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일나들이

  나주 반남 합천 재각 나주 기오정 시흥 신도비 논산 영사재 안의 물레방아 함양 산청
금산 숭모사파주 자운서원수락산노강서원 낙산 백림정 구리 동구릉 안동 은곡서원
경북 영주영주 무섬마을 광릉 수목원
 
 



[ 의정부 수락산 ]
서울시 노원구,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남양주시 진건면에 걸쳐있는 높이 638 m 의 수락산은 예로부터 도봉산, 북한산과 함께 서울의 수호산으로 여겨져 왔다. 북쪽에 자리잡고 있어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수락산은 화강암과 모래돌로 되어 있어 암벽이 노출되어 있기도 하나, 산세는 그다지 험하지 않다.
동쪽의 금류계곡에는 금류동(金流洞), 은선동(隱仙洞), 옥류동(玉流洞)의 세 폭포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삼각산, 도봉산과 더불어 서울 외곽의 3 대 명산이다. 서쪽 사면에 쌍암사(雙巖寺)와 석림사(石林寺)가, 남쪽 사면에 계림암(鷄林庵)과 흥국사(興國寺)가 있다.
뛰어난 절경에 예로부터 문인, 묵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을 만큼 바위의 경치가 뛰어나고 곳곳에서 맑은 물이 흘러 내린다. 매월당 김시습과 서계 박세당이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전에도 서거정, 남효혼, 채수, 유숙, 이안눌, 신익성, 정두경, 김득신, 김수흥, 남용익 등 일류 문사들의 족적이 미쳤던 곳이다.
김시습은 한 시대를 풍미한 통유(通儒)로서, 계유정난 이후로는 탕유(蕩遊)로서 생을 달관한 인물이었다. 한 때는 그 유명한 매월당에서 수락산의 주인노릇을 한 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수락산의 격을 한층 더 높여 놓았다. 그의 아호 동봉(東峯) 역시 수락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장암동 동막골에는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반남박씨 15세손 서계 박세당 선생이 지었다는 정자인 6각형의 궤산정이 있다. 환로에 염증을 느낀 박세당도 이른 나이인 40세(1668)때부터 수락산에 은거하기 시작했다.
석천동(石泉洞)이란 지명 자체가 그가 붙인 이름이며, 그의 호인 서계(西溪 :김시습의 동봉東峯에 대가 된다.)도 수락산의 개울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수락산 주인이라고 자처할 만한 이곳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으며, 각종 저술이 이곳에서 탄생되었다.
한편 노론의 중심축인 안동김씨 청음(김상헌)가문과 소론의 반남박씨 서계(박세당)가문은 남양홍씨 홍심(洪深)가문과의 인척관계에 따라 오래전부터 별 문제없이 나란히 수락산을 경영해왔다. 김수흥은 옥류동에 정자를 건립했고, 박세당은 석천동을 경영하였다.
그런데 두 가문은 정쟁의 와중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고,『사변록』을 변파하는 과정에서 극단으로 치닫고 말았다.
이후 노론세력 중에서도 특히 수락산 인근 지역에 별장을 마련하고 있었던 연안이씨 정관재(이단상)가문, 안동김씨 청음가문, 의령남씨 호곡(남용익)가문의 자제들은 수시로 수락산을 유람하며 노론가문의 극성함을 과시하였다. 특히 이단상의 아들 이희조의 수락산에 대한 점유욕은 더욱 강렬했는데, 별업의 규모를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안동김씨, 연안이씨, 여흥민씨 등 노론가문의 명사들과 대대적인 수락산 유람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때는 서계 박세당이 석천으로 들러온 지 벌써 15년이 되는 해인데, 서계에 대한 표현이 일언반구도 없는 것을 보면, 수락산을 둘러싼 노,소론 명사들의 심리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한 번쯤 가볼 만한 곳이기는 한데, 주저하는 이유는 산의 아름다운 경치 대부분이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비교적 이름난 유원지는 서울의 반대편에 있고, 부근에 있는 백운동유원지는 주변의 도봉산과 북한산에 가려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등지고 서있는 수락산을 "반역산"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산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게 잡을 수 있고, 정상에 있는 창문바위를 연초에 지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다.

[주변 명소]
도봉산(道峰山)
서울시 도봉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의정부시 호원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717m 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의 일부로 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절리(節理)와 풍화작용으로 벗겨진 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삼각산, 수락산과 함께 서울 외곽의 3대 명산이다.
천축사(天竺寺) 등의 사찰이 있고, 조선 도학(道學)의 시조인 조광조와 서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배향하는 도봉서원(道峰書院)이 있다.
이는 맞은편에 있는 수락산이 박세당, 박태보를 중심으로 한 소론의 중심무대였던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도봉서원 자리에는 원래 영국사(寧國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1573년(선조 6)에 양주목사 남언이 절을 헐고 이 자리에 도봉서원을 세웠다. 1775년(영조 51년)에는 ‘도봉서원’ 4글자가 사액되었다.

옥류동 폭포(玉流洞瀑布)
경기도 의정부시 소재의 수락산에 있는 폭포이다. 수락산의 경치는 많은 명사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노론의 명사 이단상과 그의 아들 이희조는 수락산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별업을 경영하였고, 이희조의 장인 김수흥은 양주의 쌍수역에 교거(僑居)하며 수시로 수락산을 유람하였다. 김수흥은 심지어는 쌍백정에 우거하던 남용익과 함께 수락산을 유람하고는 ‘분산지약(分山之約)’을 맺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로서 옥류동의 폭포 주변에는 두 사람의 정자가 건립되었으니, 김수흥의 정자와 남용익의 간폭정(看瀑亭)이 바로 그것이다.
옥류동은 오래전부터 현류의 기장(奇壯)함이 있어 수락산 승경의 으뜸으로 손꼽혔던 것이다.
이 밖에도 박세당, 김수흥, 남용익, 김수항, 남유용 등 수많은 문사들이 그 아름다움을 시로서 묘사하였다. 유람기로는 남유용의 「유옥류동기(遊玉流洞記)」(『뇌연집』)가 대표적이다.

흥국사(興國寺)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소재의 수락산에 있는 절이다. 덕절(德寺)이라고도 한다.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599년(진평왕 21) 원광(圓光)이 창건하여 수락사(水落寺)라 하였으며, 그 뒤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1568년(선조 1)에 왕이 이 절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願堂)을 짓고 편액을 하사하여 흥덕사(興德寺)하고 개칭하였고, 1626년(인조 4) 다시 흥국사로 개명하였다.
서계 박세당 선생이 수락산에 들어 왔을 때만 해도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었던 당시 그토록 융성했던 흥국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성전(聖殿)’이라 불리는 불전에 승려 몇 사람이 있었고, 후대에 중건된 은선암(隱仙菴)에 16-17인의 승려가 기거하던 것이 전부였다. 이에 서계는 자신이 살던 수락산 서쪽에 매월당을 기념할만한 절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기고 은선암의 승려들에게 절의 건립을 권유하였다.
결국 서계 선생이 공역에 드는 대부분의 비용을 충당한 가운데, 1년이 지나 암자가 낙성되었고, 이름을 ‘석림암(石林菴)’으로 명명하였는데, 오늘날 석림사의 시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