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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연암 물레방아 공원 ]
연암 물레방아 공원
경남 함양군은 매년 함양인의 화합과 전통 문화, 예술, 체육진흥을 위한“물레방아 축제”를 연다.경남 함양(안의)은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 선생이 안의현감으로 재직 시 우리나라 최초로 실용화한 물레방아의 시발지에 연암 물레방아 공원을 조성하여 물레방아 역사성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연암 물레방아 공원을 2004년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에 조성하고 매년 “”물레방아 축제”를 갖는다.
“연암 물레방아 공원”은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 실학을 실용화한 시발지인 함양 안의에 전국최고의 목재 물레방아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에 복원해 놓았다.
2004년 조성된 물레방아는 총사업비 6억8천만원을 투입하여 2천여평의 부지에 물레 1식, 방앗간 1동, 디딜방아, 8각정자 1동, 목재산책로 88 m, 관리사1동, 주차장 500평, 연못1식을 주변경관과 잘 어울리게 조성하여 보고 쉴 수 있는 여유 공간과 옛 정취의 풍경이 마련되어 있다 물레는 목재로서 지름 10m, 폭 2m로 우리나라 목재물레로서는 최고로 크다.
”연암 물레방아 공원” 위편의 용추계곡은 아름다운 경치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특히 용추사 아래에 있는 용추폭포는 규모가 크고 짙푸른 용추도 갈무리하고 있어 용추계곡의 백미로 꼽힌다. 용추폭포는 화난 용이 몸부림 치듯 힘차게 떨어지는 물줄기 앞에 서 있노라면 온갖 고뇌를 잊을 수 있듯. 폭포수의 굉음은 우뢰와 같았다. 폭포 옆 산속에 자리한 용추사는 옛날 장수사에 딸린 부속 암자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해인사의 말사이다. 장수사와 함께 6.25전쟁 때 소실됐던 것을 1959년에 재건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
조선후기의 대문장가이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반남박씨 19세손, 오창 東亮의 後孫)선생이 5년동안 이곳 안의현감을 지냈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대표한 연암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러보아야 할 곳이 지금의 안의 초등학교이다. 안의 초등학교는 조선시대 안의현청이 있던 자리이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면서, 면 단위마다 소학교를 세웠는데 그 위치를 옛날 현청이 있던 자리를 택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 5년간 이곳 안의현감을 지냈지만, 이곳 안의 초등학교에서 연암의 흔적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전국 어느 초등학교에나 계신 이순신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 한켠 교정화단에 연암 박지원 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세워진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장승 한 쌍이 서있다. 연암 박지원 사적비는 여느 사적비처럼 규격에 맞추어 제작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는 없다.
연암은 원래 서울이 고향이지만, 현대화를 위한 개발의 심장부인 현재 서울에서, 그의 흔적이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애초부터 희망사항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연암이 은거한 연암계곡도 황해도(경기도 장단)이므로, 휴전선 남쪽에서 연암과 인연을 맺은 땅은 이곳 함양 안의 땅이 유일 할진데, 안의 초등학교에 덩그러이 사적비 하나로 남아있는 연암의 흔적은 연암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안의 초등학교 연암 박지원 사적비를 둘러보고 갈비탕으로 점심식사를 했는데 옛날 시골 5일장이 설 때 시골장터에서 먹던 시골의 맛, 고향의 맛 바로 그 맛의 갈비탕 이었다. 오후의 일정 관계로 서둘러서 상림의 인물공원을 방문하여 연암 박지원 선생 동상 앞에서 대종중 정서 부도유사님을 비롯한 종친 모두는 선조에 대한 묵념을 하고 다시 한번 연암선생의 음덕에 감사 드렸다.
함양 인물공원
함양을 빛낸 인물공원이 함양읍 상림공원안에있다. 이 인물공원에는 의재(義齋) 문태서 (文泰瑞, 1880~1912), 뇌계 유호인 (兪好仁, 1445~1494), 연암(燕巖) 박지원 (朴趾源, 1737~1805), 옥계(玉溪) 노 진 (盧禛, 1518~1578), 점필재(占畢齋) 김종직 (金宗直, 1431~1492), 고운 (孤雲) 최치원 (崔致遠, 857~925), 덕곡(德谷) 조승숙 (趙承肅, 1357~1418), 개암(介庵) 강익 (姜翼, 1523~1567), 일두 (一蠹) 정여창 (鄭汝昌, 1450~1504), 일노당(逸老堂) 양관 (梁灌, 1437~1507), 진암(眞庵) 이병헌 (李炳憲, 1870~1940) 등 11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한편 매년 열리는 물레방아 축제 행사에는 신관사또 부임행렬 퍼레이드가 열리는데 이때 등장하는 신관사또는 박지원 안의현감 최치원 천령태수, 김종직 함양군수, 정여창 안음현감, 부임 행렬로 이어진다.
