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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혁거세왕과 박씨

  시조 박혁거세왕 신라 박씨 10왕 박씨의 관향 박씨 본관및 중시조 새로 발굴된 나정 유적
중국으로 간 박씨들명문대가 반남 반남박씨 세계도 100 여년 지속된 반박과 밀박관계 해결
경주 오능 옛부터 불리워진 8 朴 순천박씨 8대군 사실 아니다 관향별 선조 행적
 
 



[ 나정유적 팔각건물지 발굴 ]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강(誕降) 신화가 깃든 경북 경주시 탑동 나정(蘿井.사적 제245호)에서 신라 왕실의 제단으로 보이는 완전한 형태의 팔각건물지와 함께 혁거세가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우물 유구가 2003년 11월 발굴됐다. 중앙문화재연구원은 2003년 11월 25일 나정 유적지에서 팔각건물지와 우물지, 배수로, 부속건물지, 유적지를 두른 담장터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팔각형의 건물지는 각변 길이 8m, 동서.남북의 길이가 각 20m로 전체 면적은 90평에 달했다. 또 건물지 중앙에서는 우물지와 함께 조선 순조 2년(1802년)에 건립된 박혁거세 탄강비가 발견돼 우물지가 박혁거세 탄강 신화가 서린 나정일 것으로 추정됐다.
이와 함께 나정을 감싼 담장터(각변 약 50m)가 확인됐으며 귀면와, 연화문 막새, 당삼채 호편(壺片), 화형 청자접시편 등 신라시대의 기와.토기류 등도 출토됐다. 조사단은 “‘나을(나정)에 박혁거세를 제사 지내는 신궁을 세웠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연관된다”며 “신라 왕실의 제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경주 나정, 탑지 아닌 제사 시설인듯
박혁거세 탄강(誕降) 전설이 서린 경주시 탑동나정(蘿井. 사적 245호)의 팔각형 건물지가 사찰 탑의 흔적이 아니라 신궁(神宮)의제사시설이라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이곳은 경주시 문화재정비사업 일환으로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윤세영)이 2002년 1차 발굴을 벌였고, 2003년 2차 발굴 조사했다.
2002년 5월21일부터 6월24일 까지 실시된 1차 조사에서는 완전한 팔각형 기초를 갖춘 건물터가 확인돼 그 정체와 성격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일부에서는 박혁거세 탄강 전설과 관련지어 신라 소지왕, 혹은 지증왕 때 시조 탄생지에 건립한 제사시설인 신궁(神宮)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그러나 신라는 물론 고구려와 백제 불교 사찰에서 더러 확인되는 탑지가 팔각형임을 들어 탑 흔적일 가능성이 많다는 견해가 당시 우세했다.
이 견해를 따른다면 지금의 나정 일대에는 신라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 때 사찰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팔각형 건물지가 탑지라는 견해에 대한 반론은 이미 지난해에 제기됐다. 무엇보다 나정 남쪽 입구에서 문제의 팔각형 건물터로 연결되는 남북 방향 직선 보도 시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발굴결과 탑으로 연결되는 보도블럭 시설이 확인된 삼국시대 탑지는 거의 보고되지 않고 있다. 이런 보도 시설은 물론이고 팔각형 건물지 또한 출토 유물로 보아 신라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 유적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팔각형 건물터가 탑이 아니라는 사실은 2003년 2차 발굴에서 거의 명확하게 확인되고 있다. 무엇보다 팔각형 건물터를 두른 신라시대 사각형 담장 시설이 확인됐기때문이다. 이 담장 시설은 전체규모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고 있는 가운데 동서쪽 60m 가량이 확인됐다.
