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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빛나는 조상

  고려 명신 박상충 첫 족보와 박미 성리학자 박세채 사변록과 박세당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노강서원과 박태보개화사상의 실천자 박규수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태극기와 박영효
독립운동가 박찬익 청백리 공신(功臣) 암행어사
 
 



[ 암행어사 (暗行御史) ]
조선시대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면서 악정(惡政)을 규명하고 민정을 살핀 임시관직인 암행어사는 우리 반남박씨 문중에서 최초의 암해어사는 야천할아버지(문강공) 박소(朴紹) 어른을 비롯 23분의 암행어사가 계시고, 특히 박태상(朴泰尙)과 박정양(朴定陽) 어른은 2번을 암행어사로 출도(出道)하시었다. 총 25회를 암행어사로 출도(出道)한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朴   紹)
평안도

박응남(朴應男)
평안도

박동열(朴東說)
 함경도

   정(朴   炡)
전라도

   황(朴   潢)
황해도

박세성(朴世城)
평안도

박세당(朴世堂)
황해도

박태상(朴泰尙)1
전라도

박태상(朴泰尙)2
 함경도

박태보(朴泰輔)
 전라도

박태만(朴泰萬)
어사

박필명(朴弼明)
함경도

박사성(朴師聖)
어사

박사창(朴師昌)
 공홍도

박사해(朴師海)
 결성(홍성)

박사륜(朴師崙)
 제주

박우원(朴祐源)
호서

박윤수(朴崙壽)
 광주죽산 양성

박규수(朴珪壽)
경상좌도

박선수(朴瑄壽)
경상도

박제문(朴齊聞)
 경기도

박제관(朴齊寬)
경기도

박정양(朴定陽)1
경상도

박정양(朴定陽)2
동래

박영교(朴泳敎)
 전라도

우리 선조들이 암행어사로 출도(出道)한 지역별로 보면 전라도 5회, 경상도 4회, 경기도 3회, 평안도 3회, 함경도 3회, 충청도 2회, 황해도 2회, 제주도 1회 지역불명 2회 등 총 25회 출도(出道)하시었다. 한편 암행어사 23 명을 파별로 보면 야천할아버지를 비롯 야천후손이 22명인데 (서포공 7명, 오창공 4명, 참봉공 3명, 남일공 2명 길주공 2명,남곽공 1명 반성부원군 1명 도정공 1명)이고 세양공 후손이 1명이다.
안핵어사(按覈御史) ·순무어사(巡務御史) 등 지방에 변고가 있을 때 왕명으로 파견하는 어사와는 달리, 이들의 임명과 임무는 일체 비밀에 붙여졌다. 조선 초기의 기록에 밀견(密遣) ·잠행체찰(潛行體察) ·암행규찰(暗行糾察) 등의 기사가 보여 이것이 암행어사의 전신인 것으로 보이나, 이 용어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4월 암행어사를 각 도(道)에 보내다”라고 기록된 1509년(중종 4)의 《중종실록》이다. 그러나 선조 때까지는 암행어사에 대한 비판이 강하여 별로 파견하지 못하다가, 인조 때부터 점차 제도화되었다. 이에는 대간(臺諫) ·옥당(玉堂) 등의 젊은 조신(朝臣)을 국왕이 직접 임명하여 봉서(封書) ·사목(事目) ·마패 ·유척(鍮尺) 등을 수여하였는데, 남대문을 나서야 뜯어보게 되었던 봉서에는 누구를 무슨 도의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신분표시와 임무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사목은 암행어사의 직무를 규정한 책이고, 마패는 역마(驛馬)와 역졸(驛卒)을 이용할 수 있는 증명이며, 유척은 검시(檢屍)를 할 때 쓰는 놋쇠의 자[尺]이다. 이들이 행차할 때는 선문(先文:지방에 출장할 때 관리의 도착날을 그 지방에 미리 통지한 공문)을 사용하지 않고 미복(微服)으로 암행하여 수령의 행적과 백성의 억울한 사정 등 민정을 자세히 살펴, 필요할 경우에는 출도(出道:露蹤)하여 그 신분을 밝힌다. 비위(非違) ·탐오(貪汚) 등 수령의 잘못이 밝혀지면그 죄질에 따라 관인을 빼앗고 봉고파직하여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임시로 형옥(刑獄)을 심리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임무가 끝나면 서계(書啓:繡啓)에 수령의 행적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별단(別單)에 자신이 보고들은 민정과 효자 ·열녀 등의 미담을 적어 국왕에게 바쳐 지방행정의 개선을 촉구하였다. 1892년(고종 29) 이면상(李冕相)을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한 것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조선왕조 실록의 암행어사 기록


생몰년대

파견지
벼슬

조선왕조실록

박소 (朴紹)
1493∼1534

평안도
사간원 사간
야천할아버지

중종 066 24/10/26(무자) / 팔도에 어사를 파견하다 》명하여 어사(御史)를 팔도에 파견하게 하였다.【강원도는 권예(權혲), 경기는 심언광(沈彦光), 충청도는 임권(任權), 전라도는 허흡(許洽), 함경도는 정세호(鄭世虎), 평안도는 박소(朴紹), 황해도는 양연(梁淵), 경상도는 황염(黃恬)이다.】

