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
[ 연암 박지원선생 사적비 ]
봉건적인 유교 사상에 빠져 있던 조선 중기, 일찍이 실학사상에 눈떠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에 관심을 쏟아 사회개혁 의지를 실천한 북학파의 대표적 실학사상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 ~1805)의 사적비가 허삼둘가옥 옆 안의초등학교 교정(옛날 안의현청이 있던 자리)에 있다.
연암은 55세 되던 1792년 현감으로 부임해 안의에 5년 동안 머물렀다. 그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40여 편이 이곳 안의에서 쓰여졌고, 중국 방문 때 배운 벽돌 굽는 법을 이용해 건물을 짓게 한다든지 자연과학의 지식을 이용해 실생활에 이용하도록 하는 등 실험적 작업을 이곳에서 하였다. 그의 생가는 서울 서대문 부근이었으나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아호가 연유한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 1777년 홍국영의 세도가 한창일 때 박해를 피하여 이곳에 낙향 은거함)은 분단으로 갈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려 현재 연암을 기릴 수 있는 사적지는 여기밖에 없다.
박지원은 서울의 내로라 하는 양반가 자손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직 여의고 할아버지 손에 자라 나이 열다섯까지 글공부를 하지 못하다가 16세에 장가들어 장인과 처숙으로부터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20세 무렵부터 문단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양반 세도가와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기 시작하여 출세의 길을 좇지 않았다.
과거를 마다하고 실용적 학문 연구에 전념하던 연암은 정조 4년(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17일 도착)하고 돌아와 견문을 정리하여 쓴 『열하일기』에는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한 그의 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다.
연암의 글이 모두 시대를 앞서간 글이었고, 연암자신 역시 『열하일기』가 후세에도 남을 것이라 자부하였지만, 정조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위정자들에게는 너무나 급진적이었다. 연암은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데에 비속한 말, 저속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고 해학을 동원하여 부패한 관료사회, 양반 사대부계층의 타락, 과거제도의 문란, 계급 차별, 적서 차별 등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연암의 사상과 문체가 젊은이들 사이에 큰 호응을 얻어 과거 시험장의 답안지에까지 나타나자, 정조는 정권 유지의 차원에서 연암의 문체를 비판하고 연암에게 반성문을 쓰게 했다. 이른바 정조의 문체반정책(文體反正策)이 그것이다. 연암의 글을 문집으로 간행하자는 의논이 집안에 있었지만 평안 감사였던 연암의 손자 박규수조차 “문집을 간행하여 공연한 말썽을 불러일으킬 것 없다”고 했단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한문 단편 「호질」「허생전」「양반전」등은 우리 나라 양반의 고루하고 무기력함을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의 저술이 모두 수록된 『연암집』이 전해 오고 있으나 아직 한글 완역본이 출간되지 않고 있다.
연암 박지원선생 사적비문 - 안의초등학교
여기 안의와 서부경남 일원에 길이 역사적 기념물이 될 연암 박지원 선생의 사적비를 세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박지원 선생은 조선(朝鮮) 후기의 탁월한 실학파(實學派) 학자이며 우리 역사상 최대의 문학가(文學家)의 한 분이시다.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비롯하여 선생이 남긴 수많은 글들은 편편이 경세제민(經世濟民)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뜻을 담고 있어서 민족사의 창조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컸었다. 이러한 선생의 업적을 특히 우리 고장에서 기념하게 되는 까닭은 선생이 우리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1792년에서 1796년까지의 오 년 동안 선생은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재직하면서 행정가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놓았을 뿐 아니라 평생 가슴속에 품고 있던 자신의 실학을 유서 깊은 이 고을에서 실천에 옮겨볼 수 있었으며 작품활동에 있어서도 대표적인 저작(著作)의 대부분을 이 때에 이루어놓았던 것이다. 이제 선생이 이 고장에 남긴 뚜렷한 자취를 대강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선생이 저작활동(著作活動)을 통해 이 고장을 빛낸 점이다. 선생이 이 곳에 있을 때 지은 저작으로 선생의 문집인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만도 40여 편이 된다. 그 가운데는 국계민생(國計民生)에 관련된 중요한 글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이곳에서의 치정치민의 과정에서 쓰여진 것 그리고 안의를 비롯한 함양 거창 합천 등 우리 고장의 아름다운 산수와 문물에 구체적으로 연관된 내용 등이 그 대부분이다. 또한 선생은 이곳에서 자신의 문집을 정리하면서 편제(編題)에 인상각선본(姻相閣選本)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와 같이 이곳 관아(官衙)건물의 명칭을 붙여 자신의 안의 시절을 기념하였다.
이러한 저작(著作)활동을 통하여 당시의 일류문인들이 이곳을 찾아오게 하였고 그 결과 우리 고장이 당시 우리나라 문학의 중심지로 여겨지게까지 하였다. 다음은 선생이 평소에 깊이 연구하였던 과학기술을 이 고장에 접목(接木)시킨 점이다.