현재로서는 정사각형 혹은 여기에 가까운 직사각형 담장 시설이 팔각형 건물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팔각형 건물지가 탑지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삼국시대탑 중에서 담장으로 두른 곳은 하나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나정의 건물터가 신궁(神宮)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신궁과 같은 제사시설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담장 안의 건물지가 완전한 팔각형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국내 고고학계와 고건축학계 및 불교학계에서는 팔각형이 불교에서 유래했다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으며, 그 근거로 삼국시대 탑지 중 일부가 팔각형임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라고 1970년대 이후 일본 동양철학계가 주장한다. 도교 전공 학자들에 따르면 팔각형은 도교 혹은 이와 가까운 신선(神仙)사상에서 유래했다. 이런 점에서 불교 도입 혹은 확산 이전 신라 사회에 도교 혹은 신선사상이 국교(國敎)를 방불할 만큼 횡행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신궁(神宮)이라는 말 자체가 도교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고대사학계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나정은 전면 발굴을 벌이는 쪽으로 조사방향이 잡힘에 따라 신라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경향신문>
2천년 신비 벗는 ‘박혁거세 神宮터’
8면의 기단부를 뚜렷히 드러낸 팔각건물지, 무너졌을 때의 모습 그대로 땅 속에 박혀 있는 담장지의 기와편들. 2003년 11월 27일 현장설명회에서 마주한 경주시 탑동 나정(蘿井) 유적은 천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듯이 보였다. 나정 유구를 보기 위해 모여든 고고학자와 역사연구자들은 비가 뿌리는 날씨에도 유물, 유구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대단한 유적이다” “앞으로 이만한 신라 유적이 발굴되긴 어려울 것 같다.” 백발이 성성한 발굴 지도위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경주 나정유적 발굴현장-
◇“나정은 신라 신궁(神宮)터”=2002년 5월 이후 발굴이 진행중인 나정 유적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나정이란 무엇이냐’는 유적지의 성격 규명이다. 흔히 나정은 신라의 건국시조 박혁거세의 탄강(誕降) 전설이 깃든 곳이라고 알려져 왔다. 이런 연유로 1975년 사적 245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모든 탄생신화가 그렇듯 이곳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증거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신화가 역사가 됐고, 그 역사가 기록으로 남았을 뿐이다. 최초의 기록은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나정이 경주부 남쪽 7리에 있다(蘿井在府南七里)’고 쓰여있다. 또 박씨 문중에 전해오는 ‘숭덕전사’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들 기록처럼 나정이 현위치인 탑동 700의 1번지라는 것도 정설은 아니다. 일찍이 학계가 나정을 주목한 것은 ‘나을 신궁’과의 관련성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소지왕 9년(487년) 2월에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지으니 나을은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라고 적었다.
이병도 박사를 비롯, 많은 학자들은 나을을 나정이라고 보았다. 이병도 박사는 ‘奈’와 ‘蘿’가 신라의 ‘나(羅)’처럼 나라를, 나을의 ‘을(乙)’은 우물(井)의 고어인 ‘얼’을 나타낸다고 풀었다. 곧 나을은 ‘나라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나희라 울산대 연구교수도 ‘신라의 국가제사’라는 저서에서 월출산(月出山)이 ‘월나악(月奈岳)’ ‘월생산(月生山)’으로 일컬어졌던 점을 들어 ‘奈’를 ‘나다(生)’ ‘태어나다(産)’로 해석했다.