박응남 (朴應男)
1527∼1572

평안도
대사헌
야천 남일공

명종 023 12/06/08(기축) / 평안·황해·경기 각도에 비가 내린 형편을 알아보다.》  정언 박응남(朴應男)이 숙배(肅拜)하였다. 전교하기를,  “박응남에게 왕래한 일로(一路)에서 본 평안·황해·경기 각도에 비가 내린 형편을 물어서 아뢰어라.”  하니, 아뢰기를,“대개 일로에 비가 두루 흡족해서 곡식이 무성했다고 합니다.” 하였다.【응남이 수은 어사(搜銀御史)로 평안도에 갔다가 왔다.】

박동열 (朴東說)
1564∼1622

함경도
대사성
야천 남곽공

선조 073 29/03/17(갑신) / 함경도 순안 어사 박동열이 직무를 태만히 하는 병사 변양준을 죄줄 것을 장계하다 》  함경도 순안 어사(咸鏡道巡按御史) 박동열(朴東說)이 장계하기를,“남도(南道)의 걱정이 하루가 긴박한데, 근래 노추(奴酋)가【노을가적(老乙可赤).】 매양 화해를 구실로 삼아 겨울 봄 할 것 없이 출입하면서 엿보고 있으므로, 잔보(殘堡)의 군졸들이 방어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총융(總戎)이 된 자는 의당 제때에 달려가 미리 성원해야 하는데, 병사(兵使) 변양준(邊良俊)은 특별히 남보다 뛰어난 재주도 없이 공석을 메워 구차히 제수된 사람으로서 그의 소행을 보니, 이 일을 경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봄 날씨가 화창해진 지 이미 오래인데도 사세를 핑계대며 말하기를, ‘반드시 오족(吾足)과 쌍청(雙淸)을【두 보루의 이름이다.】 순행하고서야 행영(行營)에 들어갈 수 있는데, 지금은 눈이 막혀 지체하고 있다.’ 하니, 기망하여 시일을 끄는 태도가 자못 가소롭습니다. 비록 태평무사한 때라도 병사는 으레 중춘(仲春)에 떠나 들어가야 하며, 만약 걱정이 될 만한 변고가 있으면 그 기한에 관계없이 순행해야 하는데, 3월에 통행할 수 있는 곧은 길을 버리고 눈이 녹기를 기다려서 오족과 쌍청의 보루를 경유하고자 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신이 본부에 도착하여 그의 휘하를 잡아다가 다른 고을에 수감한 후에야 억지로 출발하니, 그의 태만 방자함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 치죄할 것을 입계합니다.” 하니, 정원에 전교하기를,“어사(御史)가 곤수(쥀帥)에 대하여 어찌 이렇게 한단 말인가. 병사의 진퇴는 어사와 관계가 없는 것인데 휘하를 잡아다가 이감하고 독촉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잘못이다. 이 장계를 쓰지 말라.”하였다.

박정 (朴炡) 
 1596∼1632

전라도
이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야천 서포공

인조 008 03/02/05(갑신) / 상이 주강에 《맹자》를 강하다. 이서가 인성군의 위리안치를 진달하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맹자》를 강하였다. 특진관 이서(李曙)가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죄악과 외방에 내보내 안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극력 진달하고, 또 인심이 안정되지 않아 종사가 위태롭게 될 것임을 아뢰니, 상이 한참 후에 대답하기를,“경은 국가의 안위가 왕자 하나를 외방에 내보내 안치시키느냐의 여부에 달렸다고 여기는가? 의혹스러운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강이 파한 다음에, 암행 어사(暗行御史) 홍문관 교리 박정(朴炡)과 이조 정랑 이경여(李敬輿)를 인견하고 계칙(戒飭)하여 보냈다.
《 인조 008 03/03/11(기미) / 전라도 암행 어사 박정이 장흥 부사 이정철의 죄상을 계문하다 》 전라도 암행 어사 박정(朴炡)이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정철(李廷哲)이 징렴한 죄상을 계문하니, 상이 잡아다가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 인조 008 03/03/22(경오) / 전 참의 조익이 상소하여 김진서에게 곡식을 받았다는 것이 무고임을 진달하다 》 전 참의 조익(趙翼)이 상소하여 곡식을 받았다는 것이 무고임을 극력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조익이 자신을 밝히는 일로 두 차례나 소장을 올려 임금을 번거롭히니, 몹시 외람하다. 되도록 엄중하게 추고하라.”하였다. 이때 암행 어사 박정(朴炡)이 흥덕 현감(興德縣監) 김진서(金振緖)의 범법한 문서를 찾아냈는데, 그 내용 중에 ‘조 승지(趙承旨)에게 곡식을 보냈다.’는 말이 있으므로, 김진서가 감옥에 갇혀 형신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조익이 상소를 올려 자신을 해명한 것이다. 대개 조익은 유신(儒臣)으로서 당시에 이름이 알려졌고 지조가 청렴하고 검약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럴 리가 만무하다고 여겼다. 이러므로 통쾌하게 그가 모함한 것임을 변명한 것이다

박황 (朴潢) 
1597∼1648

황해도
대사헌
야천 부원군

인조 015 05/01/06(갑술) / 호패 정돈에 대해 각도 어사에게 구언하다 》상이 순안 어사 전라 좌도 이경여, 경상 좌도 신계영(辛啓榮), 충청 좌도 최유해(崔有海), 경상 우도 강석기(姜碩期), 함경도 조정호(趙廷虎), 황해도 민응회(閔應恢), 강원도 이경의, 평안도 홍명구(洪命耉), 충청 우도 심지원(沈之源), 전라 우도 박황(朴潢) 등 열 사람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하생략)
《 인조 016 05/05/13(무인) / 김류가 안악·신천의 사람들이 장수 산성으로 피신하기를 원한다고 아뢰다 》김류(金?)가 아뢰기를,“지금 순검 어사(巡檢御史) 박황(朴潢)의 서계를 보건대, 안악(安岳)·신천(信川)의 인민들이 모두 구월산(九月山)의 장수 산성(長壽山城)을 수축하여 병화(兵禍)를 피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감사·병사로 하여금 그곳 형편을 살펴 아뢰게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박세성 (朴世城)
1621∼1671

