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실

  양반사회의 문벌세족 본관 성씨별 인구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호장을 시조로 하는 성씨
문과 급제자종묘배향문묘봉향반남인의 저서 및 작품벌명당 전설야천 묘의 전설
참봉공(東民)의 생애 북한의 반남박씨 족보란 무엇인가 관직 상식 호칭및 관계
 
 


[다시쓰는 참봉공 동민의 삶과 생애]
참봉공(參奉公)의 휘는 동민(東民)이고 자는 군각(君覺)이며, 문강공 야천(冶川)의 손자로써 응천(應川)의 五男 이다. 1556년(명종11년)에 출생 하셔서 1593년(선조26년) 돌아 가셨고 묘와 재각은 지금의 논산시 상월면 대우리에 있고 시제는 매년 음력 10월6일 이다.
 ■ 가계
6대조는 참판공(參判公 1400-1437 )으로 휘는 규(葵)이며 여러 벼슬을 거쳐 1425년(세종 7년) 판통례원사(判通禮院事).형조참의.이조참의를 지내고, 1429년 황해도관찰사,예조참판(禮曺參判),이듬해에 형조참판이 되었으며,그 뒤에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1436년(세종18년) 경상도관찰사로 치사(致仕)하셨다. 슬하에 병문(炳文 사직공).병균(秉鈞 판관공).병중(秉中 호군공).병덕(秉德 군수공) 4男과 5女를 두셨다.
5대조는 사직공(司直公)으로 휘는 병문(炳文)이며,부사직(副司直)을 지내셨고 슬하에 임종(林宗 상주공).임정(林楨 숙천공) 2男을 두셨다.
고조부는 상주공(尙州公)으로 휘는 임종(林宗 1434-1500 )이고 자는 태지(泰之)이다. 풍덕군수.이천군수,덕원부사,홍천.상주목사,금지중추부사등을 지내셨고,뒤에 호조판서에 추증 되셨다.슬하에 억년(億年 교리공).조년(兆年 정랑공).구년(龜年 벌좌공) 3男과 1女를 두셨다.
증조부는 정랑공 (正郞公)으로 휘는 조년(兆年 1459-1500 )이고 자는 기수(期受)이다. 형 억년(億年)과 함께 과거에 급제(성종20년 1489년)하여 이조정랑(李曺正郞)을 지내고 그 후에 영의정에 추중 되었다.형 억년(億年)과 함께 애학(愛學)해서 후덕으로 덕망이 높았으나, 불행이 도 일찍 돌아가셔서 그 뜻을 펼치지 못하여 모든 사림(士林)이 애통해 하였다.슬하에 소(紹 문강공). 관(?진사공). 집(緝유사공) 3男과 3女를 두셨다.
조부는 문강공(文康公)으로 휘는 소(紹 1493-1534 )이며 조선의 문관으로 자는 언주(彦胄)이고 시호는 문강(文康)이시다.호는 야천(冶川)으로, 야천선생이라 한다. 1519년(중종14년)문과에 장원하였고 사서,필선,설서등을 역임하셨고 조광조 등 신진사류와 함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 하였다.후에 사간이 되었으나 김안로등 훈구파의 탄핵으로 사성에 좌천되어 경상남도 합천(陜川) 야로현(冶爐縣)으로 낙향하여 학문을 닦았다.학문을 좋아 하였고 정의를 지켰으며 그 후에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슬하에 응천(應川 감정공).응순(應順 부원공).응남(應男 남일공).응복(應福 졸헌공).응인(應寅 도정공) 5男과 2女를 두셨다.
