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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혁거세왕과 박씨

  시조 박혁거세왕 신라 박씨 10왕 박씨의 관향 박씨 본관및 중시조 새로 발굴된 나정 유적
중국으로 간 박씨들명문대가 반남 반남박씨 세계도 100 여년 지속된 반박과 밀박관계 해결
경주 오능 옛부터 불리워진 8 朴 순천박씨 8대군 사실 아니다 관향별 선조 행적
 
 



[ 옛부터 불리워진 8 朴 ]
모든 박씨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왕을 유일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는 다른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분명한 것이 특징이다.박혁거세왕의 탄생에 대하여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혁거세왕으로 부터 시작된 박씨는 신라의 멸망과 후삼국,고려(高麗), 조선시대를 이어오며 여러 관향으로 분적되었다. 여러 관향으로 분적한 박씨중에서도 옛부터 8 朴 이라고 불리워지는 박씨들이 있었으니, 반남박씨, 밀양박씨, 고령박씨, 함양박씨, 죽산박씨, 순천박씨, 무안박씨, 충주박씨를 8 朴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이 8 朴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반남박씨(潘南朴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고령박씨(高靈朴氏)       ▣함양박씨(咸陽朴氏)
▣죽산박씨(竹山朴氏)       ▣순천박씨(順天朴氏)       ▣무안박씨(務安朴氏)       ▣충주박씨(忠州朴氏)


