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국으로 간 박씨들 ]
■선조들 유래는
중국내 박씨촌의 선조들은 언제 어디서 왔나.이들은 1619년 이후 청나라로 이주한 조선군인.포로들이었다.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동북3성으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확연히 다르다. 현재 중국과 한국에 거주하는 200여만명에 이르는 조선족의 이주 역사는 150년 전(前)인 19세기 중엽까지 거슬러올라갈 뿐이다. 이에 비해 박씨촌 사람들의 선조는 17세기 명말.청초에 이주했을 것으로 본다. 요녕성 개현 진둔향과 본계현 산성자향에는 이보다 700 ~ 800년 전인 당나라 때 신라 유민이 난을 피해 동굴에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근거는 미약하다. 두 지역의 동굴에서 발견된 도자기.그릇 등 유물은 그보다 후대인 금나라 시대 것으로 나타났다.
만리장성 북쪽 하북성 청룡현의 박씨들은 청나라 8기군 소속 조선 군인의 후예로 밝혀졌다. 후금의 누르하치가 본토를 공격할 때인 1619년 강홍립이 명군을 지원하기 위해 1만여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투입됐으나 사르후전투에서 명군이 패해 전투도 못하고 5천명 가량이 투항했다. 이들은 8기군 안의 조선좌령에 편입됐는데 이 가운데 박씨는 북경 정복(1644)에 동원된 뒤 1669년 하북성 청룡현에 자리잡았다. 청나라는 평화가 찾아들자 이주정책을 겸해 이들에게 만리장성 위쪽의 황무지 경작권을 부여했다.
역사학자들이 연구한데 따르면 박씨 조상들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초기에 이주하였는데 전쟁포로거나 피난민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많았다고 한다. 후금시기(后金) 누르하치란 수령이 주위의 여진부락들을 정복할 때 가끔 조선변경을 침입해서는 조선사람 들을 납치해갔다. 누르하치의 병영안에는 조선영병사 3천여명 이나 있었다고 한다.
리민환이《건주문견록》에서 조선인들이 누르하치에게 포로되어 흥경밖에서 살았는데 고려촌이라고 부른 사실, 싸르후전역에서 포로된 조선군이 모두가 노복으로 되어 농군(農軍)으로 여러 곳에 부여된 사실 그리고 정묘호란 때 황태극(皇太極)이 조선인을 납치하여 출정한 장병들에게 상으로 나누어주고 또 나머지는 출정하지 않은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준 사실에 비추어보면 박보의 박씨 조상들은 싸르후전역이후 포로 된 조선군이 누르하치의 맏아들 저영이 청하진일대를 점령하고 박보 등 탕하일대에 농장을 꾸리면서 농노로 분배되어온것으로 판정되고있다.
하북성 청룡현 팔도하자 탑구촌에 사는 박만은 노인은 청룡현의 박씨 조상들이 청룡에 정착하게 된 사연을 이렇게 이야기하였다.《우리 선조께서는 청조초기에 만주8기에 가입하였는데 한왕(누르하치)의 밑에서 대신을 지냈다. 후에 관내에 들어갔는데 순치황제때 <궁정정변>에 참여한 탓으로 파직당하고 산해관부근의 창려(昌黎)에 정배를 왔다가 강희9년에 황제의 명을 받고 령구를 나와 박장자(朴杖子)에 와서 땅을 나누어 받고 정착하였다.》
요녕성 개현 진둔향과 본계현 산성자향의 박씨 선조는 청나라로 붙잡혀간 포로 가운데 농사를 짖던 조선인으로 고증되고 있다. 청나라는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때 조선을 침략해 수만명의 포로를 끌고 갔다. 이들은 8기군(군인)과 장정(농군), 작방(수공업자) 등으로 나뉘어 배치됐다. 요녕성 개현 과 본계현 산성자향의 박씨 선조들은 농군으로 배치된 사람들이다. 요녕성 개현 의 박씨 선조 박의부는 누르하치의 양식을 거두는 ‘독황량’(督皇糧)이었다. 본계현 산성자향은 박씨 선조 5명 가운데 박일과 박이만 남았고 박일이 농군의
관리자격인 ‘장두’였다는 기록이 있다.<한겨례신문>
요녕성 개현 진둔향 박보촌과 본계현 산성자향, 하북성 청룡현 등 여러 고장에 박씨 조선족 들이 모여 살고있다. 1985년도 통계에 의하면 요녕성 진둔향 박가구촌에는 89세대에 287명이 살고있고 본계현에는 2,641명이 살고있으며 청룡현에는 350여명 살고있다.
