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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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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계해보 (1683년) 서문
제2차 계해보 (1683년) 서문


세보명     계해보(癸亥譜)  
발행연도  1683(계해)  숙종9년
권수       4권
발행지   이천
서문(序文)   박세당(朴世堂)

보(譜)란 무슨 말인가. 기록함이 넓음을 말한다. 널리 그 종족(宗族)을 기록한 책을 ‘족보(族譜)’라 하니, 이 책은 박씨(朴氏)의 종족을 널리 기록한 것인데, 또 어찌하여 ‘족보’라 하지 않고 ‘세보(世譜)’라고 하는가. 세(世)로써 그 종족을 이으면 ‘세’라 하고 ‘족’이라 하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박씨는 뿌리가 신라(新羅)에서 시작되어 자손들이 널리 퍼졌다.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면서 낮게는 평민이나 종이 되기도 하고 높게는 공경(公卿)이나 대부(大夫)가 되기도 하였으니,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리하여 각각 기록할 만한 세손(世孫)을 시조(始祖)로 삼고 시조가 일어난 곳을 관적(貫籍)으로 나타냈으니, 반남으로 관적을 나타내고 호장(戶長) 응주(應珠)를 시조로 삼은 가문(家門)이 우리 종족이다. 우리 종족이 세상에 드러난 때는 고려(高麗) 말엽인데, 본조(本朝)에 와서야 창성(昌盛)하기 시작하여 3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더욱 번성하고 창대해져서 여러 성(姓) 중에 으뜸이 되었다. 고어(古語)에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장구하다.”주D-001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관면(冠冕)과 문벌(門閥)을 이르는 말이겠는가. 이는 공덕(功德)이 전대에 쌓이면 복택(福澤)이 후대에 넘친다는 뜻이니, 하늘이 장차 이로써 세상을 권면하는 징험을 삼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 종족의 번성함과 창대함이 이와 같으므로 세보를 만들 때 상세히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의 족보는 소략한 문제가 있고, 또 수십 년 전에 만들어서 뒤에 출생한 자손들이 실리지 못하였으니, 끊어진 가계(家系)를 잇고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는 것은 반드시 후대에 해야 할 일이었다.

족제(族弟) 세채(世采) 화숙(和叔)이 처음 지금의 세보를 만들다가 중간에 족질(族姪) 태징(泰徵)에게 맡겨 17년 만에 완성을 보았으니, 과거의 소략한 문제가 있던 것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늦게 출생한 후손도 이어서 모두 실리게 되었으며, 널리 오류를 바로잡은 것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체례(體例)는 분묘(墳墓)의 소재를 반드시 쓰고 어디에서 이주하였는지를 반드시 썼으니, 이는 먼 조상을 추념하고 종족을 분변하려 해서이다. 그리고 외손(外孫)은 대자(大字)로 쓴 줄에 넣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고 이성(異姓)을 분별하려 해서이다. 또 벼슬을 하였는지, 모씨(某氏)에게 장가들었는지, 향년(享年)이 몇인지, 모일(某日)에 졸(卒)했는지를 반드시 자세히 썼으니, 이는 소씨(蘇氏)의 족보주D-002에서 그 좋은 점을 택한 것이다.

