며칠씩이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등 심한 우울증적 증세로 고생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혼탁한 정치 현실과 그에 따른 양반사회의 염량세태(炎凉世態)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품게 되면서, 자신의 장래 거취 문제에 대해서도 번민을 거듭하게 되었던 때문이라 추측된다.
연암의 초기 문학을 대표하는 『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은 이같은 심각한 정신적 상황에서 창작된 것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 「김신선전(金神仙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등 9편의 전(傳)들은, 대부분 연암이 자신의 우울증을 달래기 위해 이야기꾼들을 청해다 시정(市井)의 기이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듣던 과정에서 취재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소재들을 빌려, 연암은 당시 사대부들이 명리(名利)만을 좇아 이합 집산(離合集散)함으로써 양반 사회의 우도(友道)가 타락 일로에 처한 현실을 개탄하고, 비천한 민중과의 사귐에서야말로 도리어 진정한 우도의 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 방경각외전 』은 종래의 인습적인 전과 달리, 떠돌이 거지(「광문자전」)천한 역부(役夫)(「예덕선생전」)영락한 무반(武班)(「민옹전」)불우한 위항인(委巷人)(「김신선전」)무식한 농부(「봉산학자전」) 등 이름 없는 하층 민중들을 입전(立傳)의 주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들의 가식 없고 건실한 삶에 비추어 양반사회의 윤리적 타락상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민중들의 활기찬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한편, 시휘(時諱)에 저촉될 우려가 있는 현실 비판적인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
방경각외전 』은 우리 고유의 속어속담지명 등을 과감하게 구사하기도 하고, 우언(寓言) 형식과 허구적 설화를 차용하기도 한다. 그 결과 『
방경각외전 』은 소설에 근접한 「양반전」과, 전형적인 전인 「우상전」을 양극으로 하여, 표현 형식상 다채로운 양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작임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후일 스스로 『 방경각외전 』을 습작 시절의 유희문자(遊戱文字)로 치부했다고 한다. 사실, 『 방경각외전 』은 당시 문단에 풍미하던 의고주의(擬古主義)의 영향을 받아, 진한(秦漢) 고문(古文)을 모방한 흔적을 짙게 보여 주고 있다. 이를테면 「양반전」에서 “식무도계, 식무선갱, 철무류성, 하저무용, 무이생총(食毋徒髻, 食毋先羹, 歠毋流聲, 下箸毋舂, 無餌生葱)”(상투 바람으로 밥을 먹지 말며, 국부터 먹지 말며, 국을 마실 때 소리내지 말며, 젓가락을 내리면서 상을 찧지 말며, 날 파를 먹지 말며) 운운하며 양반의 식사 예법을 논한 대목은, 바로 『
예기(禮記) 』 「곡례(曲禮)」 상(上)에서 “무단반, 무방반, 무류철……반서무이저(毋摶飯, 毋放飯, 毋流歠……飯黍毋以箸)”(밥을 뭉치지 말며, 밥술을 크게 뜨지 말며, 물 마시듯이 들이마시지 말며……기장 밥을 젓가락으로 먹지 말며) 운운한 대목을 패러디화한 것이다. 또한 연암이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에서, 제공(諸公) 장자(長者)로부터 “고문사(古文辭)”로 칭찬을 받았다고 술회한 대로, 「광문자전」 역시 『
사기 』 「위공자전(魏公子傳)」 「만석군전(萬石君傳)」 「관중전(管仲傳)」 등의 모티프나 문체로부터 적잖은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이렇게 볼 때 『
방경각외전 』은 앞으로 의고주의적 모방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개척해야 하는 과제를 연암에게 제기한 셈이라 하겠다.
이 무렵에 창작된 연암의 초기작 중 또 하나 주목되는 작품은 「총석정 관일출(叢石亭觀日出)」이다. 이 시는 연암이 1765년 가을에 벗인 유언호(兪彦鎬, 1730~1796)신광온(申光蘊: 자 元發, 1735~1785) 등과 금강산 일대를 두루 유람한 후, 총석정에 이르러 동해의 해돋는 장관을 보고 지은 것이다. 당시의 여행이 연암에게 자못 깊은 인상을 주었던 듯, 「김신선전」을 비롯하여 「금학동 별서 소집기(琴鶴洞別墅小集記)」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관재기(觀齋記)」뿐 아니라 『 열하일기 』에서도 거듭 당시의 체험이 회상되고 있다. 7언 70행의 장편 고시(古詩)인 「총석정 관일출」은 하평성(下平聲) 증자(蒸字)의 강운(强韻)을 여유있게 구사하고, 일출과 관련된 각종 고사를 종횡으로 활용하는 기량을 발휘하면서, 아울러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인 표현을 성취한 걸작이다. 장인 이보천과 동서 간인 판서 홍상한(洪象漢, 1701~1769)이 이 시를 보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며, 연암 자신도 득의작(得意作)으로 자부하여 『 열하일기 』에 이를 재수록해 놓았다.