평안도
동부승지·
호조참의
 야천 참봉공

효종 015 06/12/22(임신) / 추쇄 도감이 서필원·민정중·홍주삼 등을 어사로 삼을 것을 청하다 》추쇄 도감(推刷都監)이 서필원(徐必遠)·민정중(閔鼎重)을 황해도 어사로, 권대운(權大運)·박세성을 평안도 어사로, 홍주삼(洪柱三)·이후(李텋)를 함경남·북도 어사로 삼을 것을 청하니, 하교하였다.“평안도와 황해도의 어사를 서로 바꾸라.”

박세당 (朴世堂)
629∼1703

황해도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야천 서포공

현종 009 05/07/08(정유) / 비국이 종부시 정 김만기 등 8인의 어사감을 뽑아 아뢰다 》비국이 종부시 정 김만기(金萬基), 사복시 정 오시수(吳始壽), 교리 민유중(閔維重), 부교리 홍만용(洪萬容), 이조 좌랑 여성제(呂聖齊), 병조 정랑 박세당(朴世堂), 헌납 정륜, 부사직 신후재(申厚載) 등 8인으로 어사의 감을 뽑아 아뢰라는 명에 응하였다.
《 현종 009 05/10/04(임술) / 평안도·황해도·경기도 등에 민유중·오시수 등을 어사로 파견하다 》어사(御史) 민유중(閔維重)과 오시수(吳始壽)를 평안도에, 박세당(朴世堂)을 황해도에, 여성제(呂聖齊)·신후재(申厚載)를 경기도에 나누어 파견하였다.
《 현종 009 05/12/02(기미) / 황해도 어사 박세당이 복명하니 신천 군수 홍주언 등을 승진시키다 》황해도 어사 박세당(朴世堂)이 복명하였다. 수령으로서 고을을 잘 다스린 신계 현령 김군석(金君錫)은 표리를 하사하고, 신천 군수 홍주언(洪柱彦)과 옹진 현령 권숙(權?)은 다 승진시키고, 연안 부사 조세환(趙世煥)은 치적이 도내에서 제일인 까닭에 자급을 올려주었으며, 봉산 군수 김하량(金廈樑)은 탐욕을 부리고 여색을 밝힌 이유로, 곡산 군수 유진삼(柳晋三)은 심한 술주정을 이유로 다 죄를 입었다

박태상 (朴泰尙)
 1636∼1696

전라도
이조판서
 야천 서포공

숙종 002 01/01/04(계해) / 충청·경상·전라도에 암행 어사를 파견하다 》 삼남(三南)에 암행 어사(暗行御史) 임상원(任相元)·박태상(朴泰尙)·권해(權?)를 나누어 보냈다.
《 숙종 002 01/02/23(신해) / 전라도 암행 어사 박태상이 도내를 염문하고 돌아오다 》  전라도 암행 어사(全羅道暗行御史) 박태상(朴泰尙)이 염문(廉問)하고 들어와서, 임실 현감(任實縣監) 신계징(申啓澄)·장수 현감(長水縣監) 한정상(韓鼎相)·해남 현감(海南縣監) 황징(黃徵)·옥구 현감(沃溝縣監) 윤연(尹?)·무주 부사(茂朱府使) 조창기(趙昌期)·군산 만호(群山萬戶) 한태흥(韓太興) 등을 파직할 것을 서계(書啓)하였다.
《 숙종 005 02/04/01(계축) / 여러 어사를 패초하고, 제도에 암행 어사를 나누어 보내다 》 이날에 여러 어사(御史)를 패초(牌招)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김하전(金厦?)이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가면서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개차(改差)하라고 명하고, 이 뒤로는 어사에 뽑힌 사람은 외직에 의망(擬望)하지 말게 하였다. 제도(諸道)에 암행 어사(暗行御史)를 나누어 보냈는데, 박태상(朴泰尙)을 함경도에, 권환(權?)을 평안도에, 유하익(兪夏益)을 황해도에, 박순(朴純)을 경기에, 유명견(柳命堅)을 강원도에, 강석빈(姜碩賓)을 충청도에, 권유(權愈)를 경상도에, 김하전(金厦?)을 전라도에 보냈다.

 

함경도

숙종 005 02/06/10(신유) / 함경도 암행 어사 박태상의 서계로 포폄을 행하다 》함경도 암행 어사(咸鏡道暗行御史) 박태상(朴泰尙)이 들어와서 서계(書啓)하여 북청 판관(北靑判官) 이국화(李國華)를 파면하고, 부령 부사(富寧府使) 고계원(高啓元)·이성 현감(利城縣監) 안세성(安歲星)을 나치(拿致)하였으며, 병기(兵器)를 따로 갖춘 이유로써 길주 목사(吉州牧使) 김환(金煥)에게 말을 하사하였다.