박씨 조선족사람 들은 몇백년 동안 한족, 만족 등 민족들과 통혼하면서 살다보니 조선말을 모르고 많은 풍속습관을 잃어버렸지만 일부 민족습관은 보존하고있다. 그들은 역대로 박씨 서로간에 결혼하지 않았으며 박씨여자들은 전족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전족을 한 여자를 며느리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식으로 된장을 담그고 앞세대까지는 빨래를 하고는 풀을 먹여 다듬이질하였으며 웃어른들에게는 항상 독상을 차려 먼전 대접하는 등 풍속을 보존하고있다.
중국 이주역사 200년 앞당겨
■발굴 의미
중국내 박씨 집성촌 ‘발굴’은 황유복 북경 중앙민족대 교수의 학문적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황 교수는 1982년 인구조사 결과 으나 조선족이란 민족의식은 살아 있었다. 이들의 증언과 문헌연구 결과 1619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에 대항하기 위해 명.조선군 연합작전에 참가한 조선 군인의 후손임이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1984년 1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1회 세계조선민족대회에 처음 공개됐다.
이후 박창욱 연변대 교수가 연구를 더 진전시켰다. 그는 박씨촌이 하북성 청룡현외에 요녕성 개현 진둔향과 본계현 산성자향에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986년 연구생 4명과 세 지역을 답사한 결과 모두 1619년 이후 수십년 동안 이주한 조선인의 후손임이 밝혀졌다. 이런 내용은 1987년 12월 발행된 <조선족연구논총>(연변대학출판사) 1권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한편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인가를 받아 <중국통사> 머리말에도 올랐다. 중국내 조선족의 이주 역사가 200년 가량 앞당겨진 셈이다. 그는 “이는 중국의 소수민족(54개) 보호정책의
공로”라고 평가했다. 1980년대 들어 중국 당국이 호적정리에 나서면서, 좌익사상과 문화혁명(1966 ~ 1976)에 짓눌려 만.한족으로 신분을 위장했던 조선족에게도 “광명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다민족의 틈에서 민족의 고유성을 보존하려면 집거하는 곳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박씨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족과 만족에 없는 박씨라는 성이 이들을 더욱 뭉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팔기만주씨족통보>에는 청나라 8기군에 소속된 43개 성씨의 조선인이 기록돼 있으나 이 가운데 박씨만이 지금까지 내려온다. 하북성 청룡현에서는 숨질 때 “우리는 조선인이다”라는 유언을 대대로 남겨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겨례신문>
박가구촌에 살고있는 박격청이 보존한 족보《박씨력대종조(朴氏歷代宗祖)》에는 1세로부터 11세까지 올라있다. 박가구에는 또 비석 하나가 보존되어있는데 그 비석은 박씨 제7세인 존인 형제들이 가경(嘉庚)14년 (1809년)에 아버지와 어머니 묘에 세운것이었다. 그러니 박보촌(朴堡村)의 박씨네는 박씨1세인 박의부때 중국에 이주하여 지금까지 15대를 살아왔던것이다.
본계(本溪)현 산성자향 박보촌(朴堡村)의 박씨들이 보존한 족보를 보아도 박씨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15대를 살아왔다. (본계현- 요령성 심양시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약30분거리임)
350년 새월 말 잃었지만 민족의식 또렷
중국의 조선박씨 집성촌
중국에서 330 ~ 360여년 동안 ‘조선인’으로 살고 있는 박씨 집성촌이 3곳이나 있어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이들은 허베이성 하북성 청룡현(청룡현), 요녕성 개현 진둔향(개현)과 본계현 산성자향(번계현) 등 만족(만주족) 자치현에 둥지를 틀고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산골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은 박씨끼리는 결혼하지 않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언어는 완전히 잃어버렸으나 집마다 족보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중국화하긴 했으나 물김치와 된장이 이어지고 개고기와 매운 맛도 즐긴다. 만족과 한족에 둘러싸여 혈통도 만.한족과 섞여 있으나 조
인이란 의식은 핏속에 녹아 있다. 2003년 12월 중순 세 마을을 찾아 이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봤다.