은둔기의 문학론과 산문들
장래의 거취 문제로 오랫동안 번민하던 연암은, 1771년경 마침내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1767년 부친상을 당한 이후부터 시골에 은둔해서 살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1770년(영조 46년) 감시(監試)에서 일등으로 뽑힌 뒤, 영조의 특명으로 입시(入侍)하여, 격외(格外)의 칭찬까지 받아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처지였다. 이러한 그가 회시(會試)에는 응하지 않거나, 마지 못해 응시해서도 시권(詩卷)을 제출하지 않는 등으로 과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드디어는 이를 포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연암이 이같이 과거를 통한 입신 출세를 단념하게 된 데 대해, 『 과정록 』에서는 부친의 장지(葬地) 문제로 인한 분규가 그 원인이었던 것으로 적고 있다. 즉, 연암 집안과 녹천(鹿川) 이유(李濡, 1645~1721)의 후손가 사이에 묏자리를 두고 소송이 벌어져 국왕의 중재로 시비는 가려졌으나, 이로 인해 상대측 상소인(上疏人)이 관직을 물러나게 된 것을 알고 자책하여 자신도 벼슬길을 단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영조 말년의 혼탁한 정국이 더욱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연암의 조부와 장인은 모두 노론계로서, 영조의 탕평책에 대해 노론과 소론의 갈등을 미봉하려는 고식책(姑息策)이라 하여 극력 반대했던 인물들이다. 처숙(妻叔) 이양천도 소론계인 이종성(李宗城)이 영의정에 임명된 조치에 항의하다가 흑산도에 위리 안치(圍籬安置)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연암 역시 탕평책에 적극 호응한 일파들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점차 권귀화(權貴化) 하던 당시의 정치 현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1771년 5월 절친한 벗 이희천(李羲天)이 왕실을 모독하는 기사가 실린 중국 서적을 소지한 혐의로 처형을 당한 충격적인 사건은 그에게 시국에 대해 깊은 혐오를 품게 했다. 그리고 1772년에는 유언호(兪彦鎬)가, 그 이듬해에는 황승원(黃昇源)이 흑산도로 유배되는 등 그의 지기(知己)들이 잇달아 정쟁(政爭)에 휘말려 고초를 겪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하북린과(賀北隣科)」 「염재기(念齋記)」 등 당시 과장(科場)의 타락상을 신랄하게 풍자한 그의 글들로 미루어 볼 때, 연암은 과거를 거쳐 혼탁한 정계에 진출해 본들 선비로서의 포부를 제대로 펼 수 없으리라고 비관(悲觀)했던 듯하다.
과거를 폐한 직후, 연암은 심신을 가다듬을 겸 북으로는 송도와 평양을 거쳐 묘향산까지, 남으로는 속리산가야산단양 등지를 두루 유람했다. 그가 이덕무의 처남인 백동수(白東修: 자 永叔, 1743~1816)와 함께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의 연암동(燕巖洞)을 답사한 후 장차 여기에 은거할 뜻을 굳히고, 자호(自號)를 연암이라 지은 것도 이 당시의 일로 추정된다.
1772년에서 1773년 무렵에 연암은 처자를 경기도 광주 석마(石馬)의 처가로 보낸 뒤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혼자 기거하면서, 홍대용(洪大容)정철조(鄭喆祚)이서구(李書九)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 등과 친밀히 교제하며,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심화해 나갔다. 이 전의감동 은거 시절에 연암은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요약될 수 있는 그 특유의 문학관을 확립하고, 이를 실제의 창작면에 적극 실천하여, 참신한 산문들을 왕성하게 창작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그는 홍대용을 필두로 이덕무 박제가 등 잇달아 중국을 다녀온 측근 인사들과 더불어,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청(淸)의 발전상을 연구하면서, 스스로도 중국 여행에의 꿈을 키워 갔다.
‘법고창신’을 주장한 연암의 문학론은, 일부에서 오해하듯 ‘온고지신(溫故知新)’ 류의 상식적인 주장이 아니라, 명말 청초 중국의 문풍 변화와 그에 영향받은 국내 문단의 흐름에 대한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연암은 명(明)의 제가(諸家)가 법고파와 창신파로 갈리어 다투다가, 둘 다 정도(正道)를 얻지 못하고 함께 말세의 쇄설(瑣屑)로 타락했다고 비판하고 있거니와, 전자는 “문필진한(文必秦漢) 시필성당(詩必盛唐)”을 제창한 이반룡(李攀龍)왕세정(王世貞) 등 소위 전후 칠자(前後七子)를, 후자는 “독서성령(獨抒性靈) 불구격투(不拘格套)”를 강조한 원굉도(袁宏道) 형제 등 주로 공안파(公安派) 문인들을 지칭한 것이다. 그 중 전후 칠자의 의고주의 문학은 선조조(宣祖朝) 이후 윤근수(尹根壽)신흠(申欽) 등에 의해 국내에 적극 소개되었으니, 연암의 선조 박미도 신흠의 문인(門人)으로서 이에 동조했던 당대 저명 문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명(晩明)의 공안파 문학이 뒤이어 유입되고, 청조에 들어서는 특히 의고주의에 맹공(猛攻)을 가한 전겸익(錢謙益)의 문집들이 국내에 소개되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내외 문단의 동향을 배경으로, 연암은 당시 문단에서 ‘법고’ 즉 고문(古文)의 피상적인 모방만을 추구하는 경향과, ‘창신’ 곧 주관적인 개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이 대립하고 있음을 문제시하고, 고문의 외적 형식이 아니라 당대 현실을 진실되게 그리고자 한 그 내적 정신을 본받아, 오늘의 현실을 진실되게 그린 새로운 문학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넓은 의미의 사실주의적 문학관에 입각하여, ‘법고’와 ‘창신’의 한계를 변증법적으로 지양(止揚)하려 한 점에 그의 문학론의 독창성이 있다.
