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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사회의 문벌세족 본관 성씨별 인구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호장을 시조로 하는 성씨
문과 급제자종묘배향문묘봉향반남인의 저서 및 작품벌명당 전설야천 묘의 전설
참봉공(東民)의 생애 북한의 반남박씨 족보란 무엇인가 관직 상식 호칭및 관계
 
 


[야천묘의 전설]
야천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남양(南陽)에 물러가 계시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그 가까운데 있는 것을 꺼리므로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경상남도 합천(陜川)으로 옮기셨다.
야천선생이 합천에서 5년 만에 돌아가셨는데,아들 딸들이 어려서 울음 소리가 방에 가득 하였으며,큰아들(應川)이 겨우 열아홉살이었다. 야천선생이 살아 계실 때에 경북 성주(星州)에 사는 진사 진조당(眞操堂) 이광(李光, 1485-1551)과 절친한 사이였다.
야천선생이 병환으로 임종을 짐작하고 부인에게 말하기를
“성주(星州) 이(李)진사댁에 사람을 보내 나의 임종을 알리고 묘탑을 잡도록 부탁하라.”고 하였다.
홍씨부인은 즉시 노비를 보내 이 사실을 전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진사는 미투리 신에 대지팡이를 짚고 20리 밖에서 산꼭대기를 넘어 즉시 야천선생댁에 도착하니, 야천선생은 이미 운명하셨고, 홍씨부인이 보고 반갑게 영접하였다.
이진사는 야천선생댁 뒷산에 이르자 큰 소리로 “야천선생”의 이름을 부르며, “장사 지낼 만한 곳을 얻었노라. 야천선생이 어질면서도 장수 못한 것을 슬퍼하여 자손을 위하여 좋은 땅을 구득하려고 하였더니 이제 과연 구득하였다.” 하고 묘탑을 잡아놓고 이내 내려와 통곡하였다.
이진사는 부인과 상의하여 장사는 유월장(6개월후 장사하는 유교 장의법)으로 정일하고, 이진사 가 말하기를
“이 묘탑은 후손중 고관대작이 나고 관료가 이어진다.” 고 예언하였다.
야천선생댁은 가난하여 외가(파평윤씨)의 도움으로 가사를 유지해 오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유월장기중에 외가에 초상이 났는데 이진사가 잡아 놓은 야천선생의 묘탑을 양보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홍씨부인의 응답이 없자 “너희들은 이진사에게 다시 부탁하면 되겠지만 나는 부탁도 못하니 양보하라.”고 더욱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부득이 홍씨부인이 이 사실을 이진사에게 전하니 이진사는 “부인의 딱한 사정은 이해하나, 그런 묘탑은 다시는 구할 수 없다.”고 하며 묘책을 홍씨부인에게 알려 주었다.
그 묘책은 「윤씨가에 그 묘탑을 일단 양보해 주고 장일전야에 산 아래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이어다, 파 놓은 묘탑 관구자리에 물을 갖다 붓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윤씨네가 와서 묘탑에 물이 고여있는 광경을 보고, 필경 행상을 다른 산으로 옮겨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홍씨부인은 노비녀들에게 이진사가 말한 묘책대로 지시하였다. 그 후 윤씨가에서는 장사준비를 마치고 장사 당일 행상을 차려 산에 도착하여 파 놓은 묘탑 관구자리를 보니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윤씨는“이진사도 별수없구만”하며 행상을 돌렸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홍씨부인은 유월장기를 끝내고 남편인 야천선생의 분묘를 그 자리에 썼다. 야천선생이 작고한 후 가세가 약해지니 노비수를 줄이면서 나이 많은 늙은 노비녀를 내보냈는데, 그 중 전일 묘탑에 물을 이어다 부었던 노비녀가 윤씨가(家)에 찾아가서 종전의 이진사의 묘책 사실을 토로하니 윤씨 가(家)에서 대노하였고 외면하고 도움도 안 주고 행패가 점점 심해져서 그 곳에서 못 살 형편이 되었다.
이때 이진사(진조당)가 경서강의차 성균관에 가면서 야천선생의 부인과 자제분 오형제를 서울로 데리고 갔다.
이렇게 하여 다시 서울로 올라간 홍씨부인은 자제들을 유조인(柳祖認)에게 배우게했고 그후 유조순(柳祖詢), 성제원(成悌元), 이중호(李仲虎) 등에게 수학시켰다.
수학한 자제분 오형제 모두가 급제하여 가문에 큰 대도가 열려 후손들에게 큰 영화가 이어졌고, 지금의 무덤이 즉 그가 정해 준 곳으로 뒤에 보는 사람마다 모두 매우 좋다고 하여 동래(東萊)정씨(鄭氏)의 산소에 다음 간다고 하였다…….

<< 참고문헌 >>
오창공 박동량(朴東亮) - 기재잡기(寄齋雜記)
벽진이씨 진조당(眞操堂) 이광(李光 1485-1551)선생유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