박태보 (朴泰輔)
1654∼1689

전라도
교리
야천 서포공

숙종 018 13/05/01(무인) / 이돈·김만채·박태보 등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암행하여 염탐하게 하다 》이돈(李墩)·김만채(金萬埰)·박태보(朴泰輔) 등을 여러 도(道)에 나누어 보내 암행(暗行)하며 염탐하게 하였다.
《 숙종 047 35/02/12(갑인) / 경상도 의성의 성삼문의 사우에 사액을 내리다 》경상도 의성(義城) 금학산(金鶴山) 밑에 성삼문(成三問)이 살던 옛터가 있는데, 유생(儒生)들이 사우(祠宇)를 창건하고서 박팽년(朴彭年) 등 5신(臣)도 아울러 향사(享祀)하고, 또 이세화(李世華)·오두인(吳斗寅)은 일찍이 방백(方伯)의 좌막(佐幕)을 지냈고 박태보(朴泰輔)는 또한 어사(御史)로 왔던 일을 들어 곁에다가 따로 사당을 세웠었다. 이어 상소를 진달하여 사액(賜額)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그 상소를 예조(禮曹)에 내리니, 예조에서 복계(覆啓)하므로 시행하도록 윤허했다.

박태만 (朴泰萬)
 1642∼?

어사
교리·수찬
야천 오창공

숙종 018 13/07/18(갑오) / 민진주·목임일 등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암행하여 염탐하게 하다 》민진주(閔鎭周)·목임일(睦林一)·박태만(朴泰萬)·이현기(李玄紀)를 여러 도(道)에 나누어 보내 암행(暗行)하며 염탐하도록 하였다.

박필명 (朴弼明)
1658∼1716

함경도
대사간.도승지
 야천 남일공

숙종 038 29/11/27(무진) / 박필명을 북청사 겸 감진 어사로 삼다 》박필명(朴弼明)을 북평사(北評事) 겸 감진 어사(兼監賑御史)로 삼았다. 이때 북관(北關)에 기근이 매우 심하여, 조정에서 장차 감진 어사를 보내자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북평사 이동언(李東彦)이 채 과한(瓜限)이 되기 전에 어머니의 병 때문에 빨리 돌아왔으므로, 묘당(廟堂)에서도 이동언을 겸어사(兼御史)로 임명하여 빨리 임지(任地)로 돌아가도록 할 것을 아뢰자, 호조 판서 조태채(趙泰采)가 상소하기를,“이동언은 본래 거리낌 없이 말한다고 일컬어지니, 마땅히 외직(外職)에 오랫동안 내보내서는 안됩니다. 어찌 다가오는 봄과 여름의 진정(賑政)을 만기(滿期)가 되어 체임(遞任)을 앞에 둔 사람에게 책임지울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대신(大臣)이 체임(遞任)시키자고 아뢰니, 박필명(朴弼明)으로 대신하게 한 것이다.
《 숙종 039 30/01/28(무진) / 북평사 박필명을 보내 관북의 진휼을 감독하도록 하다 》북평사(北評事) 박필명(朴弼明)을 보내어 관북(關北)의 진제(賑濟)를 감독하게 하였다. 이 때 북로(北路)를 진제하는 일이 하루가 급박했는데, 박필명이 정세를 들어 굳게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누차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면서 출발할 것을 재촉하니, 박필명이 비로소 명을 받들고 북로로 갔다. 그러고 나서 연신(筵臣)이 아뢰기를,“박필명에게 어사(御史)를 겸대(兼帶)시켜야 합니다. 평사는 막관(幕官)이고 어사는 경관(京官)이어서 예모(禮貌)에 큰 구애가 있으니, 변통시키는 조처를 내려야 됩니다.”하니, 평사를 체차시키고 오로지 감진 어사(監賑御史)로만 일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박사성 (朴師聖)
1770∼1843

어사
예조참판
세양공

영조 008 01/11/14(무신) / 암행 어사를 파견하다 》암행 어사(暗行御史) 박사성(朴師聖)·윤심형(尹心衡)을 나누어 보내서 여러 도(道)를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박사창 (朴師昌)
 1687∼1749

공홍도
(충청도)
승정원 우승지
 야천 서포공

영조 045 13/08/27(계미) / 파직된 자들을 서용해서 내일 조참에 참석시키려고 조현명 등에게 직첩을 주다 》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청대(請對)하여 함께 입시했다. 사간(司諫) 조상명(趙尙命)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청컨대, 김성탁(金聖鐸)을 전례에 의해 엄히 국문(鞫問)해 쾌히 왕법(王法)을 바루소서.”하니, 답하기를,“김성탁의 무상(無狀)함은 이미 알았으니 후일 곧 하교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또 아뢰기를,(이하생략)
《 영조 045 13/09/19(갑진) / 민생이 참혹하니 군역·신포를 반감하자는 공홍도 어사 박사창의 장계를 따르다 》 공홍도 어사(公洪道御史) 박사창(朴師昌)이 장계(狀啓)하여 말하기를,“재해를 더욱 심하게 입은 18개 고을의 농사 형편의 놀랍고 참혹한 것과 민생(民生)의 굶주려 쓰러짐이 거의 임자년·계축년보다 심하니, 청컨대 신해년·임자년의 예에 의해 군역(軍役), 신포(身布)를 아울러 반감(半減)해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이고 안집(安集)시키는 방법을 삼도록 하소서.”하였는데, 비국에서 복계(復啓)해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영조 045 13/09/28(계미) / 주강을 행하다. 호서 어사 박사창이 복명하다 》주강을 행하였다. 호서 어사(湖西御史) 박사창(朴師昌)이 복명(復命)하였다. 