전의감동 시절에 창작된 연암의 많은 소품(小品) 산문들은 이러한 ‘법고창신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기의 산문들은 우선 「수소완정 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답남수서(答南壽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 자신의 성품과 생활상을 해학적이고도 여실하게 그려냄으로써, ‘문중유인(文中有人)’의 경지를 보여 주고 있는 점이 한 특색이다. 또한 이 시기 연암의 산문들은, 더욱 절실한 표현을 위해서라면 종래의 창작 규범에 구애되지 않는 파격성(破格性)도 드러내고 있다. 묘지명의 상투적인 서술 방식을 피하고 인상적인 삽화와 극적 장면을 중심으로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하여, 고인에 대한 애정과 슬픔을 한층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백자 증정부인 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은 그 좋은 예이다. 이와 아울러, 우언의 형식을 빌려 역설적인 주장을 펴고 있는 「영재집서(泠齋集序)」 「낭환집서(螂丸集序)」 등은 당시 연암이 도가나 불교와 같은 이단사상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연암 산문의 파격성은 이러한 사상적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778년 연암은 돌연 전의감동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솔가하여 황해도 금천군의 연암동으로 은둔했는데, 그의 이같은 의외로운 거취에는 곡절이 없지 않았다. 1776년 영조에 뒤이어 세손(世孫)인 정조가 즉위하게 되자, 사도세자에 대한 처벌에 찬성하고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던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는 한편, 세손의 보호와 그 즉위에 공이 큰 홍국영(洪國榮)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하여 국정을 좌우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왕위 교체기의 불안한 정세 속에서 연암은 홍국영 일파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므로, 위기를 감지한 친구들이 그에게 피신할 계책을 세우도록 충고했던 것이다. 게다가, 1777년 장인 이보천이 별세하고, 이듬해에는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맡아 왔던 형수마저 병사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도도 모색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마침내 연암은 이전부터 은둔을 위한 적지(適地)로 물색해 둔 연암동으로 떠나기로 했다.
연암동은 황해도 금천군 화장산(華藏山) 동편 불일봉(佛日峯) 아래에 있는 한 골짜기로서, 송도로부터 삼십 리쯤 떨어진 곳이었다. 동구 왼쪽의 절벽에 항시 제비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하여 제비 바위라는 뜻의 ‘연암(燕巖)’이라 이름지어진 것이다. 이웃집이라고 해야 숯을 구워 살아가는 가난한 민가 몇이 있을 뿐, 호랑이가 출몰하는 대단히 외진 이 산골에, 연암은 초가 삼칸과 돌밭 약간을 장만하고, 손수 뽕나무도 심었다.
그리하여 일단 연암동에 새 생활의 터전을 마련한 연암은 한동안 송도로 나가, 그곳 유지인 양호맹(梁浩孟)의 금학동(琴鶴洞) 별장에 머물면서, 그의 고명을 듣고 찾아온 한석호(韓錫祜: 호 蕙畹, 1750~1808) 등 청년 문사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그 후 다시 연암동으로 돌아온 연암은 그를 따라온 송도의 문하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사색하고 집필하는 정진(精進)의 나날을 보내었다. 이 무렵에 지은 시 「산중 지일 서시이생(山中至日書示李生)」을 보면, 문생들을 가르치며 은거하던 그의 외로운 산중 생활이 잘 드러나 있다. 『 열하일기 』와 더불어 연암이 저술한 또 하나의 대표적 경세(經世) 문자인 『
과농소초(課農小抄) 』는 바로 이 연암동 은거시절에 그가 국내외의 농서(農書)를 두루 구해 읽고 초록해 두었던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중국 여행과 『 열하일기 』
한동안 혼미하던 정국이 1780년(정조 4년) 2월 홍국영의 급작스러운 실각과 더불어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연암은 칩거해 있던 산중으로부터 상경하였다. 그때 마침 삼종형(三從兄) 박명원이 중국 사행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그는 숙원이던 연행(燕行)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해 5월 조정에서 청나라 건륭(乾隆) 황제의 고희(古稀)를 축하하기 위해 박명원이 인솔하는 특별 사행을 파견했는데, 여기에 연암은 정사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사행(使行)은 6월에 압록강을 건넌 뒤, 만주 일대를 거쳐, 8월 초 북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북경에 도착한 뒤 뜻밖에도 당시 건륭황제가 머물고 있던 열하(熱河) 행궁(行宮)의 만수절(萬壽節) 예식에 참석하라는 특명이 하달되어, 삼사(三使)를 위시한 사행의 일부가 황급히 그곳으로 떠나야만 하게 되었다. 이에 연암은 이전의 조선 사행이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열하 일대를 여행하는 천재 일우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열하는 중국 하북성(河北省) 동북부의 무열하(武烈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는 국경도시로서, 건륭황제가 이곳에 거대한 별궁을 완성하고 거의 매년 방문하여 체류하면서부터 북경에 버금가는 정치적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청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그의 치세 중에 열하는 황제를 알현하러 모여든 몽골티베트위구르 등지의 외교 사절들로 일대 성시를 이루었는데, 조선 사행이 처음으로 이곳을 찾은 1780년에는 티베트 불교의 영도자인 판첸 라마(班禪喇嘛)의 역사적인 방문이 있었다. 그리하여 연암은 당시의 조선인으로서는 전인 미답의 열하를 방문하게 된 데 더하여, 판첸 라마와 티베트 불교에 대해 견문할 수 있는 희귀한 기회까지 얻게 되었다.
한편 연암은 열하 체류 중에 숙소인 태학(太學)에서 청의 전 대리시경(前代理寺卿) 윤가전(尹嘉銓: 호 亨山, 1711~1781), 거인(擧人) 왕민호(王民皥: 호 鵠汀) 등과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며, 중국 고금의 역사정치학술문예음악천문풍속 등 광범한 주제를 놓고 필담을 나누었다. 이를 통해 연암은 주자학에서 고증학으로 옮아가던 당시 청조의 학풍이라든가 만주족의 지배에 대한 한인(漢人)들의 저항의식 등을 간취(看取)할 수 있었으며, 몽골과 티베트 등 주변 민족들의 동향과 청조의 대외 정책에 대해서도 식견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그는 중국의 식자들에게 조선의 높은 문화 수준을 알리고자 노력했으며, 그 일환으로 종래의 천문학설에 맞서 김석문(金錫文, 1658~1735)과 홍대용이 주장한 바 지구 자전설(地球自轉說)을 소개하여 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필담을 통해 연암의 학식에 감탄한 왕민호는 그를 가리켜 ‘해상(海上)의 이인(異人)’이라고까지 칭송하였다.