본계(本溪)현 산성자향 박보촌(朴堡村)의 박씨들이 보존한 족보를 보아도 박씨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15대를 살아왔다. (본계현- 요령성 심양시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약30분거리임)
◇ 하북성 청룡현 박씨촌
마을을 가로지르는 ‘팔도하’라는 개울 위에 오리가 떠다니고 처마밑에는 옥수수가 바나나 송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최고령인 박만우(79)씨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주름진 얼굴이 활짝 펴졌다. 가마솥에 고구마를 삶던 일손을 멈춘 그는 방안으로 들기를 청한 뒤 질화로를 끌어당겨 손 녹이기를 권했다. 그가 자랑스레 꺼낸 공민증(주민등록증)의 민족란에는 ‘조선’(朝鮮)이란 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큰 조카가 항미원조(한국전쟁)에 참가했다”면서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숨진 형 박만순씨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 있다. 그는 민족탄압 정책이 서슬퍼렇던 1957년 10여명과 함께 성 정부를 찾아가 조선족임을 주장했다고 한다. 하북성 청룡현에는 다장쯔샹(大杖子鄕) 등 7개 향.진에 150~200명의 조선족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했다.
◇ 요녕성 개현 박가구촌
투명한 시냇물이 흐르는 산골에 자리하고 있다. 산자락에 둘러싸여 한겨울에도 포근한 이곳은 산사과와 산포도 산지로 유명하다. 읍내에서 출발하는 ‘박가구촌’행 버스가 자주 다닌다. 이장격인 박영상씨는 조상들의 산소가 모여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산엔 ‘박○○의 묘’라고 적힌 묘석이 여러 개 서 있다. 멀리 보이는 말안장 모양의 안쯔산 동굴에는 신라 출신 조상들이 숨어지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박가구촌이란 마을 이름을 놓고 이웃동네 만주족 싱(邢)씨들과 소송을 벌여 이긴 적도 있다고 했다. 박씨
선조의 역사가 새겨진 비석과 돌절구도 보존되고 있고, 과수원 옆에는 마을을 수호하는 삼신당이 있다. 예전에는 사당이 있었으나 내전으로 없어졌다. 가을에는 조상의 제사를 지낸다. 박영해(40)씨는 “아이들이 조선어를 배우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곳의 화강암은 북경 인민대회당의 건물에 사용될 정도로 질이 좋다. 이곳에는 40호에 200명 가량의 박씨가 살고 있다.
중국 요령성에 살고 있는 「조선족 박씨」들이 한 서지학자의 7년 집념에 의해 700년만에 뿌리를 찾았다. 주인공은 한국족보도서관 박병재 관장이다. 3만여권의 고서를 뒤진 끝에 요령성(遼寧省) 본계현(本溪縣) 산성향(山城鄕) 「박보촌(朴堡村)」 일대에서 생활하는 조선족 박씨 1,000여명이 「울산박씨」란 사실을 최근 확인 되었다.
박관장이 조선족 박씨들의 뿌리찾기 열망을 안 것은 지난 1991년 1월 신문보도를 접한 뒤. 당시 신문은 박씨들이 한족(漢族)으로 등록돼 살고 있으나 한국식 생활풍습을 갖고 있고 자신들의 선조가 한반도에서 왔다는 것을 구전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평생 족보연구에만 매달려온 박관장은 이들에게 뿌리를 찾아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즉각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요령성 박씨 문중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74개본(本) 4백만명에 이르는 국내 박씨의 족보 전체와 박씨 총보, 박씨 사략(史略),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3만여권의 문헌을 뒤졌다.
그러기를 7년여, 마침내 실마리가 잡혔다. 고려 충렬왕때 무신 박보(朴保)장군이 1274년 원(元)의 일본 원정당시 중국 동계(東界)에 파견돼 전함 건조 작업을 지휘했다는 행적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바로 조선족 박씨들의 선조이며 「박보촌」 박씨들은 결국 울산 박씨란 사실이 하나하나 확인됐다. 박관장은 『700년동안 옛 전통을 지키고 살아온 조선족 박씨들의 뿌리를 찾아주게 돼 가슴 뿌듯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경향신문>
박가구촌 전설
요녕성 개현 진룬향 박가구촌에는 조선족 족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277명의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박가구촌의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는 박가구촌의 유래를 두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의 장군 설인귀가 고구려를 침범하던 때이다.
