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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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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규수, 실학의 정신으로 어사 활동(2편)
이글은 < 암행어사 입니다 > 홈페이지에서 갖어온 글입니다.




실학의 정신으로 어사 활동을 한 박규수(2편)

1854년(철종5) 경상좌도 어사 박규수(1807 ~ 1877)


연암 박지원의 애민정신과 청렴함을 이어받아 민심을 수습하고 관리의 모범을 보여준 어사 박규수 이야기. 박규수는 실학과 개화사상을 잇는 고리로서 연암 못지않은 명성을 쌓았다.  

박규수의 할아버지인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 사또로 있을 때 일입니다.
관아에 구휼(救恤 : 빈민이나 이재민 등을 돕고 보살핌)하는 곳을 두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나누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연암은 백성들을 구휼하는 중에도 예의가 있어야 하며, 죽을 나누어주기 전에 염치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암은 먼저 뜰에다 금을 그어 남녀를 구분하고 어른과 아이, 양반과 일반 백성의 자리를 구분했습니다. 그 다음 동헌에 앉아 먼저 죽 한 그릇을 들었습니다. 그 그릇은 구휼에서 쓰는 것과 똑같은 하찮은 것이었으며 소반이나 상 같은 건 차리지도 않았습니다. 연암은 남김없이 죽을 다 들고나서, "이것은 주인의 예(禮)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이렇게 하는데 무슨 부끄러움을 느끼겠는가. 다른 사또들도 이렇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탄복했습니다.
연암의 평소 지론은 이러했습니다.
"백성들이 사소한 은혜만 알 뿐 큰 은덕을 모른다고 해서 고을 원님들은 늘 사소한 은혜만 베풀어 명예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백성을 다스리는 요점을 알지 못한 탓이다. 고을 원님들은 오로지 큰 도리를 지켜서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는 것을 요점으로 삼아야 한다."
할아버지 연암이 살아 계셨더라면 도리도 모르고 애민정신도 없는 수령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 그제서야 박규수는 차분한 마음으로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밀양 영남루에서 "암행어사 출두요!"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습니다. 순식간에 밀양 관아에 들이닥친 박규수는 관아 문서를 모조리 가져오도록 지시하고 철저하게 불법을 가려내기 시작했습니다.
밀양부사 서유여의 비리는 소문 그 이상이었습니다. 2년 동안 서유여가 환곡을 빼돌린 돈은 무려 1만 3,000여냥, 곡식은 2만 4,000여석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어사 박규수는 당장 창고를 봉쇄하고 밀양부사 서유여를 그 자리에서 쫓아냈습니다.
서유여는 어렸을 적부터 보아왔던 아들의 친구가 자신에게 이렇게 심하게 나오자 배신감과 노여움에 떨었습니다. 그는 박규수에게 으름장도 놓고 애원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박규수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오랫동안 밀양에서는 어사 박규수의 대쪽같은 성품에 대해 이야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박규수가 오랜 친구에게 너무 야박하게 굴었다고 비방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서승보는 다시는 박규수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며 절교를 선언했습니다.
박규수는 이 때의 심정을 동생 박선수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서승보는 나와 평생 심복하던 벗이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루아침에 절교할 수 있단 말인가? 천하에 이런 도리가 있는가? 이 일로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 차고 머리는 몹시 아프다. 잠도 오지 않고 밥맛도 없어 방안을 돌며 방황하니 이런 경우는 일생에서 처음 당한다. 가족들은 매번 객지에서 병들까 걱정하지만 이러한 고충은 전혀 알지 못하리라."
대쪽같은 성품으로 치자면 동생 박선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선수도 훗날 암행어사가 되었는데 그들 형제와 절친했던 김상현(金尙鉉)의 사촌형이 잘못을 저지르자 용서하지 않고 파면시켰던 것입니다.
암행어사 임무를 마치며 박규수는 장장 250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임금에게 올렸습니다. 이것은 다른 어사들에 비해 두 배나 많은 분량으로, 그가 얼마나 철저하고 꼼꼼하게 임무를 수행했는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는 이 보고서를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누누이 밝히고 나름대로 삼정(三政)의 개혁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박규수가 예견한 대로 그로부터 몇 년 뒤 관리들의 수탈과 부정부패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농민들이 진주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바로 진주농민항쟁입니다. 이 때 박규수는 암행어사 때의 활약을 인정받아 안핵사1)로 특별히 파견되기도 했습니다.
훗날 박규수는 만 3년 2개월 동안 평안도감사를 지내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박규수가 평안감사로 있을 때 나라에서는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규수의 관내에서는 천주교 박해로 인한 희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천주교를 좇는 것은 결국 나라가 이들을 교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므로 처벌보다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즈음 박규수는 사상적 전환을 맞았습니다. 다양한 대외활동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목격하게 되면서 그의 사상은 점차 실학에서 개화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861년 열하부사(熱河副使)로서 청나라를 방문한 일이었습니다.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중국을 보면서 박규수는 조선에도 곧 이러한 시기가 올 것을 직감하며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가 왕릉을 도굴하기 위해 무장을 하고 불법 침입한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이 때 박규수는 평안감사로서 직접 지휘에 나서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켰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겪은 뒤 박규수는 더욱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자주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도 정치 때문에 정치는 부패해 있었고 민심은 조정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흥선대원군입니다.
민심이 조정을 떠났음을 잘 아는 대원군은 정권을 잡자마자 대폭적인 개혁 조치를 취했습니다.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원성이 높았던 환곡제를 폐지하였는가 하면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물렸습니다.
대원군의 개혁에 박규수는 지지를 보냈습니다. 실학사상을 계승한 박규수는 개혁으로 사회가 안정되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원군은 서양 문물이 들어오는 것을 모두 금지하고 서양인들과 교류하는 것 자체를 완전히 틀어막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원군과 마찬가지로 박규수도 외세의 부당한 요구에는 당당히 맞서야 하고, 침략해 온 적은 군대로써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개항 문제에 관한 한 대원군과 박규수의 생각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이제라도 서양의 나라들과 평화적으로 국교를 맺고 교류를 시작하여야 한다. 그들은 과학 기술이나 경제, 군사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하루라도 빨리 이들의 문물을 받아들여서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박규수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원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다.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하여야 한다. 그러나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
1872년 박규수는 다시 한번 중국에 사절단으로 다녀오게 됩니다. 이 때 그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2)을 목격하고 더더욱 쇄국(鎖國)이 아닌 개국(開國)을 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규수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대원군에게 여러 차례 개국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지만 대원군은 끝까지 쇄국을 고집했던 것입니다. 박규수는 갈수록 천장을 쳐다보며 탄식하는 날이 늘어갔습니다.