부친은 감정공(監正公)으로 휘는 응천(應川 1516-1581 )이고 자는 혼중(渾仲)이다. 1543년(중종38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태인현감,호조정랑, 대구부사,한성부서윤, 사재감정(司宰監正)등을 역임 하였고,아우 응순(應順)의 딸이 선조의 비가 되었으며 선조의 초정(初政)은 당대의 노련한 신하들이 모여 있어서 비록 하찮은 명령을 내려도 신중히 하던 때에 왕을 도와 정사를 잘 보살폈다. 슬하에 동현(東賢 활당공). 동호(東豪). 동노(東老). 동준(東俊). 동민(東民 참봉공). 동선(東善 서포공) 6男과 2女를 두셨다.
 ■ 감정공 응천의 아들 6 형제
공의 큰형은 동현(東賢 활당공)으로 이조좌랑을 지냈고,오로지 학문을 맑은 마음으로 독실하게 배워서 조정에서는 옛 임금의 잘못에 대하여 바른대로 꿋꿋하게 말하는 신하의 風(풍)이 있다고 하였다. 슬하에 돈(燉) 1男과 1女를 두셨다.
둘째 형은 동호(東豪)이고 참봉을 지내셨고 슬하에 엽(燁) 1男과 2女가 있다.
세째 형은 동노(東老)이며 승문원부정을 지내셨고 슬하에 5女를 두셨다.
네째 형은 동준(東俊)이고 예빈시도사를 지내고 슬하에 경. 성.담. 동 영(煐)의 5男과 4女를 두셨다.
동생은 동선(東善 서포공)으로 의정부좌참찬을 지내셨고 슬하에 정(炡) 1男과 1女를 두셨다. 이렇듯 형제들이 덕행과 절개와 의리로써 존경을 받아 서로 스승과 벗이되어 가문이 빛나고 화기가 넘쳤다.
 ■ 참봉공 동민은
참봉공은 소년시절부터 문장이 풍부하여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으니 타고난 운명 이었다.만년에 와서 무자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예빈시참봉(禮賓侍參奉)으로 임명 되었으나 공(公)의 포부를 발휘 하기에는 부족 하였다. 그러할 즈음에 임진왜란 (1592 선조25년 - 1598 선조31년)을 당하여 노모 (정경부인 순천김씨順川金氏 1519-1610)를 모시고 아들 3 형제와 함께 현재의 충남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로 피난을 오시어 1593 년(선조26년) 장질부사에 결려 사경을 헤메 이었다. 이에 李씨부인은 정성껐 병간호를 하였으나 참봉공의 병은 갈수록 점점 더 악화되어 이씨부인의 마음은 안타까 왔으나 결국 6월12일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니 당년 38세 이셨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애통하게 생각했다.둘째 아들 환(煥)의 정사공훈(靖社功勳)으로 증직(贈職)으로 좌승지가 되었다가 후에 다시 호조참판(戶曺參判)으로 가증(加贈) 되었다.
참봉공은 엄숙한 節操(절조)로써 모든 일의 可否(가부)에 있어 論爭(논쟁)이 있으면 결론을 내리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았다. 큰형 활당공(東賢)이 즐겨 말하기를 "家人이 감히 그르다고 못하니 후 일에 直言을 할 사람은 반듯이 이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충성스럽고 정직함은 가문 대대로 전업(傳業)한 것이었다. 이처럼 참봉공의 성격은 하늘에서 타고 난 것이었다. 평시에도 언행을 조심하고 삼가 하며 엄 숙하여 감히 다른 사람이 넘볼 수 없는 기색(氣色)이 있었고 순(順)함에 있어서도 내심(內心)은 온화하였다. 한편 재물에 대해서도 지조를 지켜 주위로 부터 존경을 받았다. 1581년(선조14년) 부친 應川의 상을 당해서 집상(執喪)을 모두 주자(朱子)의 가례에 따랐으며 형제 두 사람이 교대로 묘를 지키고 영위에 1일과 15일 제전을 올리고 대부인(大夫人)모시기를 극진히 하였다.한편 두형(東豪.東老)의 상(喪)을 당해 곡을 하는데 이웃마을 사람들이 감동 지어 눈물 지었다.
