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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빛나는 조상

  고려 명신 박상충 첫 족보와 박미 성리학자 박세채 사변록과 박세당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노강서원과 박태보개화사상의 실천자 박규수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태극기와 박영효
독립운동가 박찬익 청백리 공신(功臣) 암행어사
 
 



[ 독립운동가 박찬익(朴贊翊) ]
독립운동가로, 반남박씨 26세손이며, 오창공(梧窓公)의 후손으로 경기도 파주(坡州) 주내면에서 박봉서(朴鳳緖)의 장남으로 1884년 1월 2일 출생하였다. 자는 정일 (精一).호는 남파(南坡)이며 이명은 朴昌益이고, 반남박씨 문중에서는 남파공(南坡公) 어른이라고 한다.
1904년 관립 상공학교(商工學校)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하여 수차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퇴학당하였다. 1907년 초에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활동하였다.
그 뒤 1908년 4월 다시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專習所)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때 나라를 일제에 강점 당하자 동지 박승익(朴勝益) 등 10여 명과 같이 저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역부족, 그해 겨울 만주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북간도에서 독립투쟁가 이상설(李相卨) 백순(白純) 등의 지도로 독립투쟁을 계획하는 일방 대종교 도사교(都司敎) 나철(羅喆)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 교인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관헌의 지원을 얻어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파동(靑坡洞)에 한국인학교를 설치하고 애국과 자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동시에 대종교의 정교(正敎)직을 맡아보면서 포교에도 성의를 보였다. 어느 것이나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상해로 건너 가 손 문(孫文)을 따라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참가하여 만청(滿淸)정부를 타도한 신규식(申圭植)과 함께 1912년 7월에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박은식(朴殷植)을 총재로 추대하였으며, 신채호(申采浩) 김규식(金奎植) 이광(李光)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중심기구로 발전시켜 나갔다.
1918년 11월에는 만주 길림(吉林)에서 김교헌(金敎獻) 김동삼(金東三) 조소앙(趙素昻) 이동녕(李東寧) 등 39인이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도 39인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23일 서울의 국민대회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을 때는 박은식 신채호 손정도(孫貞道) 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1년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外事局長)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하였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의 손 문(孫文)이 광동(廣東)에 중국호법정부(中國護法政府)를 수립하자 외교총장 신규식(申圭植)을 수행하여 임시정부를 승인 받는데 기여하였으며, 1922년 2월에는 광동에 주재하여 호법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1923년 4월에는 외사국장으로서 봉천에 특파되어 재만주 독립운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중국정부 관리와 외교 접촉을 벌였다.
이후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대중(對中)외교를 계속하였으며, 1930년에는 한국국민당 조직에 참여하고, 동년 12월에는 대한독립당 대표로 남경(南京)정부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931년 5월에는 남경의 국민당 전당대회에 임시정부 대표로 안호상(安浩相)과 함께 참석하여 만주 동삼성(東三省)의 독립운동 문제를 거론하였으나 일군의 만주 침략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 임시정부를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1932년 6월에는 다시 상해로 잠입하여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등 부단한 활동을 벌여 옥관빈(玉觀彬)과 상해 한인(韓人)친우회 위원장으로 일경의 밀정 노릇을 하던 유인발(柳寅發) 등을 저격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한국독립당 남경지부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중앙군관학교와 낙양군관학교에 독립군 간부 양성과정을 설치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임정이 중경(重慶)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임시정부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년 10월에는 김규식(金奎植) 신익희(申翼熙) 김성숙(金星淑) 김원봉(金元鳳) 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한중문화협회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어 한 중친선에 기여하였으며, 1943년 5월에는 김 구(金九) 홍 진(洪震) 유동열(柳東說) 조소앙(趙素昻) 이청천(李靑天)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8 15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駐華代表團長)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기여하였고, 1949년 3월 9일 서울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3년11월 19일『건국공로훈장단장(單章)』을 수여하였다.선생의 묘는 1994년 정부에 의하여 국립묘지 애국자 묘역에 새로이 안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