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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혁거세왕과 박씨

  시조 박혁거세왕 신라 박씨 10왕 박씨의 관향 박씨 본관및 중시조 새로 발굴된 나정 유적
중국으로 간 박씨들명문대가 반남 반남박씨 세계도 100 여년 지속된 반박과 밀박관계 해결
경주 오능 옛부터 불리워진 8 朴 순천박씨 8대군 사실 아니다 관향별 선조 행적
 
 



[ 신라 8 대군 분봉 허구설에 대한 고찰 ] - 순천박씨
신라 경명왕의 8 대군 분봉(分封)에 대한 허구설(虛構說)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고 반남박씨 역시 경명왕의 8 대군 분봉설을 부인하고있는데, 순천박씨도 경명왕의 8 대군 분봉(分封)에 대하여 부인하고 있는데, 순천박씨에서 주장 하는 신라 8 대군(강남대군)분봉(分封)의 허구설에 대한 고찰(考察)을 옮겨 왔습니다.
1. 머리말
역사(歷史)는 모든 기록(記錄)과 고고학적(考古學的) 및 과학적(科學的)으로 고증(證據)과 증거를, 그리고 공인(公認)된 것을 우리는 역사(歷史)라고 한다.
종사(宗史)에 대하여서도 사적(史的) 문헌적(文獻的)으로 고증(考證)된 것을 주장(主張)하고 서술(敍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천여년전(千餘年前) 미지(未知)의 조상(祖上)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써 신중(愼重)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700년 전(지금으로부터는 1천여 년 전)의 조상(祖上)을, 역사서(歷史書)는 물론(勿論)이고 어떠한 기록(記錄)과 증거(證據)도 없는 설화적(說話的)(주. 설화정도(說話程度)는 있지 않을까 사료(思料)됨.)인 것을 두찬(杜撰)으로 남겨 많은 사람들이 우(愚)를 범하게 하고 있다.
물론 이후에 2~300년 동안 역사적(歷史的) 문헌적(文獻的)으로 고증(考證)하며 이론정연(理論整然)하게 그 허구성虛構性)(을 지적비판(指摘批判)을 많이 하고들은 있지만, 이상하게도 하면 할수록 역사적(歷史的)근거(根據)와 문헌文獻)(이 없는 그 두찬(杜撰)과 애매모호(曖昧模糊)하고 허무맹虛無孟浪)랑(한 소개서(紹介書)를 사실事實)(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고, 어떤 문중(門中)에서는 선조(先祖)의 휘자(諱字)를 작(作)하고 선계(先系)를 이어 만들어서 조상(祖上)으로 받들고, 설단(設壇)하여 심지어는 봉사(奉祀)까지 하고 있으니 비록 세계(世系)도 휘자(諱字)도 모르지는 참 조상(祖上)님을 버리고 그 위치(位置)에 왕자(王子)란 허울을 씌워 가조상(假祖上)을 안치(安置)하고 있으니 한심할 일이다.
다음은 소위(所謂) 바로 이것이 신라팔대군 분봉설(新羅八大君 分封說)이다.
최초(最初)의 문헌자료(文獻資料)로는 당시(경명왕원년景明王元年. 917년)로부터 약 700여년이 지난 1620년 간행(刊行)된 밀양박씨세보(密陽朴氏世譜)와 조선조(朝鮮朝) 헌종(憲宗)(재위1659~1674)때 문인전부(文人典簿) 정시술(丁時述)의 제성보(諸姓譜)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주관(主管)하여 1768년에 간행(刊行)된 소원록(遡源錄) 등에 신라박씨(新羅朴氏) 팔대군분봉설(八大君分封說)을 정확(正確)한 출처(出處)와 근거(根據)를 밝히지 않고 기록(記錄)으로 인(因)하여 이후에 이 애매모호(曖昧模糊)하고도 잘못된 두찬(杜撰)으로 말미암아서 이것을 근거(根據)로 세상에 많은 사람들에게 박씨팔대군(朴氏八代君)을 주장(主張)하는 설(說)이 난무(亂舞)하게 만들었다.
