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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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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의 영원한 삶은 의리를 지켰다는 이름이다

역으로 보는 세상 24 -
선비의 영원한 삶은 의리를 지켰다는 이름이다  
유교신문사 2013/06/05    

초구는 밝음을 잃은 때는 날지 않고 그 날개를 접어야 하니, 군자의 도를 행함에 사흘을 먹지 못해서 간다고 하니 주인이 걱정하는 말을 한다. 상에 말하기를 ‘군자가 감’은 의리 때문에 녹을 먹지 않는 것이다.[明夷卦 初九]

서백 창(문왕)이 서거한 후, 아들 발(發:훗날의 무왕)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은나라를 치러갔다.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백이와 숙제가 서로 왕위를 물려받지 않겠다고 은둔하고 있다가, 발의 말고삐를 잡고 “어떻게 신하가 임금을 치려고 하십니까?”라고 간하였다. 발이 “임금은 백성이 있고나서 임금이다. 백성이 수(受:수신왕=주왕)의 곁에서 떠났으니, 수는 그저 지아비에 불과하다. 나는 그 악한 지아비를 치는 것이지, 임금을 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수신왕(주왕)을 죽이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그러자 백이·숙제는 “신하로써 임금을 치는 것만 해도 의리에 어긋나는 일인데, 수신왕이 폭정을 했으면 수신왕만 바꾸면 되지, 어찌해서 이제껏 백성을 잘 다스리던 왕조를 없애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는가? 말로만 폭군을 친다는 것이지, 실은 네가 임금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는가? 은나라에 대한 의리때문에 주나라의 녹을 먹을 수 없다”고 하며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 죽었다.

훗날 성삼문이 서장관의 임무를 띠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 수양산을 지나가며 백이와 숙제의 묘비를 보고는 시를 한 수 지었다.

“當年叩馬敢言非하니(당년고마감언비:은나라를 치러갈 때 말 붙들고 그릇됨을 말했으니)/
大義堂堂日月輝라(대의당당일월휘:대의가 당당하여 해와 달처럼 빛났었네)/
草木亦霑周雨露어늘(초목역점주우로:초목도 주나라의 비와 이슬을 맞은 것이거늘)/
愧君猶食首陽薇아?(괴군유식수양미:그대는 부끄럽게도 수양산의 고사리를 먹었는가?)”

이 시를 백이·숙제 형제의 묘비석에 써서 붙여 놓고 내려왔는데, 그 후로 묘비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고 한다. 뒷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본 선비 한 분이, 그래도 후세의 사표가 될 절개 곧은 분이 너무 곤란함을 겪는다고 생각하여 백이·숙제를 변명하는 글을 지었다.

“葉周葉而不食하고(엽주엽이불식:잎새는 주나라 때 난 잎새이므로 먹지 않았고)/
根殷根而採之라(근은근이채지:뿌리는 은나라 때의 뿌리이므로 캐어서 먹었네”라는 글을 써서 묘비에 붙이자 그때부터 식은땀이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절개를 지키는 선비는 죽어서도 의리라는 명분을 중시함을 보여준 것이리라. 그래서 주공이 이 사실을 명이괘 초구의 효사로 써서 易의 교훈으로 삼고, 공자님도 그 뜻이 왜곡될세라 “의리 때문에 벼슬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역으로 보는 세상 24 -
선비의 영원한 삶은 의리를 지켰다는 이름이다  
유교신문사 201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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