박사해 (朴師海)
 1711∼1778

결성(충남홍성)
대사간
야천 길주공

영조 103 40/06/16(병신) / 결성 안핵 어사 박사해가 돌아와 홍양해의 산송 일을 아뢰다 》결성 안핵 어사(結城按탢御史) 박사해(朴師海)가 돌아와 홍양해(洪量海)의 산송(山訟) 일을 아뢰니, 임금이 홍양해를 형배(刑配)하고 즉시 묘를 파내게 하라고 명하였으며, 또 전 도신(道臣) 조돈(趙暾)을 파직하였다. 이조 판서 김상철(金尙喆)도 좌체(坐遞)되어 이익보(李益輔)로 대신하였다.
《 영조 105 41/04/03(무신) / 양남에서 올라온 세선이 취재되는 경우가 많아 사실을 조사하게 하다 》 이보다 앞서 양남(兩南)에서 올라온 세선(稅船)이 취재(臭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정에서 여러 번 신칙하였으나 일부러 치패(致敗)시킨 자가 꼬리를 이었다. 서천(舒川)의 곡식 수천 곡(斛)이 또 통진(通津) 지방에서 치패(致敗)되었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선격(船格)을 일률(一律)로 다스려서 대중들을 깨우치게 하자고 청하였다. 임금이 짐을 마구 실었다는 것으로써 먼저 해당 군수를 귀양보내고, 어사 박사해(朴師海)를 보내어 가서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 영조 106 41/11/27(무술) / 운산 군수 이은정의 일을 살핀 박사해가 상황을 아뢰자 파직만 시키다 》전에 운산 군수(雲山郡守) 이은정(李殷鼎)의 일로 인하여 어사 박사해(朴師海)를 보내어 살펴 조사하게 하였다. 박사해가 돌아와 아뢰기를, ‘이은정의 아객(衙客)이 관비(官婢)와 사사로이 간통하였는데, 비(婢)의 지아비가 비의 집에 왕래하자 이은정이 마침내 그를 곤장쳐서 죽게 하였고, 다른 정사(政事)도 또한 광패(狂悖)한 것이 많다’고 하였다. (이하생략)

박사륜 (朴師崙)
716∼1786

제주
대사헌
 야천 길주공

영조 112 45/05/28(기유) / 제주 목사 남익상이 밀·보리에 대해 진곡을 청함이 지나치다 하여 파직하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남익상(南益祥)을 특별히 파직하게 하였다. 남익상이 밀·보리가 흉년이 든 실상을 아뢰고, 또 진곡(賑穀)을 구획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올해는 보리 농사가 크게 풍년이 들었는데, 본주가 이와 같다고 하니 만약 외람되게 사치함이 없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였다면, 반드시 민울(悶鬱)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중략)하니, 이에 특별히 남익상을 파직한 것이다. 어사 박사륜(朴師崙)을 보내어 본주를 염탐(廉探)하게 하였으며, 9월 이전에는 공헌(貢獻)하는 물건들을 일체 아울러 정봉(停封)하도록 명하였다. 그 후에 대신이 공마(貢馬)는 군병이 타는 것에 관계된다 하여 전례에 의거하여 진헌(進獻)하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 영조 113 45/09/12(신묘) / 제주에서 표몰한 자들에 대해 경외에서 휼전을 베풀 것을 명하다 》제주(濟州)에서 표몰(漂沒)한 17인을 경외(京外)에서 특별히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호남 도신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어사 박사륜(朴師崙)의 일행이 풍랑에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박사륜이 겨우 면하여 추자도(楸子島)에 도착했다는 어사의 장문(狀聞)을 보기에 이르러 임금이 크게 놀라 가엾게 여겨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 영조 113 45/10/02(경술) / 남형 불법한 일로 제주 목사 남익상을 옥에 가두다 》전 제주 목사(濟州牧使) 남익상(南益祥)을 옥(獄)에 가두고, 금오(金吾)의 여러 당상들로 하여금 엄히 추문(推問)해서 취초(取招)하도록 명하였다. 제주 어사 박사륜(朴師崙)이 아뢰기를,“남익상이 범람하게 형장을 베풀어 사람을 죽였고, 말꼬리 7백 근(斤)과 양대(凉臺) 1천 5백 개[立]를 몰아 샀다는 남형 불법(濫刑不法)한 정상 등에 대해 아뢰니, 임금이 노여워하여 말하기를,“남익상은 남이흥(南以興)의 손자인데, 어떻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남간(南間)에 가두어 엄중히 추문하여 구초(口招)를 받으라고 명하였다 