이용후생의 학에 특히 힘을 기울였던 선생은 부임하자 곧 북경에서 체득한 지식으로 공장(工匠)에게 직접 기술을 가르쳐 풍구직기용미수전유전(風具織機龍尾水轉輪輾) 즉 베틀 양수기 물레방아 등 새로운 창안에 의한 생산기구를 제작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관아의 부속건물로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공작관(孔雀館)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등을 새로 짓고 연지(蓮池)를 만들었던 바 이 역시 자신이 북경에서 배워온 벽돌 만드는 기술을 그 건축물에 실지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선생이 이 고장 주민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돌보아 민생에 특히 힘을 기울렸던 행정적 자취이다.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유리(流離)하는 기민(飢民) 일천사백 여명을 구휼(救恤)했으며 함양땅의 상습 수해지역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고 경로에 힘써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다. 특히 옥사(獄事)의 판결에 신명(神明)해서 이웃고을과 도내의 어려운 옥사를 여러 건 해결하였다.
다음으로 선생은 이 고장의 문화와 예속(禮俗)을 존중하여 이를 찬양하였다. 지방의 문헌을 발굴하고 학술을 진작(振作)하였던 바 예전에 수천 우여무(凁川.禹汝楙)선생이 지은 홍범우익(洪範羽翼)이라는 방대한 저서의 학술사상적 가치를 발굴하여 드러내었고 이 고장의 선현(先賢) 임갈천(林葛川) 노옥계(盧玉溪) 정동계(鄭桐溪) 유언일(劉彦一) 선생 등이 남긴 학창의(鶴氅衣)와 관각등 유제(遺制)와 미풍을 몸소 실천하고 자신의 자제들에게도 따르도록 함으로써 훌륭한 지방문화를 발전시키기에 힘썼다.
이와같이 남다른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선정비 하나 세워지지 않은 것은 선생 자신이 떠나면서 지방 사람들의 계획을 극력 말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생은 호를 연암(燕岩) 자(字)를 미중(美仲)이라 하였고 1737년 영조 삼십년 당시 서울의 명문인 반남박씨(潘南朴氏)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등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을 논구(論究)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41세때 황해도 연암협(燕巖峽)으로 옮겨 지내다가 44세때 사신(使臣)을 따라 청나라를 여행하였다. 이 때에 새로운 사상과 과학문명의 세계적 조류를 여러면에서 직접 체득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이 여행의 체험을 기록한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참신한 문체로서 당시 문단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을 뿐아니라 선생의 실학사상이 집약적으로 담겨있는 값진 민족문화유산이 되었다.
50세 때 비로소 벼슬길에 나서게 되어 55세에 지방관직으로서는 처음 안의고을 현감이 되었으며 안의를 떠난 지 9년 후인 1805년 69세로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은 안의를 거쳐 면천군수(沔川郡守) 양양부사(襄陽府使) 등을 잠깐씩 지내기는 했지만 첫 부임지로서 가장 오래 있었던 우리 고장이야말로 선생의 사상과 포부를 실천해보고자 온 정열을 불태웠던 곳이다.
선생의 생애는 18세기 말의 낙후된 조국을 문명화하기 위하여 특히 이용후생의 학문연구와 새로운 기운의 문학운동에 오로지 바친 것이었다. 그리하여 상공업의 발전을 위한 유통의 확대와 기술의 혁신에 크게 공헌하였고 이러한 신기운의 형성과 함께 나타나는 근대적 체질이 새로운 인간형들을 소설문학으로 형상화 하였다.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선생은 일찍부터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상인 수공업자들과 교류하는 한편 실학을 가지고 서민들에게 이바지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선비(士)로서 자기 임무를 자각한 때문이었다. 또한 선생은 중세적 권위주의와 고식적(姑息的) 명분론에서 탈피하여 모든 사람들이 봉건적 속박을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훌륭한 문학작품들로 그려놓았던 것이다. 이들 작품은 신선한 구성과 사실적 수법을 그리고 풍자(諷刺)와 해학(諧謔)으로 깊이 서민적 정취를 묘사하여 정통문학의 완강한 성벽에 도전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선생은 민중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자기 시대를 개척해나간 사상가요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선생의 생장지인 서울에는 격심한 변천으로 아무런 흔적도 찾을 길이 없으며 선생의 묘소도 휴전선 북쪽에 있어 가 볼수가 없으니 선생의 거룩한 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우리 안의뿐이다. 이에 선생이 재임시에 손수 지은 관아(官衙)의 부속건물들이 있었던 옛터 이곳 안의국민학교 교정에 선생의 사적비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선생을 통하여 민족사의 선진대열에 호흡을 같이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일깨우고 다시 이 시대의 발전에 창조적으로 기여할 힘의 줄기가 될 것을 다짐하면서 여기 이 돌에 우리 고장 전체주민들의 마음을 새기는 것이다.
1986년 월 일
여주(驪州) 이우성(李佑成) 삼가 지음
진양(晉陽) 하한식(河漢植) 삼가 씀
전면대자(前面大字)는 안동(安東) 김응현(金膺顯)이 썼음
진단학회(震檀學會). 국어국문학회(國語國文學會). 한국사연구회(韓國史硏究會). 한국한문학연구회(韓國漢文學硏究會). 다산연구회(茶山硏究會). 연암 박지원선생 사적비 건립추진위원회(燕巖 朴趾源先生 事蹟碑 建立推進委員會) 세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