건륭황제의 만수절 행사에 참여한 후 조선 사행은 열하를 떠나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약 한 달 간 머물다가, 9월 중순 북경을 출발하여 그 해 10월 말 서울에 도착했다. 북경 체류 중에 연암은 자금성(紫禁城)과 유리창(琉璃廠) 등지를 두루 관광했을 뿐 아니라, 서천주당(西天主堂)을 방문하여 서양 벽화를 감상하는가 하면,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의 묘를 구경가기도 했다. 또한 유명한 유리창(琉璃廠)의 서사(書肆)에서 한림(翰林) 초팽령(初彭齡)거인(擧人) 유세기(兪世琦) 등과 만나 교분을 맺었다.
귀국 즉시 연암은 중국 여행 중에 써 두었던 방대한 원고를 정리편집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수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아마도 1783년경에는 일단 탈고하여 이를 ‘열하일기’라는 표제로 세상에 내놓았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도강록(渡江錄)」 이하 「금료소초(金蓼小抄)」에 이르는 총 25편의 체제를 갖추기까지는 저자 자신에 의한 그 후 여러 차례의 수정보완 작업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 열하일기 』는 연암이 이를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그 중 일부 원고들이 유출되어 널리 전사(傳寫)되었을 정도로, 당시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그의 작가적 명성을 드높여 주었다. 반면에 그의 족손(族孫)인 박남수(朴南壽: 자 山如, 1758~1787)가 비록 취중이긴 했지만 연암이 낭독하던 『 열하일기 』 원고를 빼앗아 불사르려 한 적이 있었다는 일화에서 엿볼 수 있듯이, 보수적인 문인들로부터의 비판적인 반응도 만만치 않았던 듯하다.
내용상으로 볼 때 『 열하일기 』는 청조 중국의 현실에 대한 연암의 견문과, 이에 기초하여 전개된 그의 북학론(北學論)으로 이루어져 있다. 『 열하일기 』에서 연암은 청조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다각도로 생생하게 증언하면서, 그 이면에 한인(漢人)의 민족적 저항과 몽골티베트 등 주변 민족들의 발호(跋扈)를 제압하려는 청조의 고심에 찬 노력이 경주되고 있음을 통찰하고 있는가 하면, 벽돌과 수레의 사용 등 조선의 낙후된 경제 현실을 타개할 구체적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연암의 견문과 북학론은 그의 독특한 인식론과 탁월한 문예적 기량에 의해 뒷받침됨으로써, 존명배청주의(尊明排淸主義)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 사람들을 향해 커다란 계몽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 열하일기 』에서 연암은 선입견과 감각에 좌우되지 않는 주체적 사고와 현실 세계를 편견 없이 탐구하려는 개방적 자세를 강조하고 있으며, 인식의 상대성(相對性)을 철저히 자각한 위에서 관점의 대담한 전환을 통해 자기 중심적인 편협한 사고로부터 탈피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청조 문물의 발달을 가져온 배후의 추동력(推動力)으로서 당시 중국인들의 철저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을 배울 것을 주장한 ‘중국 제일 장관론(中國第一壯觀論)’은 이같은 인식론을 구체화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 열하일기 』에서 연암은 고문(古文)의 문체와 소설식 문체를 망라한 다채로운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 특히 정통 고문에서 금기시(禁忌視)하는 백화체(白話體)와 조선식 한자어속담 등을 적극 구사한 것은, 이국적(異國的)인 체험을 한층 실감나게 하고 해학적인 효과를 거두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한 그는 집권 사대부의 위선과 무능을 비판하기 위한 방편으로 「호질(虎叱)」과 「옥갑야화(玉匣夜話, 일명 許生傳)」에서처럼 우언 형식을 빌리기도 하고, 진지한 사상적 논의들 사이에 돌연 해학담(諧謔談)을 삽입하여 활기를 불어넣는 수법도 즐겨 취하고 있다. 『 열하일기 』의 또 다른 문예적 특징은 대화 중심의 극적(劇的)인 장면 묘사와 복선 설정에 의한 유기적 구성, 그리고 정밀한 세부 묘사를 추구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소설적 형상화 수법을 통해 연암은 여행 도상에서 마주친 이국 풍물과 인간군상(人間群像)을 독자의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해 내는 놀라운 기량을 보여 주고 있다.
안의(安義)현감 시절과 『 열하일기 』문체 파동
1786년 연암은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에 임명됨으로써 나이 쉰에 비로소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벗 유언호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천거한 덕분이라고 한다. 이후 그는 평시서 주부로 승진했으며 다시 의금부 도사로 전보되었다가, 제릉령(齊陵令)을 거쳐 1791년에는 한성부 판관이 되었다. 이와 같이 반남 박씨가의 저명 문인인 연암이 뒤늦게나마 관계(官界)에 진출하자, 소시적부터 교분이 있던 심환지(沈煥之, 1730~1802) 등이 찾아와 자파로 끌어 들이려 했으나, 연암은 그들의 권유를 완곡히 거절했다. 그리고 음관(蔭官)을 대상으로 한 과거에도 번번이 불응함으로써, 출세에는 뜻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제릉령으로 있을 적에 지은 시 「재거(齋居)」에서 연암은 말단 벼슬아치로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자신의 모습을 자못 해학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오랜 가난과 은둔의 생활을 청산하고 출사(出仕)하게 된 이 시기에, 연암은 한편으로 친지와 우인들이 잇달아 사거(死去)하는 불행과 슬픔을 겪어야 했다. 1781년 정철조가 병사하고, 1783년에는 홍대용이 별세했다. 1787년에는 아내에 이어, 형님 박희원(朴喜源)이 사망하고, 그 이듬해에는 맏며느리의 상을 당했으며, 1790년에는 연암을 누구보다 아껴주던 삼종형 박명원이 서거했던 것이다. 절친했던 벗들의 죽음을 애도한 「제정석치문(祭鄭石痴文)」과 「홍덕보 묘지명(洪德保墓誌銘)」, 생전의 형님을 추모한 시 「억선형(憶先兄)」, 그리고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지은 「삼종형 금성위 증시충희공 묘지명(三從兄錦城尉贈諡忠僖公墓誌銘)」 같은 작품들은 이러한 불행을 맞이한 연암이 자신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명작이다.