박우원 (朴祐源)  1739~1793

호서
예조판서.직제학
 야천 도정공

정조 007 03/03/27(신해) / 직무유기자들을 파직하고 각종 세금 징수의 폐단을 시정케 하다 》차대(次對)하였다. 호서 암행 어사(湖西暗行御史) 박우원(朴祐源)이 복명(復命)하고 나서 서계(書啓)를 올려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 이정병(李鼎炳), 병마 우후(兵馬虞侯) 이윤원(李潤元), 청양 현감(靑陽縣監) 이용중(李龍中), 제천 현감(堤川縣監) 송계상(宋繼相), 면천 군수(沔川郡守) 정동현(鄭東顯), 보은 현감(報恩縣監) 서퇴수(徐退修), 서산 현감(瑞山縣監) 박지홍(朴志泓), 평택 현감(平澤縣監) 유한응(兪漢膺), 아산 현감(牙山縣監) 윤광(尹셂), 전의 현감(全義縣監) 홍건(洪楗), 진잠 현감(鎭岑縣監) 홍성호(洪成浩), 진위 현령(振威縣令) 박좌원(朴左源), 서원 영장(西原營將) 이형묵(李亨默)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정상(情狀)에 대해 논핵하였다. 이정병·이윤원·이용중·송계상은 나문(拿問)하고 정동현 등 9인은 파직시켰는데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복주(覆奏)를 따른 것이다. 박우원이 또 별단자(別單子)를 올리기를,(이하생략)
《 정조 007 03/03/27(신해) / 형조 판서 윤동섬이 죄인 처벌을 요청하다 》  형조 판서 윤동섬(尹東暹)이 아뢰기를, “이경(李璟)·한후량(韓後良)·김묵행(金默行)·유찬주(兪纘柱)·김규오(金奎五) 등 5인은 역적 홍양해(洪量海)의 절친한 사돈이기도 하고 혹 망명(亡命)하는 역적에게 노자(奴子)와 말을 빌려주기도 하고 전혀 기탄이 없이 서울을 출입하기도 하고 혹 흉역(凶逆)이 복법(伏法)된 뒤 그들의 딸을 데리고 있기도 하고 혹 자기 할아비의 연보(年譜)를 역적 홍양해에게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기경(李基敬)이 호서(湖西)로 이사(移舍)하려 한 것은 서도(西道)의 주인(主人)이 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암행 어사의 서계(書啓)에서 논열(論例)한 것이 매우 엄정하니, 청컨대 엄중한 형신을 가하여 먼 곳에 정배(定配)시키소서.”하였다. 어사 박우원(朴祐源)의 회주(回奏)에 따라 이 계사(啓辭)가 있게 된 것인데, 그대로 따랐다. 교리 엄사만(嚴思晩)이 아뢰기를,  “이경(李璟)이 홍이해(洪理海)가 망명할 때 말을 빌려주어 도왔으니, 흉악한 심중(心中)이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환히 드러나서 숨길 수 없습니다. 청컨대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이하생략)

박윤수 (朴崙壽)
1753∼1824

광주죽산 양성
우참찬.대사헌
야천 서포공

정조 041 18/11/16(경자) / 경기 각읍의 암행 어사와 적간 사관에게 별도로 내린 유시. 여러 어사와 사관의 결과 보고 》경기 각읍의 암행 어사와 적간 사관(摘奸史官)에게 별도로 유시하기를,【광주(廣州)·죽산(竹山)·양성(陽城)의 어사는 박윤수(朴崙壽)이고, 고양(高陽)·파주(坡州)·장단(長湍)·풍덕(豊德)의 어사는 홍낙유(洪樂游)이고, 이천(利川)·여주(驪州)·음죽(陰竹)의 어사는 정내백(鄭來百)이고, 적성(積城)·마전(麻田)·연천(漣川)·삭녕(朔寧)의 어사는 정약용(丁若鏞)이고, 양천(陽川)·김포(金浦)·부평(富平)·통진(通津)·교하(交河)의 어사는 채홍원(蔡弘遠)이고, 영평(永平)·포천(抱川)의 어사는 정이수(鄭履綬)이고, 금천(衿川)·안산(安山)·남양(南陽)·인천(仁川)의 어사는 유사모(柳師模)이고, 과천(果川)·용인(龍仁)·진위(振威)의 어사는 이조원(李肇源)이고, 양지(陽智)·안성(安城)의 어사는 정동관(鄭東觀)이고, 양근(楊根)·가평(加平)의 어사는 정만석(鄭晩錫)이고, 교동(喬洞)·강화(江華)의 적간 사관(摘奸史官)은 조석중(曺錫中)이고, 양주(楊州)·광주(廣州)의 적간 사관은 서준보(徐俊輔)와 구득로(具得魯)이고, 금천(衿川)·수원(水原)·광주(廣州)의 적간 사관은 정문시(鄭文始)이고, 지평(砥平)의 적간 사관은 이면승(李勉昇)이다.】(이하생략)

박규수 (朴珪壽)
1807∼1877

경상좌도
도승지.형조판서
야천 오창공

《 철 006 05/11/28(계사) / 서계하여 전 경주 부윤 남성교 등을 탄핵한 경상좌도 암행 어사 박규수를 불러 보다.》경상좌도 암행 어사(慶尙左道暗行御史) 박규수(朴珪壽)를 소견(召見)하였으니, 전 경주 부윤(慶州府尹) 남성교(南性敎)·전 대구 판관(大邱判官) 심영택(沈英澤)·전전 밀양 부사(密陽府使) 서유여(徐有헯)·전 의성 현령(義城縣令) 조철림(趙徹林)·전 경산 현령(慶山縣令) 강희영(姜羲永)·전 기장 현감(機張縣監) 최동진(崔東鎭)·전전 현감(縣監) 김정묵(金鼎默)·전 자인 현감(慈仁縣監) 오경연(吳慶延)·전 성현 찰방(省峴察訪) 허탁(許鐸)·예천 군수(醴泉郡守) 김징순(金徵淳)·전 양산 군수(梁山郡守) 이병덕(李秉德)·전 신녕 현감(新寧縣監) 최영석(崔永錫)·전 황산 찰방(黃山察訪) 선우업(鮮于?)·통제사(統制使) 이규철(李圭徹)·좌도 병마 우후(左道兵馬虞候) 조만혁(趙萬赫)·전 경주 영장(慶州營將) 이희수(李熙洙)·전 안동 영장(安東營將) 구항(具沆) 등을 죄주고, 대구 영장(大邱營將) 이종긍(李種兢)·경주 영장(慶州營將) 구영순(具永淳)을 포장(褒奬)하여 승서(陞敍)할 것을 서계(書啓)한 때문이었다.