내가 이로 인하여 느끼는 점이 있으니, 친친(親親)에 대해 박하게 한 소명윤(蘇明允 소순(蘇洵))의 인(仁)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긴다. 소명윤이 자신의 족보를 만들 적에, 위로는 고조(高祖)까지만 싣고 아래로는 아들까지만 실었으며, 방계(傍系)는 8촌인 시마(緦麻)까지만 실었다. 이와 같은데도 “우리의 족보를 보는 자는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길 것이다.”라고 하니,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저 소명윤은 장차 천하 사람들을 모두 들어 자기 조상을 조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손을 자손으로 여기지 않아, 기년복(朞年服)과 공복(功服)을 입는 가까운 종족을 남남으로 보게 만들었을 뿐이니, 그러고도 도리어 종족에 대해 후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족보를 만들어 기록하는 것은 모르거나 잊지 않고자 해서이다. 천하에 고조와 증조의 이름과 작위를 잊고 시마와 공복의 항렬(行列)을 모르는 자는 있지 않으니, 소씨처럼 싣는다면 또 족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마침내 “다행히 남남이 되기 전에 소홀히 하고 잊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였다.”라고 한단 말인가. 고조와 증조, 시마와 공복도 오히려 족보가 있어야 잊지 않는 관계라면 남남이 되는 것을 겨우 면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면 소씨가 친친에 대해 너무 박하지 아니한가. 옛날 사마천(司馬遷)이 《(記)》를 지을 적에, 황제(黃帝) 이래의 씨(氏)와 성(姓)의 유래를 상세히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고 또 대부분 몇 대(代)인지를 밝혔으니, 만약 예로부터 보첩(譜牒)이 없고 또 보첩을 만드는 자들이 대다수 소씨처럼 간략하게 만들었다면 사마천이 어디에서 근거를 취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세보에 실은 것은 시조인 호장(戶長)으로부터 우리 형제까지 15세(世)가 되고, 우리 형제의 자손까지가 또 3세인데, 이보다 아래의 자손은 다만 아직 보이지 않아 기록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별도로 종통을 이룬 방계(傍系)도 모두 수록하였는데,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것은 다만 증빙할 길이 없어서 기록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와 같이 널리 실은 까닭은 친친(親親)의 의리를 극도로 넓히기 위함이다.

아, 아들로부터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고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아래로 내려오는 18대 종족이 모두 부자의 친한 관계가 아님이 없다. 내 몸에 있어 이미 그러하니, 곧 내 종족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만 갈래가 한 근원임을 생각하고 천 가지가 한 뿌리임을 살핀다면, 반드시 장차 금할 수 없는 정(情)이 우러나고 차마 할 수 없는 의(義)가 생겨날 것이니, 어찌 친(親)이 다하고 복(服)이 없다고 해서 종족을 남처럼 보는 데에 이르기까지 하겠는가.

금상(今上) 9년 계해년(1683, 숙종 9) 5월 갑진일에 반남 박세당이 삼가 쓰다.


[주D-001]뿌리가 …… 장구하다 : 백거이(白居易)의 해주자사배군부인이씨묘지명(海州刺史裴君夫人李氏墓志銘)에 “근원이 먼 자는 흐름이 길며 뿌리가 깊은 자는 가지가 무성하다.〔夫源遠者流長 根深者枝茂〕”라고 한 말이 보인다.
[주D-002]소씨(蘇氏)의 족보 : 소순(蘇洵) 집안의 족보서(族譜序)를 가리킨다. 《唐宋八家文 卷17 蘇氏族譜引》

西溪先生集卷之七 서계집 번역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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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승모님의 글 >

서계 선생의 계해보 서문을 다시 한번 살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위조(爲祖)란 시조가 틀림없음" 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셨지만 그렇게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먼저 윗글에서 제시된 해당 부분의 원문(사실은 고전번역원의 전사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朴氏。本出新羅。而枝散葉布。分處州郡。下而爲氓隷。上而爲公卿大夫。不可盡數。各以其世之可紀而爲祖。相之所興而著籍。其著以潘南而以戶長應珠爲祖者。吾族也。>
(참고: 고전번역원의 전사본 중 <相之所興而著籍。>에서 <相>자는 <祖>자의 오기임. 즉 계해보 원문(확인함)에는 <祖之所興而著籍。>로 되어 있음).

이어서 해당 부분의 번역(즉 고전번역원측의 번역)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박씨는 뿌리가 신라(新羅)에서 시작되어 자손들이 널리 퍼졌다.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살면서 낮게는 평민이나 종이 되기도 하고 높게는 공경(公卿)이나 대부(大夫)가 되기도 하였으니,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리하여 각각 기록할 만한 세손(世孫)을 시조(始祖)로 삼고 시조가 일어난 곳을 관적(貫籍)으로 나타냈으니, 반남으로 관적을 나타내고 호장(戶長) 응주(應珠)를 시조로 삼은 가문(家門)이 우리 종족이다.>

그런데 지적하신 문제의 부분 <.....以戶長應珠爲祖者。吾族也。>를 자세히 관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以  A  爲  B>는 한문에 흔히 등장하는 기본 형식(고정구)입니다. 이 형식은

<以   A    爲   B>:  < A 로써  B 를 삼다>

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A에 해당되는 부분이 <戶長應珠>이고, B에 해당되는 부분이 <祖>입니다. 그리고 끝의 <者>자는 흔히 "놈 자" 또는 "사람 자"로 훈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가지 뜻이 있고 기능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者>는 흔히 앞쪽 말의 수식을 받아 <.....(하는/한)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위의 <.....以戶長應珠爲祖者。吾族也。>를 직역하면

<..... 호장 응주로써(以戶長應珠) 조(즉 祖先)를 삼은(爲祖) 것(者)이 (바로) 우리(吾) 겨레붙이/씨족(族)이다(也)>가 됩니다.