1791년(정조 15년) 12월 연암은 경상도 안의(安義) 현감에 임명되어, 이듬해 정월 안의에 부임했다. 그로부터 1796년 3월 임기가 만료되어 그곳을 떠날 때까지의 5년 간은 연암의 불우했던 생애 가운데 비교적 행복하고 득의에 찬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의는 영호남의 경계에 위치한 지리산 중의 작은 고을로서 거창군과 함양군을 이웃에 두고 있었으며, 당시 인구는 오천여 호였다. 이곳은 ‘화림(花林)’이라고도 불리웠을 만큼 산수 자연이 아름다운 고장이었으나, 무신년(戊申年)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적극 호응하여 한동안 혁파(革破)된 적이 있었으며, 그 여풍으로 연암이 부임하던 당시에도 민심이 사납고 교활하며, 도적이 극성하고 아전들의 농간이 심했다고 한다.
이러한 고을의 수령이 된 연암은 부임 즉시 엄정한 판결로 송사(訟事)를 처리하여 백성들 간에 분쟁을 일삼던 풍조를 바로잡고, 아전들의 상습적인 관곡(官穀) 횡령을 근절했다. 또한 그는 제방(堤防) 공사를 효율적으로 완수하는가 하면, 자신의 녹봉을 털어 수많은 기민(飢民)을 구제했다. 이같은 선정 외에도 연암은 공장(工匠)으로 하여금 자신이 중국 여행 중에 주의 깊게 관찰한 바 있던 용미거(龍尾車) 등 선진적인 농기구들을 제작케 하여 시험해 보았으며, 관아의 빈 터에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등 정각을 짓고 담을 쌓을 때도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벽돌을 썼다고 한다.
또한 연암은 삼종질(三從姪)인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이 우의정에 임명되자, 그에게 축하 편지를 보내면서, 아울러 안의현에서 시노(寺奴)들이 노비공포(奴婢貢布)의 과다한 징수로 시달리고 있는 실태를 전하고, 이러한 폐단의 전국적인 시정(是正)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벗 김이소가 우의정에 오른 것을 축하한 편지에서도, 화폐 유통을 바로잡고, 은(銀)의 국외 유출을 막는 문제에 대한 일가견을 피력하여, 국정(國政) 개혁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과 식견을 보여 주었다.
한편 연암은 공무의 여가를 틈타 이재성(李在誠). 박제가. 윤암(綸菴) 이희경(李喜經 1745~1805). 한석호 등 우인과 문생들을 초빙하여, 새로 지은 정각에서 문주(文酒)의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는 쇠퇴해진 관아의 기악(妓樂)을 재건하기에 힘썼으며, 경암(警菴)과 역암(櫟菴) 같은 지리산 중의 승려와도 왕래가 있었는데, 서울과 송도 등지에서 찾아온 우인 문생들을 대접하는 자리에는 기악을 곁들이고 산승(山僧)을 참여케 하여 운치를 돋우었다고 한다. 이처럼 비교적 여유있고 안정된 안의 현감 시절에 연암은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여, 연이어 주옥같은 작품들을 써 내었다.
그 중 「홍범우익서(洪範羽翼序)」는 안의 출신의 학자 우여무(禹汝楙, 1595~1657)의 유저(遺著)인 『 홍범우익 』에 부친 서문으로, 오행(五行)이란 이용 후생의 수단을 다섯 가지 범주로 총괄한 것이라는 독창적인 해석에 입각하여, 종래의 미신적인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을 타파한 명문이다. 「양반전」 등과 함께 연암의 대표적 소설의 하나로 간주되어온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烈女咸陽朴氏傳幷序)」는 안의 고을 아전 집안의 한 여성이 함양으로 시집 갔다가 요절한 남편을 따라 순절한 사실을 기록한 전이지만, 본전(本傳) 앞에 덧붙인 서문에서 여성의 순절을 비인간적인 풍습으로 비판한 진보적 윤리관을 교묘하게 피력하고 있을 뿐더러 고독한 과부의 내면 심리를 섬세하고도 호소력 있게 묘사하고 있어, 표현과 주제면에서 모두 특이한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안의 시절의 문학적 성과로서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은 유명한 합천 해인사를 구경하고 지은 5언 198행의 장편시 「해인사」이다. 연암은 비록 과작(寡作)이긴 했으나 그 나름의 독특한 경지를 보여 주는 우수한 시들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초기작인 「총석정 관일출」과 더불어 그 탁월한 사실적 자연 묘사에서 연암의 시세계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여유있는 환경에서 난숙기에 달한 자신의 창조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던 안의 시절에 연암은 뜻밖에도 『 열하일기 』의 문체로 인한 일련의 파동을 겪게 되었다. 당시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의 설치, 과거 문체에 대한 규제, 청으로부터의 최신 서적 수입 금지 등 여러 조치들을 통해 ‘문체반정(文體反正)’ 즉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는다는 보수적인 문예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1792년 정조는 측근의 문신(文臣)과 성균관 유생 중 순수한 고문체(古文體) 대신 최근 유행하고 있는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를 구사하고 있는 자들을 적발하여 직함이나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고, 순수한 고문체로 속죄문(贖罪文)을 지어 바치게 했다. 정조의 이같은 조치는 이듬해 박제가와 이덕무에 이어, 멀리 안의에 있던 연암에게까지 미쳤다. 당시 규장각 문신인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의 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한 하교(下敎)에서, 정조는 문단에 새로운 소설식 문체를 유행시킨 장본인으로 연암과 그의 『 열하일기 』를 지목하여 엄중 문책함과 동시에, 문체반정책에 적극 호응한다면 특별히 중용하겠다는 뜻을 비쳤던 것이다.