 ■ 참봉공 증 정경부인 전주이씨와 열려문
참봉공의 부인은 전주이씨 익안대군의 7대손 장예원사의 공납(公納)의 딸이며 참봉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공에게 출가하여 양처와 현모로써 행실에 어긋남이 없었고 참봉공이 요절(夭折)하니 李씨부인은 뜻을 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이 불쌍하여 참봉공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참봉공이 사망 후 13일후인 6월25일 일부종사의 일념으로 남편의 곁으로 따라가기로 하고 순사(殉死)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의(義)로움에 감동 되어 조정에 보고하여 조정에서 효종 임금은 정경부인(貞敬夫人)이라 하고 그 에게 열녀(烈女)로 정려(旌閭)하였다.지금도 그때 세워졌던 정려문이 영사재(永思齋)옆에 보존되고 있어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 ■ 참봉공 제실 영사재
영사재(永思齋)는 현제까지 건물이 보존 되어있고,후손들이 계속적으로 유지 보수 하고있으나 세월이 가면서 건물 유지가 어려웠으나, 지난 2003년10월30일 충청남도로부터 문화재자료 제383호(사묘재실)로 지정되어 앞으로 보다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워질수 있게되어 다행한 일이다. 참봉공이 돌아가신 지 한세기가 지난 1690년 후손들에 의하여 묘소아래 李씨부인 열려문 옆에 영사재(永思齋)가 건립 되었다
 ■ 보호수 영사재 느티나무
한편 영사재 왼쪽아래 독샘 윗쪽에 있는 느티나무 ( 수령-400년, 수고-11m, 흉고둘레-3.4m )가 전설과 일화가 있는 나무로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인정되어 충청남도로 부터 2001년 6월5일 보호수(2001-14 ,정저목)로 지정된 바 있다.
 ■ 참봉공 묘 및 신도비
참봉공의 묘는 처음에 니산현 명학당(尼山縣鳴鶴塘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에 장사하였으나 己酉(기유년 1609년)에 동소곡(東素谷) 백년봉(논산시 상월면 대우리) 아래 임좌(壬坐)의 원(原)에 합장 하였다. 신도비는 1818년(순조18년) 후손들에 의하여 영사재 앞 독샘 건너편에 세워졌는데,신도비의 찬(撰)은 7대손 종훈(宗薰 1773-1841좌의정)이 했으며 서자(書者)는 시수(蓍壽1787 - 예조참판)이고 전액(篆額) 은 8대손 주수(周壽 1787-1836 예조판서)가 썼다. 이 비형은 8자 지붕의 가담석(加擔石)을 얹고 사각 좌 대에 비신을 놓았는데 비신(碑身)은 오석으로 되어있고 높이가 150㎝ 폭 57㎝이며 두께가 37㎝, 자경은 전액이 5㎝이고, 사면비문은 1,7㎝의 행서이다. 전액은"예빈시참봉 증 호조참판 박공 신도비명"(禮賓侍參奉 贈 戶曺參判 朴公 神道碑銘)이라고 되어있다.
 ■ 참봉공의 아들 3형제
참봉공의 長男은 휘(煇 1579 - 1627 )이며,자는 여회(汝晦)이고, 사헌부집의(증)를 지내셨으며 부인은 안동귄씨(安東權氏)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화하고 부친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공이 7세된던해에 부친(참봉공)이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어 공은 동생과 함께 안경남(安慶男 竹山人)에게로 출가한 고모의 양육을 받았고 조금자라 사계 김장생 선생에게 나아가 공부하여 대의(大義)를 얻어듣고 남창 감현겅 선생을 찾아가서 배웠고 초사에 합격했다.그때는 광해군이 난정(亂政)을 하고 그뒤 인조가 반정(1622년)이 성공하자 공신에 올라 아우인 목사공(병)과 같이 6품위인 사의(司議)로 임명되어 모든일을 공평하게 처리하였다. 그자리에 3년을 있다가 현감으로 나오니 품격은 엄하였다.
