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흥 오창공 신도비 ]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22-2에 박동량(오창공)의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시흥시 향토유적 제12호(1988. 5. 31)
지정된 바있다.
오창공 박동량(朴東亮)은 1569(선조 2)∼1635(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반남박씨 13세손이다. 자는 자룡
(子龍), 호는 기재(寄齋), 오창(梧窓), 봉주(鳳洲), 대사헌 응복(應福 졸헌공)의 4째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병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 있게 하여 대중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
하였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이듬해 동부승지·좌승지를 거쳐 다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하여 황해도 수안(遂安)에
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폈다. 이어 연안부사·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도 전란 뒤의 민생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간 수묘(守墓)하고, 1611년(광해군 3)판의금부사가 되었다.그런데 일찍이 선조
때부터 한응인(韓應寅), 유영경(柳永慶), 서성(徐), 신흠(申欽),허성(許筬), 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7신의 한 사람으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다.
1612년 김직재무옥사건(金直哉誣獄事件)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으로 있던 그가 무고임을 알고 연루자들을 용서하려 하다가 더욱
미움을 받아, 그뒤 자주 탄핵을 당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곧 풀려나와 복관되었으나 이듬해 계축옥사 때 모반혐의로 심문을
받다가 혐의가 희박하여 극형은 받지 않았는데, 이때 반역관계는 극구부인하면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은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계축옥사 때 유릉저주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도 시인해서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생활의 곤욕을 치르게
한 죄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충원으로 옮겨지고, 1632년(인조 10)전리에 방귀되었다.
뒤에 아들 미(?)와 의(?)의 상언(上言)으로 복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역은 군자봉 동쪽 능선상에 자리 잡았으며, 묘 아래에는 아들 박미(朴彌, 금양위)의 묘가 있다.묘역의 석물 배치는 봉분앞에
상석, 향로석등과 그 좌우에 묘비, 망주석등이 있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동북쪽으로 약 250m 지점에 아들 박미의 신도비와 함께 서 있다. 신도비의 비신은 높이 2m45㎝, 폭 1m13㎝,
두께 36㎝인데 석질은 오석(烏石)에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영조 1년(1725)에 세운 이 신도비는 이조판서 김상헌이 짓고 글씨는 중추부사 송시열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형조판서 민유중이
썼다. 1994년 10월 24일 후손들에 의해 신도비각과 사적비가 건립되었다.
[ 박동량 선생 묘 및 신도비 ]
시흥의 지정문화재인 오창공 박동량 선생 묘 및 신도비는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 22-2 군자봉 동쪽 능선상에 위치해 있고, 시흥시 향토유적 제 12 호로 1988년 5월 31일 지정되았다.
건립 시대를 살펴보면 묘의 조성은 조선 인조 13년(1635)에, 신도비는 조선 영조 1년(1725)에 , 신도비각과 사적비(글: 단국대 박천규 교수)는 1993년 10월 24일, 반남박씨 오창공파종중에 의해 건립 되었다.
(박동량 묘 아래에는 아들 박미(朴彌, 금양위)의 묘가 있다.)
석물의 배치는 봉분 앞에 상석. 향로석 등과 그 좌우에 묘비. 망주석 등이 있다.
■ 박동량(오창공) 신도비
신도비는 묘소에서 동북쪽으로 약 250 m 지점에 아들(박미)의 신도비와 함께 서 있는데, 크기를 살펴보면 높이 2.45 m, 폭 1.13 m, 두께 36 cm 이며, 모양은 2단의 기단석 위에 석신(石身)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를 올려놓았다.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조각해 놓았고, 첫 번째 기단석은 땅속에 묻혀 크기를 알 수가 없다. 두 번째 기단석은 높이 1.79 m, 폭 1.23 m 로 석질은 오석(烏石)이다.
비문은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인조 19년(1641)에 찬술(撰述)하였으나, 상사(喪事)가 잇달아서 돌에 새겨 세우지 못하다가 영조 1년(1725)에 이르러 그의 5대손인 박사익(朴師益)이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있을 때 세운 것이다.글씨는 중추부사(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전자(篆字)는 형조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썼다. 추기(追記) 기록은 그의 현손 전 장령(前掌令) 박필주(朴弼周)가했고, 글씨는 5세손 강화유수 박사익이 썼다.
■ 박미의 신도비
비신의 크기는 높이 2.1 m, 폭 1 m 이내, 두께 49 cm ,이수의 모양은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조각이다.
비문의 내용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글씨는 이조판서 이의현(李宜顯)이, 전자는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썼다.
[ 찾아가는 길 ]
▶ 승용차 이용
인천 – 안산신갈 고속도로 서안산IC에서 빠져나와 39번 도로에서 시흥시청방향으로 조금가다가 군자봉 방향으로 좌회전 군자동 군자봉 동쪽 능선상
▶ 좌석버스 이용
1, 산뒤 하차 서남쪽으로 5분. (산뒤마을과 영각사 사이)
▶ 마을버스 이용
7-3, 산뒤하차 서남쪽으로 5분. (산뒤마을과 영각사 사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