이에 연암은 『 열하일기 』의 문체에 대한 변명과 반성의 뜻을 담은 정중한 답서를 남공철에게 보내었으나, 정조의 견책 처분을 받았던 여러 문인들이 다투어 속죄문을 바친 것과는 달리 더 이상의 대응을 하지는 않았다. 국왕의 견책을 감수하고 근신해야 마땅한 터에 새로 글을 지어 바친다면 이전의 허물을 가리려는 짓이요 분수 밖의 영달을 바라는 셈이 되므로, 재차 하교가 있으면 마지 못해 응하여 구작(舊作) 몇 편을 진상함으로써 신하된 도리를 지킬 뿐이라는 것이 당시 연암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정조도 남공철이 바친 연암의 편지를 읽고 나서, 미려(美麗)하고 공교로운 표현으로 사죄의 뜻을 나타낸 그의 문학적 재능에 감탄하여 속죄문 진상(進上)의 건(件)을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아무튼 정조가 속죄문의 진상을 재촉하지 않았으며, 연암 역시 적극 호응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연암이 정조의 하교를 끝내 받들지 않았다는 설도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연암이 『 열하일기 』의 문체로 인해 정조의 견책을 받고 대응에 부심하던 바로 그 무렵에, 수령인 그가 오랑캐의 옷을 입고 고을 백성들 앞에 나다닌다는 유언비어와 함께 『 열하일기 』에 대해서도 오랑캐의 연호(年號)를 쓴 글이라는 비방이 야기되어 심각한 물의를 빚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의관(衣冠) 제도 중 몽고의 호속(胡俗)을 답습한 것들을 고례(古禮)에 따라 개혁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연암은 안의 부임을 계기로 관아에서 고제(古制)에 따른 옷을 입어 보곤 했는데, 그러잖아도 정각 신축에 벽돌을 사용하여 오랑캐 제도를 따른다는 의혹을 사고 있던 차 이웃 고을 수령이 이를 빌미로 ‘호복임민(胡服臨民)’의 설을 지어 서울에 퍼뜨렸다는 것이다. 이같은 모함은 반청(反淸) 감정이 여전히 팽배해 있던 당시의 사회 풍조에 편승해서 상당히 주효했으며, 마침내 『 열하일기 』에 대한 비방으로까지 비화했다. 즉 『 열하일기 』는 망한 명나라의 숭정(崇禎) 연호를 쓰지 않고 강희(康熙)니 건륭(乾隆)이니 하는 청의 연호를 그대로 썼으므로 명에 대한 의리를 망각하고 오랑캐인 청을 추종한 ‘노호지고(虜號之稿)’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방 사건이 야기된 것은 당시 저명 문인의 한 사람이던 유한준(兪漢雋: 호 蒼厓著菴, 1732~1811)과 연암 간의 불화와 관련이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 척화파(斥和派)였던 유황(兪榥)의 후손인 유한준은 강경한 존명 배청주의자였으며, 진한(秦漢) 고문을 모범으로 삼는 의고주의자(擬古主義者)로서 나중에는 성리학적 문학관에 귀의했으므로, 연암과는 사상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대립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연암이 문체로 인해 정조의 견책을 받게 되자 때마침 나도는 유언비어에 가세하여 『 열하일기 』에 대해 그같은 비방 여론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당시 연암이 처남 이재성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가 이러한 모함과 비방으로 인한 물의를 우려하면서도 이에 위축되지 않고 결연히 맞서 자신의 북학론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면천(沔川) 군수 시절과 『 과농소초(課農小抄)』
1796년 3월 안의 현감의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온 연암은 제용감(濟用監) 주부의금부 도사의릉령(懿陵令)을 거쳐, 이듬해 7월 충청도 면천(沔川 현 충남 당진) 군수로 나가게 되었다. 연암은 이곳에서도 안의 시절과 마찬가지로 극심했던 쟁송(爭訟)을 진정시키고, 흉년에는 녹봉을 털어 기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충청도 일대에 천주교가 성행하여 면천군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나, 연암은 천주교도로 적발된 자들을 엄벌에 처하는 대신 유교의 인륜 도덕으로 반복 설득하여 개심토록 한 후 방면했다. 이러한 온건한 대책이 주효하여 자수하는 자가 속출했으며, 연암은 백성들이 운집한 가운데 훈시한 후 그들이 바친 천주교 책자와 예수 화상을 소각했을 따름이라 한다. 당시 충청감사에게 보낸 편지들에서도, 연암은 관에 자수한 천주교도들을 다시 중죄로 다스리는 것이 부당함을 역설했다.
한편 연암은 성 동쪽의 언월지(偃月池)라는 황폐한 못을 준설하여 주변 수백 경(頃)의 농토가 관개의 혜택을 입게 했으며, 아울러 못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고 그곳에 정자를 지어 경관을 꾸몄다. 건곤일초정(乾坤一艸亭)이라 이름지은 이 정자로 공무의 여가에 선유(船遊)를 갈 적마다 연암은 아들 혜전(蕙田) 박종채(1780~1835)와 함께 인척인 지산(芝山) 유화(柳訸 1779~1821)를 데리고 가서, 그들과 담소하는 가운데 날카로운 해학으로 깊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성균관 유생으로 면천에 유배왔던 유화는 연암으로부터 받은 감화를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하며, 이같은 연고로 후일 그는 연암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의 학문을 지도하게 된다.