물레방아에 대한 오해 풀기
- 연암 박지원과 함양의 물레방아
함양의 물레방아
‘에헤 이여, 함양 산천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우리 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 - 함양의 곶감 깎기 민요 -
“물레방아라고 하면,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연세가 오십 대 이후인 분들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무슨 대답이 돌아올까? “청춘 남녀의 연애장소!”
위의 민요에서도 야한 상상이 십분 짐작된다. 자고로 ‘방아’는 절구방아, 디딜방아, 물레방아를 통틀어 남녀간의 성애(性愛)를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비근한 예로 흘러간 옛 노래에도 ‘물방아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하는 구절도 있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에도 등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보다 노골적인 표현으로는 ‘가죽방아’란 말도 있지 않은가.
60년대까지만 해도 남녀가 밤중에 동네 물레방앗간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면, 이는 상호간의 은밀한 접촉을 전제로 만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절대 아니라고 우기면 할 수 없지만.) 이런 물레방아는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을까?
2004년 10월 중순 경남 함양 지역을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함양에는 향토 축제인 <물레방아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함양군청의 청사 앞에는 대형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었고, 청사 내의 복도에도 초등학생들이 만든 다양한 물레방아 작품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 학생들을 대상으로 물레방아 작품 경연대회를 가진 뒤 우수작품들만 엄선하여 전시를 한 것 같았다.
군청에서 안내를 해 주신 분의 해설에 의하면, 물레방아는 우리나라 최초로 함양 지방에 도입되었고, 물레방아를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은 조선 정조 연간, 이곳 함양군의 안의현감 (安義縣監)을 지냈던 연암 박지원(1737~1805)선생 이라고 하셨다. ‘열하일기’, ‘양반전’, ‘호질’ 등으로 유명한 연암 박지원 선생이 이런 농업 기술 측면에서도 대단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암 선생께서 소개하셨다는 물레방아는 어떤 것이었을까?
말 그대로 물의 힘을 이용하여 방아를 찧는 장치였을까? 아니면 낮은 곳에 있는 강물을 높은 곳에 있는 벼논으로 퍼 넘기는 관개용 수차를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연암 선생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연암 선생과 함양의 인연
연암 박지원 선생은 1780년 당시 청나라에 사신 일행으로 북경과 열하지방을 6개월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그가 남긴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그곳에서 본 선진 문물을 마치 그림이라도 그리듯이 아주 상세하게 기술해 놓고 있다. 이 책은 여행 동안의 단순한 감상을 적은 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관개, 수리와 같은 농업기술이나 도로, 수레와 같은 건설 인프라 분야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의 세태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오랑캐의 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게 없다고 무시하던 분위기가 주류였지만, 연암 박지원 선생은 오로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백성들의 삶은 물론, 국가 경제를 되살리자는 주장을 줄기차게 폈던 것이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때는 1792년. 청나라를 다녀온 뒤로 12년의 세월이 흐른 때이다.
