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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의 역사 혁거세왕과 박씨

  시조 박혁거세왕 신라 박씨 10왕 박씨의 관향 박씨 본관및 중시조 새로 발굴된 나정 유적
중국으로 간 박씨들명문대가 반남 반남박씨 세계도 100 여년 지속된 반박과 밀박관계 해결
경주 오능 옛부터 불리워진 8 朴 순천박씨 8대군 사실 아니다 관향별 선조 행적
 
 



[ 옛부터 불리워진 8 朴 ]
모든 박씨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왕을 유일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는 다른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분명한 것이 특징이다.박혁거세왕의 탄생에 대하여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혁거세왕으로 부터 시작된 박씨는 신라의 멸망과 후삼국,고려(高麗), 조선시대를 이어오며 여러 관향으로 분적되었다. 여러 관향으로 분적한 박씨중에서도 옛부터 8 朴 이라고 불리워지는 박씨들이 있었으니, 반남박씨, 밀양박씨, 고령박씨, 함양박씨, 죽산박씨, 순천박씨, 무안박씨, 충주박씨를 8 朴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이 8 朴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반남박씨(潘南朴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고령박씨(高靈朴氏)       ▣함양박씨(咸陽朴氏)
▣죽산박씨(竹山朴氏)       ▣순천박씨(順天朴氏)       ▣무안박씨(務安朴氏)       ▣충주박씨(忠州朴氏)


[ 순천 박씨(順天朴氏) ]
순천박씨는 박영규(朴英規)를 중조로 하고 있다. 그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사위로 훤장군이 되었 는데 935년 견훤이 왕위 승계 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 태조 왕건(王建)에게 투항하자 그도 이듬 해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귀부(歸附)할 뜻을 비치고 태조가 신검을 칠 때 내응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공으로 좌승(左丞)에 임명 되고 승주군에 봉해졌으며 전답과 말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혜왕 때 보문각 대제학, 관동존무사를 지낸 박숙정(朴淑貞)을 1세조로 하였다.
중조와 1세조 사이에 고려조에서 평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죽어서 순천 인제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박난봉 (朴蘭鳳)을 득관조로 하였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난봉이 영규의 증손이요, 숙정의 6대조다>하였으나 <순천박씨세보(順天朴氏世譜)>에는 세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본관은 중조 영규의 아버지인 언지가 봉군된 강남(江南)이 순천의 형승(形勝)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중조의 발상지인 순천이 신라 때 승평(昇平), 고려조에 승주(昇州) 등 으로 불려지다가 충선왕 때 순천을 개칭되었기 때문에 순천으로 하였다.
순천박씨는 고려 말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명문의 기반을 굳혔고,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35명, 상신 1명, 호당 2명, 청백리 1명, 공신 8명을 배출했다.
1세조 숙정의 손자 박천상(朴天祥)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평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박가흥(朴可興)은 고려말에 좌정승을 지내고 가흥의 동생 박가실(朴可實)은 판계림부윤, 박가권(朴 可權)은 판개성부윤를 지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석명(朴錫命), 박중림(朴仲林), 박팽년(朴彭年), 박중선(朴仲善), 박원종(朴元宗) 등을 꼽을 수 있다.
문숙공 (文肅公) 박석명은 좌정승 박가흥의 큰아들이자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공양왕 때 우부대언, 병조판서를 역임하고,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한때 은거했다가 1399년(정종1) 좌산기상시에 등용된 뒤 안주목사, 도승지를 거쳐 1401년 태종을 옹립한 공으로 좌명공신 3등이 되고 평양군에 봉해지고 뒤에 지신사를 거쳐 지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은 이조판서 박중림의 아들이며, 시호는 충정(忠正), 사육신중 한사람이다. 1434년(세종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 학사를 거쳐 1438년 사가독서를 했고 1447년(세종2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고, 1456년(세조2) 형조참판으로 성삼문, 하위지, 이기, 류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질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사형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과천의 민절서원, 흥주의 노운서원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다.
박중선(朴仲善)은 조선 판돈영부사. 자는 자숙(子淑). 시호는 양소(襄昭). 지돈령 박거소의 아들이다. 음보로 선전관 등을 거쳐 1460년(세조6) 무과에 장원하고, 훈련원 부사가 되었다. 이어 지훈련관사, 판군기감사, 지병조사, 병조참판 등을 지내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평로장군으로서 난을 진압, 적개공신 1등으로 평양군에 봉해진뒤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3등이 되고, 숭정대부에 승진했으며 1471년(성종2) 좌리공신 3등이 되었다. 그 후 경기도 곤찰사를 거쳐 판돈령 부사에 이르렀다.
박원종(朴元宗)은 시호가 무열(武烈)이며, 박중선의 아들이다. 음보로 기용된 뒤 선전관으로서 무과 급제한 후 1492년 성종의 특지로 동부승지에 발탁, 공조.병조의 참의를 거쳐 연산군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했다. 1506년 중종반정에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정국공신 1등으로 우의정이 되고, 평원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이과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1등이 되고, 그 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영의정에 올랐으며, 평성부원군에 개봉되었다. 중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박성명의 손자인 양소공(襄昭公) 박중선은 세조조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 적개공신에 오르고 예종조에 남이(南怡) 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 성종조에 좌리공신이 되고 판돈령 부사를 지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은 목사 안생의 아들이며 팽년의 아버지이다. 그는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뽑히고 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아들 팽년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러댜 사형 당했다. 문하에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이 배출되었다.
충정공(忠正公) 박팽년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고 호당에 뽑혔으며 청백리에도 녹선되었다. 세조가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 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체포된 후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 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여 아버지 중림, 동생 대년(大年), 아들 헌(憲) 등 일문이 참화를 입었다. 이 때 같이 화를 당한 사육신은 모두 멸문 의 화를 입어 정통 후손이 없게 되었으나 그의 둘째며느리(순(珣)의 부인)가 아들을 낳아 같은 무렵에 낳은 여종의 딸과 서로 바꾸어 키워서 생명을 보전, 오직 그만이 정통 후손을 이어왔다.
무열공(武烈 公) 박원종은 성종조에 무과에 급제, 중종반정에 주동적 역할을하여 정국공신 1 등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좌의정을 거쳐 이과(李顆)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1 등에 오르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르기는 신경진과 함께 역사상 단 두 사람뿐이다. 같은 무렵에 박이검(朴而儉), 박이온(朴而溫) 역시 정국공신에 녹훈되고, 각기 순성군과 승평군에 봉해졌다. 이 외에 의민공(毅愍公) 박이현(朴而絢)이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성주(星州)의 가천(伽川)에서 순절했고. 민양공(愍襄公) 박춘무(朴春茂)는 창의사가 되어 호서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또 춘무의 아들 충경공(忠景公) 박동명(朴東命)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고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던 중 무계(茂溪)에서 적을 만나 분전하다 전사했다.
숙종 때의 학자 문숙공(文肅公) 박광일(朴光一)은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으로 왕자사부, 시강원 자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 했다.
박기정(朴基正)은 팽년의 후손으로 정조조에 승지.참판 등을 지내고 왕명으로 이의준(李義駿), 이서구(李書九)와 함께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