다만 고전번역원 측에서 위의 <祖>자를 자기네들 식으로 <始祖>라고 번역해 버린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 <祖>자 하나만으로 <始祖>라고 번역한 것은 약간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번역자는 전후 문맥을 생각해 그냥 흔히 쓰는 말로 옮긴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위에 나오는 <爲祖>는 별도의 낱말이 아니며, <始祖>를 잘못 쓴 것도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참고: <爲祖>는 별개의 낱말(단어)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국어사전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더 말씀드립니다. <爲祖>는 <始祖>를 잘못 쓴 것이 아닙니다. 즉 그것은 한문 문장 속의 두개의 글자 <.....爲祖.....>일 뿐이며 별개의 독립된 낱말을 형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爲祖>는 명사(名詞)형 낱말이 아니라, <爲>는 술어(동사)이고, <祖>는 빈어(목적어)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혹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감히 외람된 견해를 올립니다. 불필요한 억측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승모 근.

< 이 글은 박승모님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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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승님의 글 >

서계선생 계해보(癸亥譜) 세보서가 우리종중번역본도 잘못된 것같으나 워낙 한문실력이 자신이 없으니 잘못됐다고 장담하지 못하겠고 한학에 실력있는 각자 번역해보시기 바랍니다. 위조(爲祖)     가 어느 문집에 시조라고 기록된것 같은데 사전을 찾아봐도 없습니다.서계선생 통설(通設)혹은 사변록(思辨錄)은 사서중 대학 중용을 주로 많이 변록한것 같은데 예기(禮記)라는 책은 춘추전국시대에 전해내려오던 책이라고도 하나 자세한것은 알수없고 진나라 진시황때 분서(焚書) 갱유시 한나라 선비가 타다 남은 책장을 주어모아 역은것이 대학 중용에 다 인용 한것인데 대학 중용 은     앞뒤가 맞지않아 서계선생께서 바로잡아 변론한것인데 사서를 자기멋대로 변론했다고 집권노론에 의해서 사문난적이라는 선비로서 참을수 없는 죄목으로 귀양감 죄는 다른데 있는데 사변록을 트집잡아 죄를 덮어씌운것 같음

시조라고 예기 또는 주자대전을 인용하여 시조가 아니고 선조 라고 끝까지 반대해서 뿌리공원에 시조라고 쓰지 못하게 끝까지 반대하고 뒤로 간부들에게 서신을 돌리고 그리고 승지공 낙람실기도 안동임사록을 뒤져 잘못해석해 놓아 지금까지 시비하고있습니다.

직계선조가 시조라고 기록해 놓은 임오보도 부정하면서 남에말만 듣고 부화뇌동해서 판관공 전체를 웃음거리고 만들더니 또 이번대동보 관계도 이런사람들에 말만듣고 동조 하는것 같은데 우리는 누가 뭐래도 새로한 파보는 갖고있는데 또 깊이생각지도 않고 같이 동조해서 판관공파 전체를 욕먹게 하는데 도저히 저는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뭐가 답답 해서 주동이 돼 대동보 가로 쓰기를 반대하고 세로쓰기도 하고 가로 쓰기도 하자고 하는데 하자는 데로 하면 경비가 1억 가까이 든다고 함니다 한푼 이라도 절약해서 자손 들을 위한 사업을 깊이 생각 해야 할줄 로 생각 하며 대동보 이것 마저 통일 하지못하고 숭조 돈족 은 무었임니까 그리고 간부라는 분이 자기 마음 에 들지 않는 다고 하기 싫으면 본인만 하지말지 여기 저 기 전화하고 뒤로 서신 을 돌려 선동해서 종중을 분열 해 또 웃음 거리로 만들려고하심니까 표결에 몇번씩 참여하고 본인 뚯대로 잘않됀다고 종친들을 선동 하시는데 그러면 처음부터 참여 하지 말든지 경북 지회장이 판관공 파 대표라고 착각하지 마시고 심사숙고 하시고 행동 하시기바람니다  

