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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혁거세왕과 박씨

  시조 박혁거세왕 신라 박씨 10왕 박씨의 관향 박씨 본관및 중시조 새로 발굴된 나정 유적
중국으로 간 박씨들명문대가 반남 반남박씨 세계도 100 여년 지속된 반박과 밀박관계 해결
경주 오능 옛부터 불리워진 8 朴 순천박씨 8대군 사실 아니다 관향별 선조 행적
 
 



[ 경주 오능 ]
신라의 시조왕릉으로 전해오는 오릉(五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오릉은 경주 시내중심에서 남으로 뻗은 포석로 좌측에 위치해 있는 신라의 능묘로 봉분은 직경 20m 내외, 높이 10m내외로 사적 제 172 호로 지정되어있다.
모두 5기의 능이 있는데, 박혁거세 왕과 왕후인 알영왕비,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의 5위(位)의 능묘로 담암사 북쪽에 있다고 옛 문헌에 전하고 있고,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외형은 경주 시내 평지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다른 많은 삼국 시대 신라 고분과 같이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 둥근 형상으로 흙을 쌓아 올린 무덤)으로 4기(基)는 원형분(圓形墳 둥근 원형상의 무덤)이나 1기는 표형쌍분(瓢形雙墳 바가지 형상의 나란히 쓴 남편과 아내의 두 무덤)으로 되어 있다.
제1릉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 m로 5기(基 무덤) 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 m 이다. 제3릉은 제2릉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7.2 m로 표형쌍분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형분 2기가 합쳐진 것이다. 제4릉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 m이다. 제5릉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 m이다. 이와 같이 5기 가운데 1기는 표형쌍분으로 2인용 무덤이기 때문에 오릉의 실제 피장자는 6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이와 같은 대형(大形)의 원형봉토분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것으로 후세 수축(修築)이었으면 몰라도 혁거세왕 당시의 고분 형식은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오릉을 사릉(蛇陵 뱀사, 큰 언덕 릉)이라 했는데,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 합장(合葬)하려 하자 뱀의 괴이한 변고가 있어 각각 장사 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이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는데, 혁거세왕이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 등 박씨 4왕을 사릉원내(蛇陵園內)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혁거세왕과 알영부인(<閼英夫人)을 재위 62년 만에 승천하였다가 그 후 7일만에 유체(遺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고 왕후도 따라 승하하니 사람들이 합장(合葬)하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 지냈으므로 오릉 또는 사릉이라 하며 담암사(曇巖寺) 북릉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담암사 위치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오릉의 제실(齊室)인 숭덕전(崇德殿) 앞의 홍전문(紅箭門)이 사찰의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이용하여 서 있는데, 오릉 옆에 사찰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이 당간지주를 담암사의 유물로 믿고 있다.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경주 IC → 약 2km, 5분정도 소요 직진 후 좌회전 → 약 200m 정도 직진 후 우회전 → 오릉 주차장
고속버스이용
터미널 정문 맞은편 도로에서 500 ~ 507번 내남, 봉계 방면 버스를 타면 15분정도 소요. (30분 간격 )
터미널에서 시내방면으로 좌회전하여 올라가다 보면 두 번째 신호등에서 우회전하여 계속 가면 남천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 가면 오릉이 나온다.
[ 경주 오능 설화 ]
경북 경주시 문천동에는 다섯 개의 능이 한데 있는 오능 또는 오체능이란 곳이 있는데 이는 신라 시조왕이고 모든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묘이다. 이 오능에 관한 전설 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이런 한 이야기가 있다.
시조 박혁거세 왕이 나이가 무척 들었을 때였다. 이상히도 밤마다 어딜 다녀오는 것이었다. 이런 일에 가장 의아해 한 사람은 알영부인이었다.