세기(世耆).세구(世耉) 두 아드님과 2女가 계시며,후손들이 현재 논산시.대전시 일원에 분포하고 있으며 논산시 상월면 대우리 대명리.상도리에 집단 부락을 이루고 살고 있다. 1997년 봄에 대우리 동네 입구에"반남박씨천"(潘南朴氏阡 반남박씨 조상님들이 모셔져 있는곳 )이라는 표비를 세워 집성촌 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참봉공의 2男는 환(煥 1584 - 1671)으로, 부인은 부안임씨(扶安林氏)이며 자는 여술(汝述), 자호(自號)는 수우(守愚) 이다.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고모와 숙부 밑에서 자랐다. 처음에는 김장생(金長生)으로부터 학문의 기초를 배웠으며, 뒤에는 김현성(金玄成)에게 사사하였다.정치가 어지러웠던 광해군 때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그뒤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6품직에 특제(特除)되어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인제현감을 지냈다.정묘호란 이후 군자감(軍資監).장흥고주부(長興庫注簿)를 거쳐 지평현감(砥平縣監)이 되었다.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현의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수성군(守城軍)과 합류하였다. 인종(仁宗) 때 양천 현령(陽川縣令)과 그뒤 금구(金溝).양천(陽川).단양(丹陽)의 수령을 두루 역임하고, 1663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세성(世城)과 1女가 있으며 후손들이 현재 경기도 수원시.용인시.화성군일원에 분포하고 있으며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경기도 화성군 봉탄면 세곡리에 집단 부락을 이루고 있다.
참봉공의 3男은 병(炳 1587 -1663 )이며 청백리 이신데 자는 소문(少文)이고. 사간(司諫)인 백부 동현(東賢)에게 입양되었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성품이 대쪽같이 곧아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며, 한번 싫다고 하면 비록 왕명이라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광해군의 난정에 과거 볼 뜻을 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독서로 나날을 보내다가 인조반정 후 6품관에 초수(超授)되었다. 곡성현감을 거쳐 충훈부도사를 지내고 토산현감과 진위현령을 역임하였다.1636년(인조 14)병자호란 때는 천안군수로 있었는데 적의 침입을 보고 곧 군졸을 동원하려고 하였지만, 관찰사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좌절되었으나, 1644년 불법행위를 보고도 처리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공청도(公淸道)암행어사 유륜(柳倫)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얼마 뒤 철원부사에 서용되고 이어 사복시첨정과 임천군수·청주목사 등을 역임한 뒤 향리에서 세월을 보냈다. 후손들이 현재 강원도 철원.경기 북부지역및. 충남 논산시 상월면 일원에 집단부락을 형성 하고 있다.
사위 임담은 나주인으로 자 재숙(載叔) 호청구(淸 )1616년 생원이 되고 1635년 증광 병과(增廣丙科)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병자호란에 지평(持平)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총융사(摠戎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남격대(南格臺)를 수비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후 진휼어사(賑恤御使)로 호남지방에 내려갔다가 1639년 좌승지(左承旨)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644년 경상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서원(書院)이 사당화(私黨化) 하는 폐습을 상소하였다. 1646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을 때 유탁(柳濯)의 모반사건을 처결하고 그 공으로 품계가 오르고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 뒤 형조 예조 병조 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간(大司諫) 도승지(都丞旨)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50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1652년 우참찬(右參贊)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승진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로 의주(義州)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가산(嘉산)에서 병사하였다.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1646년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때 류탁(柳濯)의 모반사건을 처결,그 공으로 품계가  오르고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뒤 형조, 예조, 병조, 이조의 참판, 대사간, 도승지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52년 우참찬, 예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에 승진,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로 의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가산에서 병사했다.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참봉공의 후예들
참봉공의 음덕으로 참봉공의 후손은 조선시대 후반기에 반남박씨를 더욱 빛나게 했는데,조선 22대 정조의 빈(賓)이신 가순궁(嘉順宮 1770-1822 참봉공 8世孫)께서는23대 순조를 탄생하여 왕 통을 이었다. 가순궁의 부친 준원(準源 1739-1809)은공조판서. 판돈령부사.금위대장을 지냈으며,한편 준원의 아들 종경(宗慶 1765-1817)은 이조판서.양관제학.규장각제학.훈련대장을 지내 한때 세도(勢道)를 잡아 위세를 떨쳤다.그리고 한말(韓末) 국제조약을 체결의 주역을 맡았던 제순(齊純 1858-1916참봉공 10世孫),초대 주미 공사와 한성부판윤을 지내셨던 정양(定陽.1841-1904.참봉공 11世孫)등 많은 인물을 배출 하였다.