주자대전 예기을 인용 해 서계 선생 해석 문을 인용하시는데 그당시는 쓸수있으나 지금와서 이것이 무순 소리임니까 중국이 자기 나라연호 를 쓰라고 강요 하고 심지어 여자가 모자라니 여자 끼지 요구했다고함 중국으로 끌려가 낳은 자식을 호놈 또는 호로 라고 했담니다 이런데도 아직도 선조라고 시비 하렴니까 주자대전은 지금부터 800년전 남송에 주자 문집이며 방대한 저서 120여권이 봉화 유곡( 닭실)저의 외가 종손댁에 몇권빠지고 보물로 지정돼 봐관하고있음 그리고 예기를 예경이 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임니다

서계 선생 깨서 이것이 잘못돼다고 하시다가 귀양까지 가신분이 그런 글썼다니 밑으수 없고 반남박문 에 세보    서문도 우리가 해석문을 잘못 알고 있는겄 같으니 다시 각자 해석 보시고 틀린부분이 있으면 바로 해석헤 보시도록 합시다 위조는 시조가 틀림없음 그러면 서계 선생 깨서도 시조라고 쓴것임니다

<<  인천 우거에서 찬승  >> 님의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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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溪先生集卷之七

序 十十九首

譜者奚謂。謂所紀之普也。普紀其族。名曰族譜。此譜朴氏之族。又奚不曰族譜。曰世譜。世以係其族。言世不言族。可也。朴氏。本出新羅。而枝散葉布。分處州郡。下而爲氓隷。上而爲公卿大夫。不可盡數。各以其世之可紀而爲祖。相之所興而著籍。其著以潘南而以戶長應珠爲祖者。吾族也。吾族之見於時。當高麗之 末。及本朝而始盛。至今三百年。益蕃且大。冠于諸姓。語云。根深末茂。源遠流長。夫是言也。豈冠冕閥閱之謂哉。彼其功德積累於前。而慶澤衍溢於後。天將以是爲勸世之徵也。以吾族之蕃衍昌大如此。爲譜不可不詳。而舊患疏略。又爲之於數十年之前。而後出者不與著焉。接不承之緖。補見缺之文。將必有待。族弟世采和叔。始爲今譜。中屬之于族姪泰徵。凡十七年而就。夙病於略者無有不詳。嗣晩而出者。畢得以著。旁釐舛訛。亦非一二。其例則墳墓所在必書。徙居所始必書。所以追遠而辨族也。女之子不在大書 之列者。所以正俗謬而別異姓也。仕不仕。娶某氏。享年幾。某日卒必備書者。擇於蘇氏之譜而用其善者也。吾因是有感。而惜明允之薄於親親。爲未仁也。彼其爲譜也。上止高祖。下止於子。傍止緦麻。如是而曰觀吾之譜者。孝弟之心。可以油然而出。不亦甚乎。彼將以擧天下之人。而爲不祖其祖。不子其子。視期功以塗人而已。顧獨厚耶。夫譜以紀之。欲無失忘也。天下未有忘高曾之名爵而失緦功之行第。則又焉用譜爲也。乃曰幸其未至於塗人也。使其無致忽忘焉。高曾緦功。猶且待譜而後不忘。才免爲塗人而已乎。 蘇氏之於親親。不已薄矣。昔司馬遷爲史記。黃帝以來氏姓所出。無不詳記。又多著其代。若古無譜牒。又其爲之者。率如蘇氏。彼焉取之哉。今譜所著自戶長至吾兄弟爲十五世。至吾兄弟之孫。又三世。下是者。特以未見而無記焉耳。其旁支別統自各爲宗者。靡不畢收。外是者。特以無徵而未錄焉耳。若是者。所以廣親親之義。無不用其極也。嗚呼。自子而父。溯以上之。自父而子。沿以下之。十八代之間。莫非父子之親也。在吾身旣然。乃吾族亦然。由是而念萬派之同源。察千支之一根。必將情有所不禁。義有所不忍。何至 以親盡服疏。而視之同於塗人乎哉。今上九年癸亥五月甲辰。潘南朴世堂。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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