[ 반남박씨(潘南朴氏) ]
반남박씨의 세계는 고려 고종 때 반남현(潘南縣) 호장을 지낸 박응주 (朴應珠)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이지만 상계가 실전되어 혈연계보와 분적의 연원을 밝히지 못한다. 그래서 반남박씨는 그를 시조라 하지 않고 선조로, 박혁거세를 도시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선조의 발상지와 세거지가 반남이므로 이를 본관으로 하였다.
선조 박응주의 묘소는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하고 있다.
반남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15명, 왕비 2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호당 5명, 청백리 1명, 공신 6명, 장신 3명에 문묘에 배향된 분도 1명이 있어 모든 박씨 중에서 벼슬 열력이 가장 화려하다. 반남박씨가 이토록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문정공(文正公) 박상충(朴尙衷)이 고려 말에 정계에 두각을 드러내고, 그의 아들 평도공(平度公) 박은이 조선조에 들어와서 반남박씨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문정공 박상충(자는 성부(誠夫), 시호는 문정(文正))은 공문왕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이 되었다. 당시 예의사에서 관장하는 향사의 의식이 일정하지 못하므로 그가 고서를 참고, 사전(祀典)을 작성했다. 우왕 초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이고 북원으로 도망했는데 김의의 종자가 돌아오자 이인임(李仁任), 안사기(安師琦) 등친원파가 대우를 극진히 하므로 그가 「김의가 명사를 죽인 죄는마땅히 다스려야 할 것인데 재상이 그 종자를 후대한 것은 안사기가 김의를 사주한 것이 분명하오니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사직에 화가 미칠 것이다」고 상소하여 안사기를 처형케 했다. 이인임등이 백관과 연서하여 북원의 중서성에 글을 보내려 하자 그는 선왕이 이미 명을 섬기기로 하였는데 다시 북원을 섬길 수 없다하여 서명을 거절했다. 판전교시사로 있을 때 북원의 사신이 오자 또 상소, 원을 섬김이 불가하다하여 사신을 돌려보내게 했다. 간관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과 함께 친원파의 죄를 다스리라고 상소하다 도리어 연루, 장류 도중죽었다. 경사와 역학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예도에 밝았다. 그의 아들인 평도공 박은(朴訔)은 고려 말에 개성부 소윤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두차례의 왕자 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공신에 오르고 태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박규(朴葵), 박강(朴薑), 박훤(朴萱)은 박은의 아들 로 모두 현달했으며, 특히 박규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박규는 세종 때 예조와 형조의 참판,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그의 현손 문강공(文康公) 박소(朴紹)는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다가 훈구파에 의해 파직되었다. 소의 아들 응천(應川), 응순(應順), 응남(應男), 응복(應福), 응인(應寅) 5형제도 모두 현달했으니. 박응천은 중종조에 한성부서윤을 지냈고, 정의공 박응순은 딸이 선조비가 되어 반성부원군에 오르고 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남일공(南逸公) 박응남은 명종조에 참의를 지냈으며 박응인은 도정을 지냈다. 이들 5형제 중에서도 맏이 응천, 넷째 응복의 자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활당(活塘) 박동현(朴東賢)은 응천의 아들로 선조조에 보덕을 지냈고, 동생 서포공(西浦公) 박동선(朴東善) 은 인조조에 좌참찬을 지냈다.
충숙공(忠肅公) 박정(朴炡)은 동선의 아들로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에 오르고 금주군에 봉해졌다.
숙종 조에 좌승지를 지낸 박세견(朴世堅)은 정의 아들이고, 소론의 중진으로 숙종조에 좌참찬을 지낸 문효공(文孝公) 박태상(朴泰尙)은 세견의 아들 이다. 철종조에 좌의정에 오른 숙헌공(肅憲公) 박회수(朴晦壽)는 태상 의 5대손이다. 또 문정공(文貞公) 박세당(朴世堂)은 세견의 동생으로 숙종 때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을 비판하다가 파직 되었다. 그는 부제학 박정의 아들로 1660년(현종 1) 증광문관에 장원하고 부수찬, 황해도 암행어사를 거쳐 예조와 형조의 참의를 지낸 뒤 숙조 때 공조와 이조 및 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판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소론에 속한 실학파 학자로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저술하고 농촌 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의 학풍을 이룩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이증환, 안정복 등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 알려졌다. 저서로는 <사변록(思辨錄)> <산림경제(山林經濟)> 등이 있다.
박태보(朴泰輔)는 세당의 아들로 백부 세후에게 입양 됐다. 그는 숙종 때 호당을 거쳐 암행어사 등을 지내고 기사환국(己巳 換局)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유배 도중 죽었다.
문정공(文 貞公) 박종훈(朴宗薰)은 태보의 5대손으로 헌종 때 좌의정에 이르렀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나 순조의 행장을 지었다. 한말에 개화파 인사로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핵심이었던 문익공(文翼公) 박정양(朴定陽)도 응천의 후손이다. 그는 한말 총리대신으로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시호는 문익(文翼). 판관 박제근의 아들로 1866년(고종3)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참파 등 을 걸쳐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도일,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돌아 와 이용사 당상 경리사가 되었다. 그 후 이조참판, 협판교섭통상사무, 도승지, 협판내무부사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1887년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어 도미, 미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제정 했다. 1889년 귀국한 후 호조판서, 교정청 당상, 한성부 판윤등을 거쳐 갑오경장 후 제1차 김홍집 내가그이 학부대신이 되고, 이어 내각 총리 대신이 되었다. 1896년(건양1) 아관파천이 일어나 김홍집이 살해되고, 내각이 의정부로 개혁되면서 참정대신이 되었다. 한편 박응복의 가계에서는 그의 아들 박동열(朴東說)이 1608년(광해군1) 충주목사, 대사성에 이어 예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이황(李滉)의 문묘 배향을 부당하다고 상소하자 이에 격분한 유생들이 정인홍의 유적을 깎아 버렸다. 그러자 이에 대로한 광해군이 유생들을 투옥시킬 때 이를 말리다 실패, 조정에 있기를 꺼려 나주목사로 나갔다.
오창공(梧窓公) 박동량(朴東亮)은 그는 대사헌 박응복의 아들이자 동열의 아우로 1590년(선조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검염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에 호종하고,승지에 승진하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이어 동지증추부사.도승지를 지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으로 금계군에 봉해지고 형조판서를 지낸 후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문정공(文貞公) 박미는 선조의 딸 정안옹주와 결혼하여 금양군에 봉해졌고, 미의 동생 박의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사위로 인조조에 호당에 뽑히고 홍문관의 수찬, 교리, 장령 등을 지냈다. 당대의 유종으로서 문묘에 배향된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는 박의의 아들로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서인에 속했으며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어 좌의정에 올랐다.
충희공(忠僖公) 박명원(朴明源)은 박미의 5대손으로 영조의 딸 화평옹주와 결혼, 금성위가 되었다. 글씨를 곱게 써서 나라의 애경사 때 여러번 금옥보책명정서관에 임명되었고, 죽은 뒤 정조가 친히 글을 지어 신도비를 세웠다.
실학파 학자로 유명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실학자이며,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지돈령부사 박필균의 손자이며 박사유의 아들이다.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우고, 1780년(정조4)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중국인들의 이용후생하는 실생활을 보고 실학에 뜻을 두었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을 거쳐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 한성부 판관,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내고, 양양부사에 승진했다가 1801년 (순조1)사직했다. 박지원의 양반전은 당시 홍대용.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며, 그가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정치, 경제, 천문, 지리,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실학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고루한 양반을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정경대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연암집(燕巖集)> <허생전(許生傳)> <과농소초(課農小抄)>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그의 아들 문익공(文翼公) 박규수(朴珪壽)는 박지원의 손자이며, 박종채의 아들로서 1848년(현종 1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병조좌랑 등을 거쳐 1864년(고종 1) 병조참판, 대제학,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 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873년 우의정에 올라 사임, 다음해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이에 호응,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으며,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 수입과 문호 개방을 주장했다.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충헌공(忠憲公) 박종악(朴宗岳)은 박미 의 6대손으로 정조 때 우의정에 올랐다. 한말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 이자 철종의 부마인 현현거사(玄玄居士) 박영효(朴泳孝)도 미의 후손 이다. 그는 한말 궁내부대신을 지냈으며, 자는 자순(子純), 호는 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금릉위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1882년 수신사로 도일,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자했다. 일본의 조야를 시찰하고 돌아와 정치적 개혁을 기도했으나 수구파들의 정권장악으로 실패, 이어 한성부 판윤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3일만에 실패하여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일본으로 망명, 1894년 갑오경장으로 귀국하여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기용되었다. 그 후 반역음모 사건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대신에 임명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정부에 의해 후작이 되었으며, 뒤에 중추원 고문을 거쳐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세양공(世襄公) 박강(朴薑)은 세조조에 좌익공신 3등으로 금천군에 봉해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그의 손자 박용(朴墉)은 딸이 세자빈 (인종의 비인 인현왕후)에 책봉됨으로 해서 금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의 아들 공순공(恭順公) 박숭질(朴崇質)은 연산군 때 좌의정에 올랐 으나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100여 일 동안 등청하지 않아 면직되었다. 이러한 그의 선견지명으로 인해 후일 중종반정 때 일문이 무사하게 되 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