위의 분봉설(分封說)을 주장(主張)한 사례(事例)들을 모아놓은 대표적(代表的)인 소원록(遡源錄) 중(中) 신라박씨팔공자형제분봉서차편(新羅朴氏八公子兄弟分封序次編)과 팔군분봉시대변편(八君分封時代辨編)을 여기에 옮겨본다.
2. 팔대군 분봉설 주장의 실체(八大君 分封說 主張의 實體)
(1) 신라박씨팔공자형제분봉서차(新羅朴氏八公子兄弟分封序次)
밀성대군 휘 언침 밀양 密城大君 諱 彦忱 密陽
사벌대군 휘 언창 상주 沙伐大君 諱 彦昌 尙州
완산대군 휘 언화 전주 完山大君 諱 彦華 全州
죽산대군 휘 언립 죽산 竹山大君 諱 彦立 竹山
속함대군 휘 언신 함양 速咸大君 諱 彦信 咸陽
강남대군 휘 언지 순천 江南大君 諱 彦智 順天
고양대군 휘 언성 고령 高陽大君 諱 彦成 高靈
월성대군 휘 언의 경주 月城大君 諱 彦儀 慶州
상기팔대군(上記八大君)의 휘(諱)는 어떤 역사서(歷史書)나 전기(傳記)에도 전혀 기록(記錄)되지않고, 옛날에는 대군(大君)(봉군제도封君制度는 고려 충숙왕高麗 忠肅王때부터 봉군封君하였음.)이란 칭호(稱號)가 없었는데, 박봉시(朴鳳時)의 기록에는 대군(大君)을 일열(一列)로 쓰고 또 휘자(諱字)까지 기록하였으며 또 다른 박씨(朴氏)들의 세보(世譜)에도 그대로 대군(大君)으로 기록(記錄)하고있으니 어느 자료(資料)에서 고증(考證)한것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서도 박봉시(朴鳳時)의 주장(主張)대로 기록하였다.
(2) 팔군분봉시대변(八君分封時代辨)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세보기전(世譜紀傳)에는 탈해왕(脫解王 신라 4대왕)이 정묘년(丁卯年 67년)에 종척(宗戚)인 박씨(朴氏)를 팔공자(八公子)에 봉(封)하였다고 하였고 그 주각(註脚)에는 유리왕(儒理王 신라 3대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종(宗)이라 하고 처(妻)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척(戚)이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또 팔군(八君)의 봉읍(封邑)을 써놓고 함양파(咸陽派)의 후예(後裔)인 황간현감(黃澗縣監) 박두익(朴斗益)는 팔군(八君)을 유리왕(儒理王) 때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시조왕묘비문청개장록(始祖王墓碑文請改狀錄) 가운데 변(辨)을 지어 나열(羅列)하고 등서비문(謄書碑文) 밑에 써놓았다.
◎밀양박씨(密陽朴氏)는 12중조(中祖)로 나누어지는데 중조(中祖)인 휘척(諱陟)의 후손(後孫) 보기(譜記)에는 팔군(八君)을 경명왕(景明王 신라 54대왕)의 아들들이라고 하고 신미(辛未 1751)년 상소(上疏)할 때 진신(縉紳)의 유사(有司)인 지금의 집의(執義) 박기채(朴起采)는 박황간(朴黃澗)과의 왕복서(往復書)에서 많은 논쟁(論爭)과 기록(記錄)을 남겼으므로 이 자료도 아래 기록해 두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중조(中祖)인 휘현(諱鉉) 후손(後孫)의 보기(譜記)를 두 번 지난 임인(壬寅)년에 수보(修譜)하였는데 그 보책(譜冊)의 첫째 장에「세상에 팔대군(八大君)을 분봉(分封)하였다는 설(說)이 있으나 고증(考證)할만한 문헌(文獻)이 없으므로 그 분봉(分封)을 어느 시대(時代)에 하였는지 그 대군(大君)은 어느 왕(王)의 아들들인지 알 수 가없다.」로 기록하고 있다.