그때 설인귀가 인솔하는 당나라 대군이 고구려에 쳐들어오자 박씨 일가의 두 남매는 살 길을 찾아 개 한 마리를 거느리고 정처 없이 피난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남매는 살 길을 찾아 가고 가다 보니 나중에는 인연마저 희소한 안자산에 이르게 되었다. 이 산은 인적없는 무인심산이여서 피난처로는 이보다 더 좋은 고장은 없었다.
불쌍한 남매는 인적없는 이 무인심산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헌데 정작 무인심산에서 살아가니 당장 먹을 것이 없었다. 남매는 당장은 풀도 캐어 먹고 열매를 따 먹으면서 지내더라도 장차 살아가자면 그래도 곡식을 심어서 농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다행히도 피난 떠나올 때 지니고 온 조씨가 얼마간 있었다.
남매는 합심하여 풀뿌리와 나무뿌리도 파내고 푹신한 땅에 조씨를 심었다.새벽닭이 울 때가 되고 날이 푸름푸름 밝아오니 남매는 잠에서 깨여난 전날 심어 놓은 조밭을 바라보았다.
한데 이런 일이 어디 또 있으랴? 전날 심어 놓은 조가 밤새 땅을 뚫고 올라 와 키가 넘게 자라서 방치(빨래나 다듬이질 같은 것에 쓰이는 방망이)같은 조이삭이 보기에도 기분 좋게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남매는 자기들의 눈을 의심하여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알알이 영근 조는 방치 같은 조이삭에 매달려 황금 같은 노란 빛을 내뿜었다. 남매는 그 조를 가을(농작물을 논밭에서 거두어 들이는 일)하여 그날부터 더는 먹을 것을 근심하지 않고 의좋게 살아가게 되었다. 이 기적 같은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후세 사람들은 이 산 골짜기를 계명곡(鷄鳴谷)이라 하였다.
남매가 이 고장에 살아가던 어느 날이였다.
남매는 마주 앉은 두 산봉우리에 제각기 올라 가 산봉우리에서 동시에 돌을 굴려 산 아래로 내려 보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제각기 마주 한 산봉우리에서 굴러 내려온 돌은 산 아래 와서 서로 맞부딪치곤 하였다. 남매는 제각기 산봉우리의 위에서 세 번이나 돌을 굴려 내려 보냈는데 세 번 다 서로 맞부딪치곤 하였다.
이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남매는 그날부터 부부의를 관계맺고 세월의 흐름을 따라 아들 딸을 낳아서 슬하에 두고 재미나게 살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세월은 세월대로 흘러서 어지럽던 세월도 지나가고 더는 싸움이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인적없는 산에서 내려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농사 짓고 살아가면서 차차 마을을 이루었다.이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 고장을 그들의 성씨를 따서 박가구촌이라 하였다 한다.
◇ 본계현 산성자향 박보촌
눈덮힌 마을 한가운데로 탕허가 흐르고 있다. 최고령자로 이곳에 정착한 지 11대째라는 박문창씨는 깔끔하게 정돈된 방안으로 안내했다. 손자와 함께 사는 그는 장롱 속에 보관하고 있던 빨간색 표지의 족보를 꺼내보였다. 표지에는 ‘박씨종보’라고 붓글씨로 써 있었다. 시내를 굽어보는 관먼산 중턱에는 선조들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얽힌 동굴이 있다. 박명신씨는 “3년전 작은 아버지인 박문우씨가 족보를 정리하다 피를 토하고 숨졌다”며 효행과 예절을 강조하는 가훈이 실린 족보를 보여줬다. 이곳은 성 정부가 1983년 ‘문명촌’으로 지정할
정도로 윤택했다. 유아원도 있었고 어린이날엔 한복을 입혔다. 청조 말에는 큰 공장이 운영돼 여기서 발행한 수표가 선양 일대에서 유가증권으로 통용될 정도였다. 반일 해방전쟁 출신 당 간부와 황포군관학교 출신 중장 등 인재도 많이 배출됐다. 교육을 중시해 박보공립소학교를 세웠으며 여대생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낙후된 농촌인 이곳에는 70호에 210명 가량의 박씨가 살고 있다. <한겨례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