박선수 (朴瑄壽)
1821∼1899

경상도
형조판서
야천 오창공

고종 004 04/07/18(기사) / 경상도 암행 어사 박선수가 보고서를 올리다 》 경상도 암행 어사(慶尙道暗行御史) 박선수(朴瑄壽)를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보고서를 올려 다음과 같은 인사 조치를 제의하였다 통제사(統制使) 김건(金鍵), 전 통제사 이봉주(李鳳周), 전 경주 부사(慶州府尹) 홍익섭(洪翼燮), 전 상주 목사(尙州牧使) 김증현(金曾鉉), 전 진주 목사(晉州牧使) 이항익(李恒翼), 전 함안 군수(咸安郡守) 백낙헌(白樂憲), 전 연일 현감(延日縣監) 윤양계(尹養桂), 전 기장 현감(機張縣監) 정태원(鄭泰源), 자인 현감(慈仁縣監) 이장렬(李章烈), 전 영양 현감(英陽縣監) 윤필구(尹弼求), 칠원 현감(漆原縣監) 유진국(兪鎭國), 함양 군수(咸陽郡守) 서호순(徐頀淳), 전 창원 부사(昌原府使) 이명석(李明錫), 전 김해 부사(金海府使) 허전(許傳), 전전(前前) 동래 부사(東萊府使) 강로(姜?), 칠곡 부사(漆谷府使) 박주운(朴周雲), 전 예천 군수(醴泉郡守) 임승수(林勝洙), 전 경산 현감(慶山縣監) 조병위(趙秉瑋), 전 고령 현감(高靈縣監) 이시익(李時翼), 전전 비안 현감(比安縣監) 정재주(鄭在?! ?), 전전 자인 현감(慈仁縣監) 조익증(趙翼增), 창락 찰방(昌樂察訪) 김정섭(金鼎燮), 전 유곡 찰방(幽谷察訪) 배상규(裴相奎), 전 금천 찰방(金泉察訪) 이철남(李喆南), 전 성현 찰방(省峴察訪) 홍찬섭(洪贊燮), 부산 첨사(釜山僉使) 윤석우(尹錫禹), 전 다대 첨사(多大僉使) 허규(許奎) 등에게 죄를 주고,(이하생략)
《고종 004 04/07/18(기사) / 경상도 암행 어사 박선수의 별단을 비준하다 》 붉은 글로 경상도 암행 어사(慶尙道暗行御史) 박선수(朴瑄壽)의 별단(別單) 가운데 있는 토호(土豪)인 전 참봉(參奉) 이재희(李在喜), 진사(進士) 유효목(柳孝睦), 김귀락(金龜洛), 이만동(李晩洞), 박해수(朴海壽), 성숙원(成肅源), 강복(姜福), 정상경(鄭象庚), 김인섭(金麟燮), 권인하(權寅夏), 신석보(申錫輔), 조삼규(曺三奎), 김병욱(金炳昱), 장문법(張文法), 이유겸(李有謙), 김휘대(金輝大) 등을 형벌을 주거나 귀양보낼 데 대하여 비준하였다.  

박제문 (朴齊聞) 
1787∼1838

경기도
이조참판
 야천 서포공

순조 025 22/01/20(병인) / 비국에서 어사에 적합한 사람으로 김난순·박제문 등을 뽑아 올리다 》 비국에서 어사에 적합한 사람 김난순(金蘭淳)·박제문(朴齊聞)·임준상(任俊常)·홍학연(洪學淵)·이언순(李彦淳)·남이무(南履懋)·홍승규(洪勝圭)·조인영(趙寅永)·권돈인(權敦仁)·서좌보(徐左輔)를 뽑아 올렸다.
《 순조 025 22/06/17(기미) / 경기 암행 어사 박제문이 백홍진 등의 다스리지 못한 것에 대한 서계를 올리다 》경기 암행 어사 박제문(朴齊聞)이 서계(書啓)를 올려, 장단 전 부사(長湍前府使) 백홍진(白泓鎭), 남양 전 부사(南陽前府使) 이승운(李乘運), 진위 전 현령 송계근(宋啓根), 연천 현감(漣川縣監) 서유은(徐有殷), 인천 부사(仁川府使) 이현수(李顯綬), 안성 군수(安城郡守) 임희계(任希季), 양천 전 현감(陽川前縣監) 이도명(李度明), 풍덕 부사(?德府使) 이길회(李吉會), 양천 현감(陽川縣監) 송우연(宋友淵), 포천 전 현감(抱川前縣監) 권용만(權用萬), 교동 전 부사(喬桐前府使) 이복연(李復淵)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논하니, 모두 경중에 따라 처벌하게 하였다. 또 지평 현감(砥平縣監) 조기복(趙基復), 가평 군수(加平郡守) 남진화(南進和), 고양 군수(高陽郡守) 정연시(鄭淵始)는 치적이 있다고 논하니, 모두 승서(陞敍)의 은전을 시행하게 하였다. 또 별단(別單)에 각 고을의 저치미(儲置米)를 가하(加下)한 것이 그대로 환곡(還穀)의 포흠(逋欠)이 된 폐단과,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향곡(餉穀)에 보인(保人)을 세우는 규례와, 각역(各驛)이 조잔한 실정과, 강도(江都)의 방어가 허술한 염려 등을 개진하였는데,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제일 좋은 방도를 채택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박제관 (朴齊寬) 
1834∼?