◎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탈해왕(脫解王)은 남해왕(南解王)의 사위로 그는 타성(他姓)으로서 왕위(王位)에 올랐으므로 종척(宗戚)인 박씨(朴氏)를 내보내어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이것은 멀리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에 주군(州郡)과 군주(郡主)라는 단어(單語)가 유행하였다. 그렇다면 팔군(八君)을 분봉(分封)한 것은 혹 이때에 있는 일일까?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중조(中祖) 규정공(糾正公) 휘(諱) 현(鉉)의 후손(後孫)인 진사(進士) 박동현(朴東顯)도 기록(記錄)하기를 「유리왕(儒理王)때에 밀양(密陽)은 본래 추화군(推火郡)으로 그 군명(郡名)을 바꾸지 않고 있었으나 그후 32왕(王)이 지난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왕) 김헌영(金憲英)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밀양(密陽)이라고 칭(稱)하였고 또 그후 18왕(王)을 지난 경명왕(景明王 신라 54대왕)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분봉설(分封說)이 있었다. 그리고 규정공파(糾正公派)에서 만력(萬曆) 경신(庚申 1620)년에 간행(刊行)한 파보(派譜)를 보면 그 첫째 장에 팔군(八君)를 일렬(一列)로 쓰고 밀성군(密城郡)을 밀양(密陽)으로 봉(封)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밀성(密城)이란 호(號)는 과연 경덕왕(景德王) 뒤에 칭한 것이며 유리왕(儒理王) 때에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경명왕(景明王)이 훙(薨)한후 사자(嗣子)가 없다는 것은 동국총목(東國總目)에서 나오기는 하였지만 그 이전에 발간된 동사(東史)에는 본래 사자(嗣子)가 없었다는 문구(文句)가 없다.
그리고 유리왕(儒理王)은 두 아들이 있었으나 그의 사위인 탈해왕(脫解王)을 왕위(王位)에 추대(推戴)하였다.
그렇다면 경명왕(景明王)이 비록 팔군(八君)의 아들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그 어진 사람을 택하여 그 아우를 왕위(王位)에 추대(推戴)않았는가를 알 수 있겠는가?
그 아들을 왕위(王位)에 추대(推戴)하지 않고 아우를 추대(推戴)하였다고 해서 경명왕(景明王)이 사자(嗣子)가 없었다고 단정(斷定)해서는 안될 것이다.
◎도동(桃洞)에 거주한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세보(世譜)를 신사(辛巳 1761)년에 간행(刊行)되었다.
이때에 감사(監司) 박신(朴紳)과 선산(善山) 박중규(朴重圭)는 잇달아 영남(嶺南) 주군(州郡)에서 지방관(地方官)을 지내며 박씨(朴氏)의 족보(族譜)를 널리 참고하여 먼저 경명왕(景明王)이 8명의 아들들을 분봉(分封)하였다는 글을 일렬(一列)로 쓰고 또 정시술(丁時述)의 제성보(諸姓譜)에도 경명왕(景明王)이 팔공자(八公子)를 분봉(分封)하였다는 문구(文句)가 있다. 그렇다면 팔대군(八大君)을 분봉(分封)하였다는 것은 경명왕(景明王) 때에 있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다.
◎밀양(密陽)은 본래 추화군(推火君)이었으나 신라35대 경덕왕(景德王 742~765)이 처음으로 밀성(密城)으로 개칭(改稱)하였고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이 처음으로 밀양부(密陽府)로 승격(昇格)하였으며 유리니사금(儒理尼師今 24~57)때에는 밀성(密城)이란 칭호(稱號)없었던 것 같다.
◎상주(尙州)는 본래 사벌군(沙伐郡)이었으나 경덕왕(景德王)이 처음으로 상주(尙州)로 개칭(改稱)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의 아들 신라(新羅) 36대 혜공왕(惠恭王 765~780)이 사벌주沙伐州()로 개칭(改稱)하였다.
◎전주(全州)는 본래 백제(百濟)의 완산完山()이었으나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31대왕)5년에 완산부(完山府)를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때에는 전주(全州)로 개칭(改稱)하였다.
◎죽산(竹山)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으나 신라(新羅)가 개산(介山)으로 개칭(改稱)하였다.