왕을 믿는 그녀였지만 밤마다 나가시는 왕에게 궁금함을 표하였다. 왕은 잠시 다녀온다는 말 뿐 그이상의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늦은 밤 신하의 호의도 없이 나가는 것이 부인으로서는 큰 걱정이었다. 그런데 왕이 나갈 땐 꼭 말방울 소리가 들렸는데 말 발굽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그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의 일에 간섭 안 하는 그녀였지만 이번은 왠지 걱정과 의혹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도술을 잘 쓴다는 사람을 불러 자초지정을 이야기 하고는 대책을 물었다. 하지만 나라의 왕이 연관된 일이라 그는 계속 알 수 없다며 발뺌 하였고 그럴수록 부인은 점점 강압적으로 물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부인은 나름대로 생각하여 작은 미물로 변하는 도술을 물었고 그도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도술을 일러 주었다.
어느날 밤 왕은 또 스르르 일어났다. 밖에는 여전히 말방울 소리가 들렸다. 부인은 재빨리 작은 미물로 변해 말에 붙었다. 말은 순식간에 왕을 태운 채 하늘로 솟더니 천국에 도착하였다. 옥황상제는 예를 갖추는 왕을 아주 반갑게 맞았다. 곧 풍악이 울리고 왕과 옥황상제는 음식을 들었다. 옥황상제는 왕에게 이제 이 곳에서 함께 할 날이 머지 않았다며 기쁨을 표하였다. 그렇게 담소를 주고 받던 중 갑자기 옥황상제의 얼굴에 노여움이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이 보시오, 어찌하여 이 곳에 인간을 데리고 왔소. 인간을 데리고 오면 안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그랬으나 혁거세왕은 전혀 뜻밖이고 영문을 모르는 일이라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옥황상제 는 말을 데려다가 빗질을 시켰다.
그러자 한 미물이 떨어지더니 점점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바로 알영부인이었다. 그녀는 옥황상제에게 용서를 빌며 혁거세왕과의 친분은 변치 말아 달라고 애원 하였다. 그러나 옥황상제의 노여움은 가실 줄 몰랐다. 알영부인은 다시 인간 세계로 보내졌다. 그런데 그 다음날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궁 앞에 혁거세왕의 몸이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널려 있었던 것이다. 곧 궁안은 눈물바다로 변했고 장을 치른 후 혁거세왕의 시신을 한데 모아 왕릉을 만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커다란 폭음과 함께 왕릉이 폭발 하며 왕의 시신이 나와 널려졌다. 그런 일이 있자 신하들은 궁리 끝에 시신을 각 부분으로 나눠 다섯 개의 능을 만들어 안치 하였다 하고 그 능이 오능이 되었다고 한다.
◆나정(蘿井)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들어 있는 우물로 사적 제 245호이다. 경주시 탑동 오릉에서 남동쪽으로 약 1 km 떨어진 소나무 숲속 가운데에 조그만 비각이 있다. 그 옆의 우물을 나정(蘿井)이라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나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한 지절원년 임자(前漢地節元年壬子:BC 69) 3월 1일, 신라 건국의 주역인 6촌(村)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선출하고 도읍을 정하자고 결정한 뒤 일행이 높은 곳에 올랐다. 그런데 양산(陽山)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는데, 이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상히 여겨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 짐승들이 춤추듯 노니니, 천지가 진동하며 해. 달이 청명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 하여 혁거세라 이름하고, 알이 박같이 생겼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마침내 자라 신라의 시조가 되었다. 서기 6년(남해왕 3년)에 이곳에 묘전을 세우고 왕이 즉위하면 반드시 제 를 올렸다.
현재 나정은 아득한 옛날에는 우물이 있어나 싶게 황량하다. 나정은 신라정이라고도 불린다.'나(蘿)는 댕댕이 덩굴.담쟁이 덩굴을 뜻하는 글자다.다른 나무의 몸통을 감고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는 식물이다. 신화에 따르면, 이 샘가에는 "흰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고 말 앞에는 "보라빛 알 한개가 놓여 있었으며, 사람들을 보자 말은 울음 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로 날아올라간 말은 천마다. 바로 이 천마의 천계 상승으로 예고되는 것, 그것이 바로 혁거세의 천손하강이다.
찾아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경주로 들어가면 탑정동 초입에 오릉이 나온다. 오릉으로 들어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틍어 야트막한 구릉을 오르면 조그만 사당이 있다. 나정이다.