면천군수 시절에 연암은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와 아울러 『 과농소초 』라는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조는 『 열하일기 』의 문체를 문제삼아 연암에게 견책 처분을 내렸으나, 이는 문체반정책에 부응할 것을 기대하는 회유의 뜻도 함축한 것이었다. 정조는 그 후에도 이덕무가 병사하자 특별히 연암에게 그의 행장을 지으라고 어명을 내리는 등, 노론 명가의 후예요 문단의 거물인 연암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그 일환으로 정조는 면천 군수로 임명된 연암이 사은차(謝恩次) 입시했을 때, 당시 제주 사람 이방익이 해상 표류 끝에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가 극적으로 귀환한 사건을 친히 설명하고 이를 문자화 하도록 지시했다. 「서이방익사」는 이러한 어명에 따라 면천에 부임한 직후 지어 바친 글로서 정조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 과농소초 』는 1799년 봄 농업 장려를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한다는 정조의 윤음(綸音)을 받들어 진상한 저술로, 일찍이 연암동 은둔 시절에 마련해 둔 국내외 농서의 초록에다 중국 여행 중 관찰한 선진적 농법과 농기구에 관한 지식을 첨가한 것이다. 연암은 여기에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덧붙여, 안의 현감 이래 지방 수령으로서의 다년간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농업 문제의 근본 모순을 토지 소유의 제한을 통해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
과농소초 』에 대해 정조는 좋은 경륜 문자를 얻었다고 칭찬하면서 장차 농서대전(農書大全)의 편찬은 연암에게 맡겨야 되겠다고까지 말했으며, 규장각의 문신들 사이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진상된 수백 종의 농서 중 “세상에서는 유한준과 박지원의 작품을 가장 저명하다고 보지만, 유한준은 문장이 기묘하고 웅장하나 실무에 어둡고, 박지원은 속어를 섞어 써서 자못 염증이 난다”는 남공철의 평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
과농소초 』에 의연히 남아 있는 연암 문학의 특질 때문에 일각에서는 비판도 없지 않았던 듯하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연암은 문예의 말기(末技)로써 누차 은교(恩敎)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에 보답하지 못했다 하여, 상도(常度)를 넘어 몹시 애통해 했다. 후일 누군가가 선왕(先王)의 관심이 그처럼 두터웠는데도 적극 호응하지 않았던 이유를 묻자, 연암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생전에 정조는 직접 교명(敎命)을 내린 적이 없고 매번 다른 사람을 통해 뜻을 비쳤을 뿐인즉, 출처(出處)란 인신(人臣)의 대절(大節)이기에 그렇게 위곡(委曲)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여 머뭇거리다 말았노라고.
양양(襄陽) 부사 이후의 말년
1800년(순조 즉위년) 8월 연암은 강원도 양양(襄陽) 부사로 승진했다. 음관(蔭官)으로 양양 부사에 임명되기는 연암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양양은 동해에 임하여 바닷바람이 거세고 산들은 하늘을 찌를 듯이 험준한 고을이었는데, 임금의 관(棺)을 만드는 데 쓰이는 황장목(黃腸木)이라는 질 좋은 소나무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했다. 부임 직후 정조의 장례에 쓸 소나무를 벌목하는 부역이 내리자, 연암은 진영(鎭營)의 교졸(校卒)들이 도벌 방지를 구실로 갖은 횡포를 부리던 짓을 엄단했을 뿐 아니라, 전임자들처럼 진상하고 남은 목재를 챙기지 않고 모두 거두어 다리를 만드는 데 쓰도록 했다. 이와 아울러, 그는 한심한 지경에 이른 환정(還政)을 바로잡고자 자신의 녹봉을 털어 축난 관곡을 솔선해서 보충했다. 그러자 이에 감동한 아전들이 힘을 다해 배상하고 고을 부민(富民)들이 협조하여 마침내 부고(府庫)가 채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 봄 연암은 관직에서 사임했다. 당시 양양 신흥사(新興寺)의 중들이 궁속(宮屬)들과 결탁하여 절에 역대 임금들의 유품을 봉안하고 있는 양 꾸민 뒤, 그 위세로 수령들을 모함하는가 하면, 백성들을 침탈하고 구타 살상하는 등 행패가 자심했으므로, 연암은 강원감사에게 보고하여 그 중들을 징치(懲治)하고자 했다. 그러나 감사가 지극히 미온적인 태도로 나았기 때문에, 부임한 지 일년도 채 안 되어 노병(老病)을 핑계로 사직하고 만 것이다.
순조 즉위 후의 정국은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그 일족인 경주 김씨 세력의 주도 하에 시파(時派)에 대한 벽파(僻派)의 공격이 개시되고, 천주교도에 대한 일대 탄압이 벌어지는 등 극도로 경색되어 갔다. 그 무렵 이조판서호조판서 등에 중용된 이서구가 누차 관직에 복귀할 것을 권했으나 연암은 굳이 사양하고, 서울 북촌 가회방(嘉會坊) 재동(齋洞)의 ‘계산초당(桂山草堂)’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는 길을 택하였다. 이 계산초당은 그가 안의 현감을 지낸 뒤 일시 산직(散職)에 있을때 장차 귀전저서(歸田著書)할 요량으로 매입한 과수원에다 벽돌을 사용하여 지은 집이었다. 이 집에는 처음에 이재성이 이사와, 아들 순계(醇溪) 이정리(李正履 1783~1843), 염재(念齋) 이정관(李正觀 1792~1854) 형제를 가르치며 지냈으므로, 연암은 매일같이 찾아와 그와 더불어 경제민국지사(經濟民國之事)를 논했다고 한다. 그 후 수년이 지나 양양 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연암이 자제를 데리고 여기에서 노후를 보내게 된 것이다. 그의 사후 손자 박규수가 태어나 평생토록 지키고 산 집도 바로 이 계산초당이었다.