◎함양(咸陽)은 본래 속함군(速咸郡)이었으나 경덕왕(景德王)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개칭(改稱)하였고 고려(高麗) 성종(成宗 6대)이 혜양(兮陽)으로 강등(降等)하였다.
◎순천(順天)은 본래 백제(百濟)의 감평군(欿平郡)이었으나 통일신라(統一新羅)때 승평군(昇平郡)으로 개칭(改稱)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소강남(小江南)으로 칭(稱)하였다.
◎고령(高靈)은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으로 칭(稱)하였으나 신라진흥왕(新羅眞興王)때에 처음으로 그 나라를 멸(滅)하여 그 곳을 가야군(伽倻郡)으로 칭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때에 고령(高靈)으로 개칭(改稱)하였다.
그렇다면 고양군(高陽君)으로 분봉(分封)한 것은 경덕왕(景德王)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고양(高陽)이라 하였다.
◎경주(慶州)는 본래 서야벌(徐耶伐)이었다. 이것은 즉 신라(新羅)가 개국(開國)할 때 호칭(呼稱)이다. 그리고 월성(月城)이란 호칭(呼稱)도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계림(鷄林)의 이후와 동경(東京) 이전의 호칭으로 기록(記錄)하였으므로 월성(月城)은 신라말(新羅末)에 있었던 것 같다.
진사(進士) 박민효(朴敏孝)가 지은 팔대군설(八大君說)에는「세상(世上)에는 전해온 팔군( 八君)은 즉 신라왕(新羅王) 박욱(朴勖)의 아들이다.」고 하였고, 혹은 유리왕(儒理王)의 아들인데 탈해왕(脫解王)이 분봉(分封)하였다고 하였으며 혹은 경명왕(景明王)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사(東史)에 기록된 박씨(朴氏) 십왕(十王) 중(中)에는 본래 욱자(勖字)로 부른 글자가 없으므로 그 설(說)이 매우 맹랑(孟浪)할 뿐이다. 그리고 탈해왕(脫解王)이 훙(薨)한 후 유리왕(儒理王)이 두 아들을 모두 왕(王)으로 추대(推戴)하였는데, 그 두 아들 이외에 또 팔명(八名)의 아들들이 있었단 말인가?
팔군(八君)을 각읍(各邑)으로 분봉(分封)할 때 죽성(竹城)은 그때 고구려(高句麗)의 땅이며 완산(完山)과 승평(昇平)은 백제(百濟)의 땅이었다.
그렇다면 탈해왕(脫解王)이 어찌 다른 나라의 국경(國境)을 넘어 이 삼군(三君)을 봉(封)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신라(新羅) 중엽(中葉)에 김씨(金氏)인 무열왕(武烈王)이 처음으로 삼국(三國)을 통합(統合)하였는데 그렇다면 경명왕(景明王)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 그럴듯하고 또 그 시대(時代)에 각읍(各邑)으로 분봉(分封)하는 것은 통합(統合)한 이후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그중 의심스러운 것은 경명왕(景明王)이 이미 팔명의 아들을 두었다면 어찌 아들을 왕위(王位)에 추대(推戴)하지 않고 그의 아우에게 왕위(王位)가 전(傳)해 졌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초출 抄出)
박봉시(朴鳳時)가 말하기를「경애왕(景哀王)의 휘(諱)가 위응(魏膺)이라면 신라왕(新羅王)을 욱자(勖字)로 칭한 것도 위응(魏膺)과 음(音)이 서로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팔군(八君)이 반듯이 경애왕(景哀王)의 아들이었으나 모두 대군(大君)으로 분봉(分封)하였으므로 그렇게 하였을까?」(초출抄出)
이상과 같이 살펴볼 때 애매모호(曖昧模糊)한 논지(論旨)로 일관(一貫)되어 있다.