◆알영정(閼英井) 비각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로, 오릉원 내에 있으며, 우물터에 비각이 서있다
◆성모사(聖母祠)
성모사는 어악의 선도산(해발 380m) 주봉의 높고 큰 바위 밑에 있으며 박혁거세의 모후인 선도성모를 모신 사당이며 천년의 웅지를 품었던 옛서라벌 들판을 감싸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26대(진흥왕) 왕때 안흥사의 지혜라는 비구가 승려를 데리고 사당의 신령을 모신 자리 아래에서 황금 160냥을 캐었다고 하며 54대 경명왕께서는 매 사냥을 즐겨하여 직접 이곳에서 매를 날렸는데 공교롭게도 매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신모에게 기도하기를 매를 찾게되면 이 사당에 봉작을 하겠다 하였더니 얼마되지 않아 매가 날아와 탁자에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에는 후손 언수가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고 성모사에 피란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신령을 모신 성모사는 신이(神異)한 전설과 오랜 역사를 가진 사당임을 알 수 가 있다.
구한말 전 참봉(前 參奉) 기문(基汶)이 비각을 중건하고, 다시 1963년에 사우(祠宇)를 중건하였고, 현재의 사당은 1974년 전참봉 박재호의 아들 성형 준형 형제의 특성으로 웅장하게 중창하였는데 오릉성역사업을 주관했던 박재원 상임이사의 노고가 많았다.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는 나정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성령의 힘에 의해 잉태되어 성모(聖母)에게서 났다는 또 한가지 설이 있다. 성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로 선술(仙術)을 얻어 신선이 되어, 동해 바다 위에 나와 놀다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경주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 머물다가 시조왕을 낳았다고 한다.
◆숭덕전(崇德殿)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숭덕전은 박혁거세왕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으로 신라오릉 옆에 있으며 1992년 7월 18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시조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묘전이다. 남해왕 3(서기 6)년에 시조묘를 세우고 사시로 제사를 받들었고 친누이를 주제토록 하였다. 신라 제21대왕인 소지왕 9(487)년에 지금의 나정 옆에 신궁을 세워 새로이 즉위하는 임금은 반드시 신궁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는데 신궁의 이름을 나을신궁이라고 하였다 한다.
본래 1429년(세종11) 왕명에 의해 창건되어, 봄과 가을에 증사(中祀)의 예로 치제(致祭)할 것을 정식으로 정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1600년(선조 33)에 재건하였고, 1694년(숙종 20)에 수리하였으며 1723년(경종3) 숭덕전의 현판을 하사하고 참봉 3인을 두어 관리하게하였다. 1752년(영조28) 묘정에 비석을 세워 신라 시조가 백성에게 끼친 유덕을 기록하였다.
숭덕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향축실, 전사청이 있고 남쪽 숙경문을 지나면 상현재, 서재 및 영숭문이 있다. 상현재 남서쪽 협문으로 들어가면 숭성각이 있고 영숭문 남쪽으로 조흥문이 있다. 서재 옆 협문을 통과하면 안마당이 있고 남쪽에 고자실 및 포사가 위치하며 북쪽에 추보헌이 있다. 추보헌 뒤쪽으로는 알영각이, 안마당 동쪽에는 동행각이 위치하고 그 뒤로 예빈관이 있다.
제관으로는 헌관(獻官), 축(祝), 장찬(掌饌), 집준(執尊), 집사(執事), 찬자(贊者), 알자(謁者) 등이다. 헌관은 관찰사가 왕을 대행하여 제물과 제문을 내리어 제사를 지내도록하였다.
또한 경내에는 1759년(영조 35)에 세워진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 숭덕전 위편에는 알영왕비의 탄생지라 하는 알영정 터가 있다.
세종이 삼국 시조들에 대한 사당을 지으라는 조서를 내려 세운 제전이므로 국가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부터 박씨문중에서 관리 및 행사 전반을 주관한다. 현재 춘분과 추분에 제향을 봉행한다.
1971년 박정희대통령을 비롯하여 문중성손들과 합심협력하여 대성역을 이룩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 숭덕전은 신라오릉보존회에서 소유, 관리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