연암은 일찍이 녹천 이유의 후손가와 묏자리 소송 끝에 부친의 묘소를 임시로 마련한 뒤, 장차 길지(吉地)를 얻어 이장할 계획을 줄곡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간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양양부사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1802년 겨울에야 비로소 숙원 사업에 착수할 여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조부와 부친의 묘를 경기도 포천으로 이장하려던 연암의 계획은 공교롭게도 유한준의 방해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말았다. 유한준은 연암이 새로 부조(父祖)의 묘를 쓴 자리가 자기네 선영이라 주장하며 관을 들어내고, 바로 근처에 자기 종친의 묘를 이장해 버렸던 것이다. 연암은 이같은 뜻밖의 참변을 당하여 소송을 하려 했으나 유한준이 불응할뿐더러, 그의 소행이 묏자리에 대한 욕심보다는 이를 기화로 하여 경주 김씨 세력에 기대어 묵은 유감을 풀려는 앙심에서 나온 것을 알고는, 마침내 그 이듬해 다시 부조의 묘를 양주(楊州)로 이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면천 군수 시절 이래의 지병인 풍비(風痺)가 1804년 여름 이후 더욱 위중해졌다. 그러나 연암은 죽음을 예감한 듯 약을 물리치고 더 이상 들지 않았으며, 자제에게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지시했다. 또한 선조 박필주의 문인이자 장인 이보천의 친구였던 선배 윤득관(尹得觀)과 일찍이 상의했던 대로 면포로 된 심의(深衣)를 수의(壽衣)로 쓸 것과, 홍대용의 상(喪) 때와 마찬가지로 반함(飯含)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병석에 눕게 된 그는 종종 이재성과 이희경을 불러 술상을 마련하고는 이들의 대화를 곁에서 듣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고 한다.
1805년(순조 5년) 10월 20일(음력) 연암은 재동의 계산초당에서 향년 69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장지는 경기도 장단(長湍) 송서면(松西面) 대세리의 선영으로, 그 해 12월 부인 이씨 묘에 합장되었다. 손자인 박규수가 우의정으로까지 현달(顯達)한 덕분으로, 후일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문도(文度)’의 시호(諡號)가 내렸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연암은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입신 출세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포기하고 재야의 한사(寒士)로 살아가려는 어려운 결단을 했다. 또한 그는 중국 사행에 따라 나섰던 당시 대부분의 문사들처럼 단순히 ‘상국(上國)’을 관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사의 중심지에서 천하의 대세를 가늠하고 청의 발달한 문물 속에서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큰 뜻을 품고 사행에 참여하여, 그 성과로 『 열하일기 』라는 대저(大著)를 남겼다. 그리고 뒤늦게 관직에 나아가서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선정을 펴려고 노력했으며, 보수적인 시류에 맞서 자신의 문학적 사상적 진보성을 견지하고 발전시키려 애썼다. 이렇게 볼 때 연암은,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시대적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한 개인으로서의 지식인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성실하고도 양심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체반정책에 따른 정조의 견책 처분이나, 유한준과 같은 문인들의 비방과 모함에서 볼 수 있듯이, 연암의 진보적인 문학과 사상은 당대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날로 반동화되어 가던 정조 말 순조 초의 암울한 정세 속에서 연암은 『 열하일기 』 중 물의를 야기할 성 싶은 부분들을 손질해야 할 만큼 조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신유사옥(辛酉邪獄)에 걸려 유배형에 처해진 박제가의 경우가 단적으로 보여 주듯이, 연암을 구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던 진보적 지식인 그룹도 하나의 학파나 정파로 뻗어나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다. 그 후 연암의 문학과 사상은 가학(家學)으로서 그의 손자인 박규수에게 전승되었으나, 우의정까지 지낸 그로서도 조부의 문집을 공간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시절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소위 개화를 추구하게 된 20세기 초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의 문학과 사상은 선구적인 유산으로서 적극적인 평가를 받기에 이르지만, 그때 이미 조선왕조는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연암의 대표적인 저술은 『 열하일기 』와 『 과농소초 』이다. 여기에서 그는 벽돌과 수레 등 청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 수용할 것을 주장하고 선진적인 중국의 농법 및 농기구를 소개했으므로,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김택영(金澤榮)의 『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 』에서는 그를 중국의 당송 팔가(唐宋八家)에 비견되는, 고려 이래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문가(古文家)의 한사람으로 꼽았다. 그러나 연암은 고문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소설식 문체와 조선 고유의 속어속담지명관명 등을 구사하여 ‘기기(奇氣)’와 ‘기변(奇變)’이 넘치고 민족문학적 개성이 뚜렷한 산문들을 남겼다. 오늘날 『
방경각외전 』 중의 「양반전」, 『 열하일기 』 중의 「호질」과 「허생전(옥갑야화)」, 그리고 안의 현감 시절 작품인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 등은 한문소설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조선후기 소설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비록 과작이기는 하지만, 「총석정 관일출」과 「해인사」 등 그의 한시도 탁월한 사실적 자연 묘사를 보여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법고창신’을 종지(宗旨)로 한 그의 문학론은 시대착오적인 모방을 일삼는 의고주의(擬古主義)를 비판하고, 당대 조선의 현실을 참되게 그린 문학을 창조할 것을 역설한 점에서, 근대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 문학론의 선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암이 성취한 이와 같은 문학적 사상적 위업은 19세기 조선의 정치사상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박규수를 통해 계승되어 김윤식(金允植)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의 중심 인물들에게까지 전수됨으로써, 우리나라의 근대문학과 근대사상의 한 원류(源流)를 이루게 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박규수의 감화를 받아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되었다는 유길준이 다름 아닌 유한준의 5대손이라는 점이다. 연암과 유한준 간의 뿌리깊은 반목과 묏자리 분쟁 이후 두 집안은 대대로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지만, 근대사의 격랑(激浪)은 양가의 후손들로 하여금 구원(舊怨)을 잊고 사제지간으로 만나 같은 길로 나아가도록 강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연암과 박규수, 그리고 박규수와 개화파의 관련 양상을 면밀하게 규명한다면, 연암의 문학과 사상이 지닌 역사적 의의와 근대성이 더욱 깊이 있게 드러날 수 있으리라 본다.
<박지원-북학을 주창한 근대 리얼리즘의 선구자(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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