"이 나라가 망해가고 있으니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가련한 우리 백성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늘로부터 버려져야 한단 말인가?"
결국 박규수는 1874년 9월에 사직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만 한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박규수는 똑똑하고 젊은 양반자제들을 사랑방으로 불러들여 연암집 을 강의하기도 하고, 서양의 정치·경제·역사·지리·풍속 등을 소개한 중국의 책들을 읽게 했습니다. 이 때 박규수의 집 사랑방을 드나들었던 양반자제들이 바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유길준 등으로 훗날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들입니다. 박규수는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그의 집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의 기초를 놓았던 것입니다.
1875년 9월 일본이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켜 수교를 강요해 왔습니다. 이 때 박규수는 오경석 등과 함께 정부 당국자들을 설득해 1876년 2월 드디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하였습니다. 이 활동을 끝으로 박규수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사대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진취적이고 실용적인 사상을 가지고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안간힘을 썼던 환재 박규수. 그는 북학파의 거두 연암 박지원의 후손으로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을 잇는 고리였습니다. 그 스스로 새 이정표를 세운 인물이 된 것입니다.

1)안핵사 ; 조선 후기 지방에서 민란을 무마 ·진정시키기 위해 임시로 파견된 직책. 임무는 사건의 원인과 진행 등의 전말과 상황에 대해 조사하고 이를 중앙에 보고하였다.
2)양무운동(洋務運動) : 봉건체제의 유지 보강을 서유럽으로부터의 근대기술 도입으로 이루려 한 청국 정부의 자강(自强)운동을 말한다. 양무운동은 중국 자본주의 발달의 싹이 되었다.


참고자료

박규수(朴珪壽)는 1807년(순조7)에 태어나서 1877년(고종14)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41세 1848년(헌종 14)에 증광시(增廣試) 병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 용강 현령, 부안 현감, 동부승지, 사헌부장령, 평안 감사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47세 1854년(철종 5) 11월 28일 경상좌도 암행 어사로 민정을 살폈습니다.

<관련기록>

1854년(철종5) 경상좌도 암행어사 박규수의 별단

철종실록
철종 5년 11월 28일 '서계하여 전 경주 부윤 남성교 등을 탄핵한 경상좌도 암행 어사 박규수를 불러 보다 '

박종채, <나의 아버지 연암 박지원>



이글은 < 암행어사 입니다 > 홈페이지에서 갖어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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