3.사적문헌적고찰(史的文獻的考察)
(1) 먼저 사기(史記)부터 살펴보자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 高麗 인종 仁宗 17대왕 서기1145년 김부식(金富軾)이 왕명(王命)에 의해 지음),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 11년 서기1183년 일연(一然) 지음),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 1705년 홍만종(洪萬宗)이 지음), 동사강목(東史綱目 정조正祖 2 1778년 안정복(安鼎福)이 지음) 등 여러 역사서(歷史書)를 살펴보아도 팔대군(八大君), 팔공자(八公子), 봉군(封君), 분봉(分封) 등 그 어떠한 것도 전혀 없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일(卷第一) 신라본기(新羅本紀) 제일(第一) 「석탈해십일년춘정월이박씨귀척분리국내주군 호위주주군주 昔脫解十一年春正月以朴氏貴戚分理國內州郡 號爲州主郡主」또 동사(東史)에는「탈해왕이남해왕여서인난명이입출견종척박씨분리주군개원지시유주주군주지호
脫解王以南解王女婿因亂命而立出遣宗戚朴氏分理州郡盖遠之時有州主郡主之號」 즉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석탈해왕(昔脫解王) 11년 춘정월(春正月)에 박씨의 친척(親戚)으로써 국내(國內)의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州主) 군주(郡主)라고 이름 하였다. 그리고 동사(東史)에 “탈해왕(脫解王)은 남해왕(南解王)의 사위로 타성(他姓)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종척(宗戚)인 박씨(朴氏)를 내보내어 주군(州郡)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것은 멀리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 주주(州主)와 군주(郡主)라는 단어가 유행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新羅時代) 박씨(朴氏)왕은 전기(前期) 7왕과 통일신라(統一新羅) 말기(末期) 3왕이 있었는데 전기 7왕 때는 위에서도 지적(指摘)된 바와 같이 지명(地名)들이 맞지 않은 곳이 여러 곳이 있고, 또 타국영토(他國領土) 4군데 지역(地域)(전주 全州, 순천 順天, 죽산 竹山, 고령 高靈)에 봉군(封君)할 수가 없을 것이고, 대군(大君)이란 용어(用語)는 고려말(高麗末)에 사용(使用)한 것으로, 신라(新羅) 때는 없었다.
다음은 통일신라말(統一新羅末) 박씨(朴氏) 삼왕(三王)(신덕왕 神德王 재위912~917, 경명왕 景明王 재위917~924, 경애왕 景哀王 재위924~927) 때를 살펴보자.
먼저 박(朴)씨 왕(王)인 신덕(神德)왕이 즉위(卽位)하기 18년 전에 궁예(弓裔)는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저족(猪足:지금의 인제)·금성(金城)·철원(鐵原)을 점령한 뒤, 양길과 결별하고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송악(松嶽:지금의 개성)의 왕건(王建) 부자가 투항을 했다.
898년 평안도와 한산주(漢山州)의 30여 성을 공략하는 한편, 양길군을 격파했다. 899년(효공왕 3) 왕건을 시켜 양주(楊州)·견주(見州)를 복속케 하고, 이듬해에는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지금의 화성시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지금의 괴산)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체를 지배했다.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했다. 이때 비로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추었다. 이듬해 청주사람 1,000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다.
견훤도 혼란한 틈을 타 892년(진성여왕 6)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광주) 등 여러 성을 공격하고, 900년(효공왕 4) 완산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견훤은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
(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丞上柱國 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자칭했다. 북원(北原 : 지금의 원주)의 양길(梁吉)에게 벼슬을 내려 회유하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세력 확장에 힘썼다. 후고구려의 궁예(弓裔)와는 자주 충돌했다. 그 뒤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합천)을 비롯한 10여 성을 빼앗았으며, 927년(경순왕 1)에는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자살케 하고 경순왕을 세우는 등 후삼국 중 가장 큰 세력을 이루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에도 조물성(曺物城 : 지금의 안동 또는 상주 부근) 공산(公山)에서 이기는 등 군사적 우위를 유지했다.
경명왕(景明王 재위917~924)이 즉위하기 16년 전에 궁예는 901년에 후고구려를 세웠고, 견훤은 17년 전에 900년(효공왕 4) 완산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후삼국(後三國)이 정립(鼎立)된 16~17년 후에 경명왕(景明王)은 신라말(新羅末) 박씨삼왕(朴氏三王) 중에 두 번째 왕으로 즉위한다.
