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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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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규수, 실학의 정신으로 어사 활동(1편)
이글은 < 암행어사 입니다 > 홈페이지에서 갖어온 글입니다.




실학의 정신으로 어사 활동을 한 박규수(1편)

1854년(철종5) 경상좌도 어사 박규수(1807 ~ 1877)


조선 말기 개화사상가였던 박규수 이야기. 어사 박규수는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이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의 일화를 떠올리며 사사로운 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잘못이 있는 탐관오리들을 엄히 다스린다.  

1824년 여름의 일입니다.
한양 계산동(지금의 서울시 가회동)의 한 초당(草堂)에서 박종채라는 한 선비가 18세 된 그의 맏아들과 함께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때 웬 비렁뱅이 노파가 초당을 기웃거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상도 하지. 초당 모양이 어쩌면 이리도 우리 고을 관아에 있는 정자와 똑같을꼬?"
그 소리를 듣고 박종채가 노파를 불러 어디 사람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안의현(현재 경상남도 함양군)인뎁쇼."
그러자 박종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습니다.
"너희 고을 관아에 있는 정자는 누가 세웠느냐?"
노파가 대답했습니다.
"30년 전 박사또께서 고을을 다스릴 때 세우셨는데 그 모양이 이 초당과 똑같사옵니다."
"너희들이 아직도 그 어른을 칭송하느냐?"
"별다른 칭송이야 있겠습니까? 다만 새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늘, '예전의 박사또 같기야 하겠어?'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돈을 모아 술 마시고 놀 때면 언제나 박사또 얘기를 하면서 '그 분은 풍채가 훌륭하고 풍류를 좋아하셨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듯 하면서도 위엄이 있고 인자하셨어. 그 때문에 관아와 고을이 모두 한가하고 편안하여 저절로 즐거웠지. 박사또께서 고을을 다스리는 동안에는 수령의 존재를 잊고 살았으니까. 수령이란 원래부터 그런 줄 알았는데.. 그처럼 좋은 시절은 다시 볼 수 없을 게야.'라고들 말합니다."
그 말을 들으며 박종채는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노파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사또께서 떠나시고 몇 년 뒤에 고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송덕비를 세우기로 했지요. 그런데 박사또께서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매우 화를 내시면서 '너희들이 끝내 송덕비를 세우려 든다면 집안의 하인들을 보내 송덕비를 깨부수어 땅에 묻어버리고 감영에 고발하여 주모자를 벌주도록 하겠다'고 하셨답니다. 그러는 바람에 송덕비를 세우지 못하고 말았지 뭡니까요."
박종채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옆에 있던 그의 아들이 그 모습을 보고 노파에게 말했습니다.
"그 분이 바로 내 조부님일세."
"네에? 그럼 여기가 박사또님의? 아이구.. 아이구.."
노파는 기쁨과 황송함에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안의현 백성들이 30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는 박사또- 그는 바로 연암 박지원이었습니다. 계산초당은 바로 연암 박지원이 지은 것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과 손자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박사또님을 빼다 박으셨습니다. 황송합니다만 함자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노파가 박종채의 아들, 즉 박지원의 손자를 보며 물었습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박규수라고 하오."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인 환재 박규수는 1807(순조7)년에 할아버지 박지원이 말년을 보낸 바로 그 계산초당에서 태어났습니다. 박규수의 집안은 뼈대있는 양반 가문이지만 박지원이 그랬듯이 그의 아버지도 과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어려서부터 매우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박규수는 15세 때에 이미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한성부윤 조종영(趙鍾永)이 망년지교(忘年之交 :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귀는 젊은 벗. 망년지우(忘年之友))를 청해왔을 만큼 학문의 수준이 매우 높았습니다. 20세 무렵에는 훗날 익종이 되는 효명세자(孝明世子)와 함께 토론도 하고 글도 지으면서 문명(文名)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둘도 없이 가깝게 지냈던 효명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같은 시기에 어머니, 아버지도 연이어 세상을 뜨자 박규수는 크게 상심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박규수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학문에 전념할 뿐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박규수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 , 열하일기 등을 읽고 실학적 학풍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특히 열하일기 에서 강조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때는 명(明)에 대한 의리를 중요시 여기고 청(淸)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연암의 주장은 널리 수용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박규수는 할아버지 연암의 주장에 깊은 감명을 받고 1848년(헌종 14), 그의 나이 42세에 비로소 과거를 치르며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과거 급제 후 중앙에서 사간원 정언, 병조정랑 등의 관직을 거치다가 1854년(철종5)에는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임명됐습니다.
암행어사의 경험은 훗날 박규수의 개혁사상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암행어사가 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 수 있게 되었고 세금제도를 비롯한 여러 문제점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어 내정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몇 년째 지독한 가뭄과 흉년이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못 먹어서 누렇게 뜬 얼굴로 배를 움켜쥐고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이 곳곳에 넘쳐나는 것을 보면서 박규수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가뭄보다 더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부패한 관리들이었습니다. 정치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지면서 백성들은 각종 세금을 부당하게 바쳐야 했습니다. 수령들은 아전들한테 돈을 뜯고 아전들은 백성들한테 돈을 뜯으니 힘없는 백성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박규수가 경상도 암행어사로 내려오면서 살펴보니 그 폐단이 영남지방에서 가장 심했습니다. 특히 조령을 넘으면서 박규수가 가장 많이 들은 것은 밀양부사에 관한 원성이었습니다. 박규수가 밀양부사에게 취한 행동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밀양의 형세가 마치 침수되기 시작한 배와 같구나."
밀양에 대한 모든 염탐을 끝낸 박규수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밀양의 부정부패는 아주 심각한 지경이었습니다. 비리의 선봉장은 단연 밀양부 사또 서유여. 그는 백성들에게서 각종 명목으로 돈을 걷어서는 그 중 3천여 냥을 자기 몫으로 챙겼다는 것입니다.
박규수는 날이 밝는 대로 밀양 관아에 출도해서 문서들을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 박규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함께 공부하던 친구 서승보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박규수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서승보는 바로 밀양부사 서유여의 아들, 즉 서유여는 친한 친구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우정을 생각해서 서유여의 부정을 눈감아줘야 하는 것은 아닌지... 박규수는 괴로운 마음을 어쩔 수가 없어 방안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그 무렵에는 암행어사 제도도 예전처럼 엄격하게 관리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또한테서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거나 이를 빌미로 세도가문에 아첨하는 어사가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규수는 설령 동생이 그런 부정을 저질렀다 해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처리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벗의 아버지라 한들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뻔히 보고도 눈감아 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은 어찌 돼도 상관없지만 할아버지 박지원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글은 < 암행어사 입니다 > 홈페이지에서 갖어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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