또한 종보(宗輔 1760-1805 호조판서), 종경(宗慶 1765-1817 좌참찬 이조판서), 주수(周壽 1787-1836 예조판서), 기수(崎壽 1792-1847.병조 이조판서), 제헌(齊憲 1808-1863 공조판서), 제인(齊寅 1818-1884 이조판서), 제순(齊純 1858-1916 의정부찬정내부대신),제관(齊寬 1834-1896 이조 공조판서), 정양(定陽 1841-1904) 이조참판 내부대신)은 판서를 지내셨다.
이밖에도 세성(世城 1621-1671)은 승지,태원(泰遠 1660-1722)은 목사(牧使), 필명(弼明 1658-1716)은 이조판서,사덕(師德 1691-1768)은 정산현감,사한(師漢 1688- 1773)은 지중추부사를 지내시는등 많은 인물의 배출은 참봉공의 음덕 이라 하겠다.
 ■ 충남 논산 상월이란 곳은
현재 참봉공의 묘소와 재각 영사재(永思齋) 그리고 정경부인 李氏의 열려문(烈女門) 이 있는 논산시 상월면 대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백제시대에는 열야산현(熱也山縣) 이고 신라 경덕왕때 니산현(尼山縣)으로 불리워지다 그 후 고려 현종9년(1018년) 에 공주(公州)에 속했다. 조선태종14년(1414년) 석성(石城)과 합쳐 니성(尼城)으로 개칭되었다가 1416년 다시 니산(尼山)으로 환원했다.
옛날에는 노성현에 현감이 부임하면 제일 먼저 하는일이 동박(東朴). 서윤(西尹). 남남(南南). 북홍(北洪)에 찾아가 인사하고 이들의 협조를 얻어야 했다. 여기서 말하는 동박(東朴)이란 동쪽 대우리의 반남朴씨. 서윤(西尹)이란 서쪽 병사리의 파평尹씨. 남남(南南)이란 남쪽 하도리의 의령南씨. 북홍(北洪)북쪽 화곡리의 남양洪씨를 말할정도로 옛날 노성현내에서 반남박씨의 위치는 대단하였다고 한다.
조선 정조 즉위년(1777년)에 어명(御名)과 음이 같다 하여 니성현(尼城縣)으로 칭했고,효종때 송시열이 니성산(尼城山)에 闕里祠 春秋祠 (궐리사 춘추사)를 창건하고 공자를 享祀(향사)하면서 중국 산동성의 니구성(尼丘山)을 연상해서 노(魯)나라의 魯城(노성)으로 고쳐져, 노성현 명학당면 우곡리(魯城縣 鳴鶴塘面 牛谷里)이라했고, 고종32년(1845년) 魯城郡 上道面 牛洞 이었고 1914년 논산군(論山郡)으로 되면서 상도면(上道面)과 월오동면(月午洞面)이 합쳐저 상월면 대우리(上月面 大牛里)로 되었으며 1996년 논산시(論山市)로 승격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빛나는 조상의 음덕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반남박씨는 선조를 높여 받들고 집안간에 서로 협동하고 단결하면서 더욱 번성하여 후손에게 빛나는 유산을 물려 줄 수 있도록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