이때의 신라국세(新羅國勢)는 위축(萎縮) 될 대로 위축(萎縮)되어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도 체 안 되게 유지(維持)되고 있는 상태인데, 당시에 천하무적(天下無敵)을 자랑하며 기세(氣勢) 등등한 후백제(後百濟)의 도읍지(都邑地)인 전주(全州)에 어떻게 봉군(封君)할 수 있으며 또 후백제(後百濟 900년 건국)후방(後方)인 순천(順天)에 봉군(封君)할 수 있겠는가?
또 한 죽산(竹山)은 궁예(弓裔)의 후고구려(901년 건국) 영토(領土)인데 분봉(分封)이 가능(可能)하겠는가?
(2) 다음은 인적상황(人的狀況)을 살펴보자.
팔대군분봉설(八大君分封說)에서는 강남대군(江南大君) 휘(諱) 언지(彦智)를 순천박씨(順天朴氏)의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후손(後孫)(일설자 一說子)으로 순천박씨(順天朴氏) 진시조(眞始祖)이신 박朴(휘諱)영규(英規)님을 기록하고 있다.
순천박씨(順天朴氏) 시조(始祖)는 고려사(高麗史)및 여러 사기(史記)와 순천박씨족보(順天朴氏族譜)를 보면 고려(高麗) 삼한통합익찬공신(三韓統合翊贊功臣)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 휘(諱).영규(英規)로 후삼국(後三國)시대에 순천(順天) 사람으로 견훤(甄萱)의 사위이자 장군(將軍)이라 하였고 생졸년(生卒年)은 실전(失傳)하나 후백제(後百濟) 신검(神劒)이 반역(反逆)하여 부왕(父王)인 견훤(甄萱)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幽閉)함므로 견훤(甄萱)이 탈출(脫出)하여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에 투항(投降)하였을 때 사위이자 장군(將軍) 박(朴) 휘(諱).영규(英規)께서 장인(丈人)의 안부(安否)와 더불어 태조왕건(太祖王建)에게 귀관((歸款)할 때 태조왕건(太祖王建)이 말하기를
“칙선치알어장군 연후승당배부인 형사이자존지 필유이보지 천지귀신개문차언”
“則先致謁於將軍 然後昇堂拜夫人 兄事而姊尊之 必有以報之 天地鬼神皆聞此言” 즉 먼저 승당(昇堂)하여 장군을 배알(拜謁)하고 형(兄)으로 섬기며 부인을 (자)누님으로 높이여 반듯이 나중에 후히 보답할 것이니 이 말을 천지에 귀신들이 모두 다 들으리라.” 라 하였다고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볼 때 아무리 중요(重要)한 시기(時機)에 내응(內應)을 한다 하여도 일국(一國)의 국왕(國王)으로써 어찌 연하(年下) 사람에게 “형(兄)으로 섬기고 그 부인(夫人)을 누님(자姊)으로 존경(尊敬)하겠다며, 이 말이 천지귀신(天地鬼神)도 다 들었다.” 고 맹서(盟誓)까지 했겠는가?
이것을 미루어 볼 때 고려태조(高麗太祖)와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과의 년령(年齡) 차이가 최소한(最小限) 10년(年) 이상(以上)으로 사료(思料)된다.
신덕왕(神德王), 경명왕(景明王), 경애왕(景哀王),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 휘(諱).영규(英規) 님들의 생년(生年)이 실전(失傳)하므로 다음과 같은 방법(方法)으로 계산(計算)하면.
※태조왕건(太祖王建)이 서기 877년에 탄생(誕生)하였으므로 설(說)에 의한 강남대군(江南大君)의 조부(祖父)인 신덕왕(神德王)이 즉위(卽位)(912년)할 때 태조왕건(太祖王建)은 36세였다. 박(朴) 휘(諱).영규(英規)님이 46세이고 아버지인 강남대군(江南大君)은 66세 정도이고 여섯 째 아들?(일설一說 일곱 째)인 고로 그의 아버지인 경명왕(景明王)은 95세 정도이며 그의 아버지 신덕왕(神德王)은 115세정도 때 왕위(王位)에 오르고, 경명왕(景明王)은 왕위(王位)에 오를 당시 나이가 100세 정도로 계산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일(卷第一) 신라본기제일(新羅本紀第一)
“탈해니사금입(일운토해)시년육십이”“脫解尼師今立(一云吐解)時年六十二”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이 즉위(卽位)하였다 왕(王)은 나이 62세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서기 57년에 62세의 장수(長壽)로 즉위(卽位)함으로서 역사(歷史)에 기록(記錄)으로 남았는데 하물며 115세나 100세에 왕(王)에 즉위(卽位)하였다면, 그것도 훨씬 후대(後代)일을 어찌 대서특필(大書特筆)하지 않았겠는가?
