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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부터 불리워진 8 朴 ]
모든 박씨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왕을 유일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는 다른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분명한 것이 특징이다.박혁거세왕의 탄생에 대하여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혁거세왕으로 부터 시작된 박씨는 신라의 멸망과 후삼국,고려(高麗), 조선시대를 이어오며 여러 관향으로 분적되었다. 여러 관향으로 분적한 박씨중에서도 옛부터 8 朴 이라고 불리워지는 박씨들이 있었으니, 반남박씨, 밀양박씨, 고령박씨, 함양박씨, 죽산박씨, 순천박씨, 무안박씨, 충주박씨를 8 朴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이
8 朴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반남박씨(潘南朴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고령박씨(高靈朴氏)
▣함양박씨(咸陽朴氏)
▣죽산박씨(竹山朴氏)
▣순천박씨(順天朴氏)
▣무안박씨(務安朴氏)
▣충주박씨(忠州朴氏)
[ 죽산 박씨(竹山朴氏) ]
죽산박씨의 시조 박기오(朴奇悟)이다. 그는 고려 초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태보 삼중대광으로 계림군에 봉해졌다가 뒤에 죽주백에 개봉되고, 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리고 죽주가 죽산으로 개칭 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죽산(竹山)으로 하게 되었다 .
죽산박씨의 세계는 박기오의 후손에서 철성백<서>파 찬성공<훤>파 태복경<의지>파 문광공<전지>파의 4파로 크게 갈린다.
철성백파의 파조 박서는 고려 고종 때 서북면 병마절도사로 몽고군이 대거 침입할 때 구주성(龜州城)을 사수하고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그의 후손에게 음성(陰城)과 고성(固城)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그의 후손에서 음성박씨와 고성박씨가 분적하게 되었다.
문광공파의 파조 행산(杏山) 박전지(朴全之)는 문과에 급제, 사국 한림원의 벼슬을 역임. 1279년(충렬왕 5) 원나라 세조가 고려의 양반 자제들을 뽑아 입시시킬 때 선발되어 정동성 도사 가 되었다. 귀국 후 안동부사를 거쳐 전중윤 지제교를 지내고,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삼사 좌사 한림 학사승지 밀직부사 개성부윤 등 을 역임하고 연흥군에 봉해졌으며, 1321년(충숙왕 8) 수첨의찬성사 정승에 이르렀다. 충숙왕 때 수첨의찬성사 정당문학을 지내고 경원에 봉해진 문강공(文康公) 박원(朴遠)은 그의 아들이고, 죽산군 문보 문충공 덕룡 판서 수룡
제학 문화 충현공 문수는 모두 박원의 아들이다.
조선조에서는 55명의 문과 급제자와 2명의 상신, 그리고 호당 1명, 공신 3명을 배출했는데, 문과 급제자의 수는 박씨의 여러 본관 가운데 서 밀양(密陽) 반남(潘南) 함양(咸陽) 고령(高靈) 박씨의 다음가는 숫자이며, 상신 2명은 반남박씨의 7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문헌공(文憲公) 만절당(晩節堂) 박원형(朴元亨)은 연흥군 박고의 아들로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 직장 의금부 도사 등을 역임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좌승지 겸 지형조사를 거쳐 다음해 사가독서를 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도승지로 좌익공신 3등이 되고, 여러 판서직을 거쳐 좌의정 에 오르고, 1459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판으로, 호조 형조 이조 예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지내고, 1466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익대공신
2등으로 연성부원군에 진봉되고, 이어 영의정에도 올랐다. 그는 세종∼예종조에 걸친 충신으로 정승에까지 올랐으며 극히 청렴하고 검소했다. 어느 해 그의 생일날에 아들 정안공(靖 安公) 안성(安城)이 술상을 차려 올리자 그는 기쁘게 마시고 나서 <오늘밤 등불 앞에 몇 순배 술을 드니 너의 나이 서른 둘이라. 우리 집 가보로는 오직 청백뿐이니 부디 잘 전해다오>라는 시를 읊어 후손 을 경계했다 한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호(梨湖) 박홍구(朴弘耉)는 원형의 5대손으로 광해군 말년에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인조 반정으로 삭직되고 이괄(李 适)의 난 때 광해군의 복위를 음모했다는 조카 박윤장(朴允章)의 사건 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던 중 자결했으나 숙종 때 신원 복관되었다.
박명현(朴名賢)은 영의정 박원형의 후손으로 선조조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 목사 홍가신(洪可臣)의 휘하에서 반란군을 청양(靑陽)까지 추격하여 섬멸하고 정유재란 때는 충청도 방어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 면서 전공을 세워 1604년 청난공신 2등이 되고 연창군에 봉해졌다.
충민공(忠愍 公) 박명룡(朴命龍)은 인조조 이괄의 난 때 형 성룡(成龍)과 함께 부원수 이수일(李守一)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난이 평정된 뒤 고부 군수 병마우후 등을 지내고 정묘호란 때 안주(安州)의 방위전에서 전사했다.
이 밖의 인물로는 제 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공을 세우고 죽성군에 봉해졌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갖고 방간(芳幹)측에 가담, 방원(芳遠)과 충돌했다가 참살당한 박포(朴苞), 임진왜란 때 청도 조전장으로 참전하고 뒤에 경상도와 공홍도의 관찰사를 지낸 한천(寒 泉) 박경신(朴慶新), 영조 때의 학자로 경전과 백가에 통달하고 시 서 화에도 능한 만봉(晩峰) 박종유(朴宗儒)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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