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남박 인명사전 ::::::
선조님들의 행적을 기록한 작은 반남박씨 인물사전입니다, 기록한 내용들은 각 소종중
의 자료, 세보의 세적, 비갈 및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비롯하여 각종 인터넷백과사전 자
료 등을 참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종친 분들의 많은 참여와 자료제공을 부탁 드립니다.
참고로 앞부분 (예) 09-02-0057 은 9세 경신보 2권 57쪽에 등재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2세
박의(朴宜) 급제공(及第公).
2자(二子) 윤무(允茂) 환무(環茂).
묘(墓)는 실전(失傳) 되었으며 상로재(霜露齋) 우측에 비단(碑壇)을 세웠다.
급제공(及第公) 휘(諱) 의(宜) 사적(事蹟)
휘(諱) 의(宜)의 묘(墓)는 실전(失傳)되었다. 봉현(峰峴)에서 10리 되는 공암현(孔岩縣) 마산리(馬山里)에 한 고총(古塚)이 있는데 박씨 산(朴氏 山)이란 전설(傳說)이 있으나 그곳에 사는 서가(徐哥)가 그 곁에 여러 번 장사(葬事)를 하였고 또 반남리(潘南里)에는 정가(鄭家)의 죽림(竹林)속에 고총(古塚)이 있는데 또한 박씨 묘(朴氏 墓)라는 말이 있어 영조(英祖) 경진(庚辰 1760)년에 18세손인 도원(道源)이 두 곳을 찾아보았으나 모두 증거(證據)가 없었다.
문찬(文燦)이 장연족보(長連族譜)를 했는데 그의 말에 “공(公)은 송도(松都)의 성등동(星燈洞)에 살았는데 묘(墓)는 풍덕(豊德)에 있다.” 고 하였고 또는 “관직(官職)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추밀사(樞密使)이며 배위(配位)는 윤씨(尹氏)이고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 대호군(大護軍) 윤보(允輔)의 딸이다.” 라고 했으나 타보(他譜)에는 없으니 괴이(怪異)한 것이다.
전설(傳說)에는 묘(墓)는 반남서원(潘南書院)의 북(北)쪽 음판촌(陰坂村)의 뒤라고 한말이 있으나 확실(確實)하게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전설(傳說)에는 묘(墓)가 마산(馬山)에 있다고 하나 마산(馬山)이 처음은 어느 군(郡)인지 몰라서 14세손인 세채(世采)가 일찍이 파주(坡州)에 살 때 비로소 그 주경(州境)에 마산(馬山)이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전설(傳說)에 박씨 묘(朴氏 墓)가 이곳에 있다는 말도 있어서 몇 해 동안 찾다가 퇴임(退任)한 뒤에 나주(羅州) 봉현(峰峴)에서 10리 되는 곳에 마산리(馬山里)라는 이름이 있고 이중(里中)에는 일암(一岩)이 있는데 암석(岩石)에 구멍이 많기 때문에 공암 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반남선생의 행장에 의(依)하면 선생(先生)은 공암현(孔岩縣) 마산리(馬山里)에서 때어났다. 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땅인가.
공암(孔岩)의 아래는 한 고려조(高麗朝)의 고총(古塚)이 있는데 전설(傳說)에는 박우(朴禹)의 무덤이라 하고 또한 마산리(馬山里)안에는 한 마을이 있는데 박가 촌(朴哥 村)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우(禹)와 의(宜)는 글자 음(音)이 와전(訛傳)되기 쉬운 것이다. 지명(地名)과 촌명(村名)은 서로 맞으니 이것이 혹시(或是)나 증거(證據)가 될까?
다만 고려조(高麗朝)의 장지(葬地)에는 반드시 유현(幽顯)한 표지(表識)가 있기 때문에 도원(道源)이 안찰사(按察使)로 왔을 때 땅을 깊이 파보았으나 마침내는 증거(證據)가 없었으니 어찌 의심(疑心)이 나지 않겠는가.
혹(或)은 말하되 어느 때인가 호장공(戶長公)의 묘(墓)를 개축(改築)할 때 묘지(墓誌)가 묻혔는지를 찾으려고 영역(塋域)을 널리 파보았으나 마침내 소득(所得)은 없었으니 또한 이상(異常)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