순천박씨(順天朴氏) 시조(始祖)이신 휘(諱) 영규(英規)님의 춘추(春秋)45~6세일 때 경명왕(景明王)이 즉위(卽位)하였을 것으로 추측(推測)되며, 경명왕(景明王)은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휘諱 영규英規)과 동시대(同時代) 동년배(同年輩)의 인물(人物)로 사료(思料)된다.
(3)또 다른 주장
신라 팔대군의 강남대군(江南大君) 설(說)을 주장한 사람 중에는 강남악부(江南樂府)조현범 자는 성회, 호는 장졸, 또는 삼효제, 이 고장의 특기할 만한 사적들을 모아 강남악부를 편찬. 1656년(효종7년) 주암면 오산리에서 출생. 훌륭한 책을 발간해놓고도 자기를 밝히지 않고 향리에서 조용히 살다가 흙속에 묻혀갔다.
의 내용 중에 “평양구지(平陽舊誌: 옛날 순천읍지)에서 이르길 박영규(朴英規)는 강남군(江南君)의 후예(後裔)라 하네.”를 인용하여 말한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도 출처(出處)가 불분명(不分明)한 것으로 강남악부(江南樂府)에서 인용한 순천구지(順天舊誌) 인 승평지(昇平誌)1618년(광해군 10)에 부사 이수광(李睟光)이 편찬한 전라도 순천부 읍지.
어디에도 강남대군(江南大君)이란 말이 없다.
본인이 직접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고려대학교로 가서 도서관 한적실에 있는 원본(原本)에서 확인하였으며 이것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다.
강남악부 저자인 조현범선생이 왜? 승평지(昇平誌)를 출전(出典)로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정의적 고찰 情義的 考察
다음은 순천박씨(順天朴氏) 시조(始祖)이신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 휘(諱).영규님(英規)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삼국사기 권제오십 부정녀불사이부 충신불사이주 약사이군이사역자 칙하안이견 천하지의사호”
“三國史記 卷第五十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已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 天下之義士乎”
“대저 열녀(烈女)는 두 남편(男便)을 섬기지 아니하고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 라고 하셨으며
“만약 내가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기게 되며 는 무슨 면목(面目)으로 천하(天下)의 의사(義士)들을 대할 수 있으리오.” 라고 의(義)를 귀중(貴重)하게 여겼고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도 공(公)의 의리(義理)에 잊을 수 없다고 감복(感服)해 하였다.
특히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도 궁예(弓裔)를 왕자(王子)(47대 헌강왕(憲康王)의 아들)의 신분(身分)으로 나라를 배반(背反)한 의(義)롭지 못한 흉인(兇人)으로 또 견훤(甄萱)을 나라의 관록(官祿)을 먹은 자로써 위기(危機)를 다행(多幸)으로 여겨 부불인(不仁)함이 너무 심한 행위(行爲)를 보고 악마(惡魔)로 평하는 등 인의(仁義)를 중요시(重要視)하였다.
이렇게 의(義)를 중(重)히 여기시는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께서 분봉설(分封說)이 사실(事實)이라면 왕자(王子)의 아들로써 증조부(曾祖父)와 조부(祖父)와 종조부(從祖父) 등이 혼란기(混亂期)에 나라의 왕(王)이 되었는데 나라에 충성(忠誠)은 못할망정 의리(義理)도 없는 적국왕(敵國王)의 사위(將師)가 되고, 장사(將師)가 되어 침략(侵掠)하고 급기야는 왕(王)을 죽이고 왕비(王妃)를 어지럽히는 등 어찌 잔악(王妃)한 무리의 장사(將師)가 될 수 있겠는가?