경기도
동래부사
야천 참봉공

《고 004 04/09/17(정묘) / 경기 암행 어사 박제관이 서면 보고를 하다 》 경기 암행 어사(京畿暗行御史) 박제관(朴齊寬)을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서면 보고를 바쳤는데 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이승보(李承輔), 안성 군수 이승로(李承老), 인천 부사(仁川府使) 조운섭(趙雲涉), 이천 부사(利川府使) 장익(張瀷), 가평 군수(加平郡守) 김진(金瑨), 전 파주 목사(坡州牧使) 조희풍(趙羲豊), 전 남양 부사(南陽府使) 정태호(鄭泰好), 통진 부사(通津府使) 신재지(愼힃芝), 전 지평 현감(持平縣監) 유치도(兪致道), 전 음죽 현감(陰竹縣監) 김순근(金恂根), 영화 찰방(迎華察訪) 박연용(朴演鏞) 등에게는 죄를 주고 양주 목사(楊州牧使) 임한수(林翰洙), 지평 현감(砥平縣監) 정기석(鄭箕錫)에게 임금의 인장이 찍힌 글과 안팎 옷감[表裏]을 주며 (이하생략)
《고종 004 04/09/25(을해) / 경기 암행 어사 박제관이 별단을 올리다 》 또 제의하였다. “경기 암행 어사(京畿暗行御史) 박제관(朴齊寬)의 별단(別單)에 의하면 그 중 하나는 각 고을의 동포(洞布)가 많이는 중한 편으로 치우치거나 작은 편으로 치우친다는 한탄이 있으니 교묘하게 피하거나 옮겨가는 버릇을 엄하게 막을 것이며 아전(衙前)들이 부역을 면제시키는 대상을 원래 결정한 이외에 그 수를 늘여서 가만히 팔아먹는 것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적발하여 엄하게 처분함으로써 뒤에 있을 폐단을 영영 막을 데 대한 문제입니다. 처분을 한 번 내리더라도 대궐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끝까지 조사하여 좋은 편을 따라 시행한 뒤에 보고하게 할 것입니다.

박정양 (朴定陽) 
 1841∼1904

경상도
호조판서
·한성부판윤
야천 참봉공

고종 011 11/12/13(임오) / 경상 좌도 암행 어사 박정양을 접견하다 》 경상 좌도 암행 어사(慶尙左道暗行御史) 박정양(朴定陽)을 불러서 만나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산(釜山) 전 훈도(前訓導) 안동준(安東晙)의 문제에 대하여 지난 번에 처분한 바가 있으나 지금 죄를 범한 것을 보니 이처럼 많다. 하찮은 역관인 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 극히 통분하고 놀라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박정양이 말하였다. “안동준이 범한 죄를 경주 부윤(慶州府尹) 임한수(林翰洙)가 이미 조사하여 감영에 보고하였고 또 전하에게 보고되었으니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번거롭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하생략)

 

동래

고종 018 18/08/30(기축) / 동래부 암행 어사 박정양 등이 다녀온 보고를 하다 》 동래부 암행 어사(東萊府暗行御史) 박정양(朴定陽), 조준영(趙準永), 강문형(姜文馨), 심상학(沈相學), 이헌영(李쐵永), 엄세영(嚴世永)을 불러들여 만났다. 다녀온 보고를 하였기 때문이다.

박영교 (朴泳敎)
 1849∼1884

전라도
승지
 야천 오창공

고종 020 20/06/22(경오) / 암행 어사 박영교의 서계와 관련하여 지방관 윤구·이주영 등에게 죄를 주다 》 전라도 암행 어사(全羅道暗行御史) 박영교(朴泳敎)를 소견(召見)하였다. 서계(書啓)와 관련하여 전전 장흥 부사(前前長興府使) 윤구(尹밠), 광양 현감(光陽縣監) 이주영(李胄榮), 전 흥덕 현감(前興德縣監) 이병세(李秉世), 전 태인 현감(前泰仁縣監) 이정직(李定稙), 전 남원 부사(前南原府使) 심의두(沈宜斗), 전 함평 현감(前咸平縣監) 권재우(權在禹), 전 영광 군수(前靈光郡守) 김우균(金羽均), 전 여산 부사(前礪山府使) 김의병(金宜炳), 전전 만경 현감(前前萬頃縣監) 백남설(白南卨), 전 남평 현감(前南平縣監) 장희(張熙), 전 구례 현감(前求禮縣監) 유익형(柳翊衡), 전 영암 군수(前靈巖郡守) 심의철(沈宜哲), 전 익산 군수(前益山郡守) 신태정(申泰鼎), 전전 금구 현령(前前金溝縣令) 김사국(金思國), 전 김제 군수(前金提郡守) 이위재(李渭在), 전 순창 군수(前淳昌郡守) 홍기주(洪岐?! ?), 전 옥구 현감(前沃構縣監) 김봉호(金鳳鎬), 전 함열 현감(前咸悅縣監) 임철수(林徹洙), 전 순천 현감(前順天縣監) 민영국(閔泳國), 전 고금도 첨사(前古今島僉使) 백남규(白南圭) 등에게 죄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