즉 ‘나을’은 박혁거세의 탄강지인 나정이 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나을을 김씨의 발상지로 보고, 신궁의 위치를 경북 영주지역으로 비정하는 등 이견도 적지 않았다. 이번에 나정 유적에서 통일신라대의 팔각건물지와 함께 우물터가 발굴됨으로써 ‘나을=나정’설이 더 힘을 받게 됐다. 남한 지역에서 통일신라 이전의 팔각건물지가 발굴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지금까지 경기 하남의 이성산성과 이천 설봉산성에서 팔각건물지가 확인됐을 정도다. 이들 팔각건물지는 모두 제사를 지낸 제단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구나 나정의 팔각건물지는 각변의 길이가 8m인 대형인데다 동서.남북 각 60m에 달하는 사각형 담장을 두른 것으로 확인돼 신라의 신궁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또 발굴단이 팔각지 한 가운데에서 우물지를 찾아냄으로써 나을 신궁에서 시조신인 박혁거세를 제사지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고 있다. 우물가에 신전을 세워 제사를 올리는 예는 고려시대 개성 대정묘(大井廟)와 일본 고대의 이케가미 소네(池上增根) 신전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발굴단의 김정기 지도위원은 “우물지는 우물이기보다는 나정을 상징하는 샘인 것 같다”면서도 “문헌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나정이 나을 신궁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나정 유적은 고대 건축의 보고”=발굴 현장 설명회장 옆에 전시된 출토유물은 작은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평기와, 귀면와, 연화문 막새, 사자무늬 막새, 무문전(문양 없는 벽돌), 등잔 토기, 당삼채(중국의 채색토기를 말함) 호편, 꽃모양 청자접시편, 백자편 등 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은 나정이 오랫동안 제단으로 사용돼 왔음을 추정케 했다. 많은 수가 발굴된 막새류는 고신라시기의 단판 연화문에서 통일신라기의 사자무늬까지 폭이 매우 커 나정이 고신라 이래 지속적으로 보수.관리됐음을 보여줬다.
이와 함께 발굴현장에서 수습되지 않은 채 층을 이뤄 쌓여있는 기와들이 눈길을 끌었다. 김동현 지도위원은 “층층이 쌓인 기와들이 시대별로 단층을 이루고 있다”며 “건축물과 담장지의 축조 방식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정에서 확인된 유구는 신궁터로 추정되는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2구, 배수로 등. 현재로선 팔각건물과 담장의 축조 시기가 통일신라에 추정될 뿐 유구의 성격과 편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정영화 지도위원은 “고대 건물지의 유구가 이토록 잘 남아 있는 것은 드물다”면서 “발굴기간을 연장해 시간을 갖고 발굴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나정(蘿井) 유적
한국인들의 성씨는 중국에서 빌려온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없는, 토착성이 강한 성씨가 두가지 있는데 바로 박(朴)씨와 김(金)씨 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김’의 경우 고대 한국어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한 호칭으로 단군 왕검(王儉)의 ‘검’이 바로 그것이다. 또 그 흔적은 상감의 ‘감’, 또는 임금의 ‘금’ 등 근대어에도 남아 있으며 신을 의미하는 일본어 ‘가미’와 공경대부를 뜻하는 ‘기미’도 같은 어원이라고 한다. 반면에 ‘박’은 ‘밝다’라는 뜻의 고대어에서 연유되는 성씨인데 신라의 초대 왕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시조다. ‘혁거세’, 또는 불구내(弗矩內)라 불린 이름도 ‘해가 널리 비친다’라는 뜻이라고 하니 그를 왕으로 모신 신라인의 최대의 찬사가 담겼다고 해야 할 듯싶다.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는 북방계의 천손(天孫)신화와 남방계의 난생(卵生)신화가 융합된 것으로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진 북방계의 기마민족이 토착 남방계인들을 복속시켜 나가면서 신라국을 창건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한(辰韓)땅의 여섯마을 우두머리들이 알천상류에 모여 군왕을 받들어 모시고자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양산 기슭의 나정(蘿井) 우물가에 번개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드리워진 흰 말이 엎드려 절하고 있었다. 찾아가 살펴보니 자줏빛 알이 있었고 말은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깨뜨리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동천 샘에 목욕을 시키자 몸에서 빛살을 내뿜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박혁거세다.
박혁거세의 탄강(誕降)신화가 깃든 경북 경주시 탑동 나정에서 제단으로 보이는 팔각건물 유적과 함께 우물 유구가 발굴됐다고 한다. 고고학은 ‘달빛에 물든 신화의 세계를 햇빛이 비치는 역사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징검다리’라 했던가. 트로이의 목마도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의 끈질긴 추적과 노력이 없었다면 아직 신화의 세계에 묻혀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번 나정 발굴이 아직도 수수께끼 가득한 우리 상고사의 비밀을 풀어가는 소중한 단초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