4. 맺은 말
위에서 서술(敍述)한바와 같이, 우리는 더 이상 간과(看過)할 수 없고 또 방관(傍觀)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결론(結論)이 나온다.
밀양박씨소원록(密陽朴氏溯源錄) 등에서 우리 순천박씨(順天朴氏)를 강남대군(江南大君)의 후손(後孫)으로 만든 것은 순천박씨(順天朴氏) 시조(始祖)이신 삼중대광(三重大匡) 박(朴) 휘(諱).영규(英規)님의 존재(存在)로 인하여 큰 실수(失手)임이 백일하(百日下)에 증명(證明)된 것이다.
다시 말해 팔대군(八大君)의 실존(實存)을 리치적(理致的)으로 증명(證明)할만한 흔적(痕迹)이 역사서(歷史書)나 고전(古典) 어디에도 전혀 없고 “오직 1620년 간행(刊行)된 밀양박씨세보(密陽朴氏世譜), 밀양박씨(密陽朴氏) 소원록(溯源錄)(박세욱 朴世旭 이 1768년에 저술 1786년 간행 )에만 있음” 오히려 그 허구성(虛構性)에 대한 입증(立證)은 위에서 고찰(考察)한바와 같이 명명백백(明明白白)하지 않은가?
다만 모든 박씨(朴氏)들의 처음 조상(祖上)을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으로 기원(起源)하니 2천여년(千餘年)이란 긴긴 세월동안 전설(傳說)이나 설화(說話)정도는 있을 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 실존인물(實存人物)로 여기고 섬기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특히 순천박씨(順天朴氏) 시조(始祖)이신 휘(諱).영규(英規)님의 의(義)롭고 훌륭한 조상(祖上)님을 억지로 경명왕(景明王)의 손자(孫子)로 만든다면 나라의 반역(反逆)이자 악당(惡黨)이며 인간적(人間的)으로는 패륜아(悖倫兒)가 되는데, 왕자(王子)의 후손(後孫)이란 우월감(優越感)만 생각하다가 조상(祖上)님을 크게 욕되게 하고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우(愚)를 범해서야 되겠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위치(位置)에 계셔야 할 미지(未知)의 진조(眞祖)상님께서는 이런 상황(狀況)을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팔대본관(八大本貫) 후손(後孫)들은 진실(眞實)을 규명(糾明)하여 세상(世上)에 알려야 하는데 일부에서는 족보(族譜)에 올리고 설단(設壇)하여 봉사(奉祀)까지 한다니 이 얼마나 한심스러운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 더 가까이 비교(比較)해보면 아버지도 아닌데 아버지라고 하고 아버지인데 아버지가 아니라고 버리는 격(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본인(本人)이 의도(意圖)하는 것은 단순(單純)한 문제(問題)가 아니라 어쩌면 역사(歷史)앞에서 조상님 앞에서 큰 죄(罪)가 될 일을 고쳐서 현재(現在) 그리고 후세(後世)를 위하여 우리가 더욱 깊고 열렬(熱烈)한 관심(關心)과 문제(問題)을 제기(提起)하고, 그리고 많은 연구(硏究)를 통해 진실규명(眞實糾明)과 잘못된 실정(實情)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며 또한 앞으로 이것을 위하여 많은 종인제현(宗人諸賢)들의 동참(同參)을 바라면서 글을 맺으며 상기서술(上記敍述)에 대하여 잘 못된 부분(部分)이나 오류(誤謬)가 있으면, 지적(指摘)하고 근거(根據)를 제시(提示)하기 바란다.
※ 資料出典: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東史綱目(正祖2 1778년 安鼎福), 東國總目(1705년 洪萬宗), 昇平誌(1618년(광해군 10) 이수광(李睟光) 편찬), 順天朴氏世譜(1986년 順天朴氏 敦寧公派世譜), 順天朴氏實錄(1994년 東泉學術文化財團)

2004. 7. 20 문숙공후 돈녕공 십칠대손 박종재 근술(文肅公后 敦寧公 十七代孫 朴鍾宰 謹述) . <순천박씨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