안의현감 이전에는 1786년에 처음 관직으로 선공감 감역(건축물의 신축과 보수업무를 감독하는 부서의 종9품 직위)을 한 것으로 보면, 연암 선생의 공학자적 능력이 높이 평가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공사감독관 격인 선공감 감역의 실무 경험이 함양의 안의 현감 재임 시 십분 발휘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여기서 문헌상의 기록과 함양의 지리적 상황을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수차(水車)와 물레방아
함양군의 안의 현감을 지내셨던 연암 박지원 선생의 관련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박지원 현감은 손재주가 뛰어난 장인들을 골라 수차(水車)인 용골차(龍骨車), 용미차(龍尾車)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용골차는 용의 길다란 등뼈가 연상되는 장치로 저지대의 강으로부터 높은 곳의 논밭으로 물 푸는 장치를 말한다. 즉 가뭄이 닥쳤을 때 벼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일종의 관개용 장치로 ‘수차(水車)’라고 만 해야지, 방아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을 이용하여 바퀴를 돌리는 장치는 수차 또는 물레(물+수레바퀴)로만 불어야 하고, 물레와 방아가 합성하여 곡식의 방아를 찧는 장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물레방아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수차와 물레방아를 통틀어 물레방아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기술 발전의 역사로 본다면, 인력에 의해 물을 푸는 수차가 먼저 발명되고 난 다음, 한참 후에 수차의 원리를 이용하여 물의 힘으로 방아를 찧는 물레방아가 발명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수차와 물레방아를 싸잡아 물레방아로 부르는 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데 상당한 혼선을 초래하는 것이다. 여기서 함양의 지리적 조건을 살펴보기로 한다.
함양의 지리적 조건
함양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을 위천이라고 한다.
함양이라는 지명은 중국 진나라 때의 수도 이름이고, 위천은 진나라의 위수에서 따온 지명이다. 조선조의 함양은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선비의 고장이었다. 안동이 그렇듯이 함양에도 마을 앞에 큰 들판이 있어 첫눈에 봐도 곡창지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함양에는 옛날부터 수해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에 의하면, 여름철에 비가 한두 방울 듣는다 싶으면 갑자기 강물이 불어 멱을 감던 아이들이 세찬 강물에 휩쓸려 익사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위천 강의 상류는 지리산과 덕유산의 능선이 마주치는 계곡이 있다. 비가 올 경우 계곡에서 합쳐지는 빗물의 양이 순식간에 엄청난 수량으로 하류로 쏟아지게 된다. 큰물이 질 때마다 농부들은 피땀 흘려 가꾼 일년 농사를 깡그리 망치게 되었던 것이다.
함양 지방의 홍수 피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역사적 첫 시도는 통일신라 후기 함양태수를 지낸 해운 최치원 선생이었다고 한다. 홍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은 무엇이었을까? 일차적인 대책은 강바닥을 깊게 파내어 둑을 높게 쌓거나, 강폭을 넓게 하고 양쪽으로 제방을 높게 쌓아 올리는 것이다. 또한 홍수와는 달리, 최치원 선생은 가뭄 피해를 줄이기 위한 대책도 실시하였다고 한다. 이는 강물이 천천히 하류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 길다란 관개수로를 만드는 것으로, 그 흔적이 현재까지 상림(上林)이라는 인공 숲으로 남아있다. 상림의 둘레로 인공수로가 만들어져 있다.
용골차(龍骨車)의 구조
강의 양쪽으로 높은 제방을 쌓게 되면, 제방 뒤쪽의 벼논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비가 자주 올 경우에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가뭄이 닥치면 저지대에 있는 강물을 제방 넘어 논으로 퍼 넘기는 것이 어렵게 된다. 이때 유용한 장치가 곧 물을 잣는 장치, ‘무자위’라는 것이다. 무자위는 지금도 한적한 시골이나 전라남도의 염전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자위’는 비교적 높이 차이가 적은 곳에 사용하는 1인용 물레인데 반해, 용골차는 비교적 단차(높이차이)가 크고, 혼자 힘으로 버거운 곳에 물을 푸는 일종의 펌프이다. 두레박 여러 개를 잇달아 장치하고 2인 이상의 사람들이 발판을 딛고 돌려서, 높은 데까지 물을 끌어올리는 장치이다.
이곳 함양 지역은 위천 강의 물을 푸는 장치로 용골차와 용미차를 사용한 것으로 기록이 전하고 있다. 아쉽게도 용골차와 용미차는 기록에만 전할 뿐 우리나라에는 없고 중국에는 여전히 한적한 산골마을에는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용미차(龍尾車)는 어떻게 생겼을까? 용미차는 네덜란드(화란)에서 개발된 것으로 원통 속에 일렬로 연결된 스크류 같이 생긴 것으로 마치 용의 꼬리처럼 꼬불꼬불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용골차와 마찬가지로 저지대의 물을 고지대로 퍼 넘기는 장치이다. 이는 청나라 때에 마테오리치와 같은 서양인 신부들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상의 수차(水車)
수차에 대한 문헌 자료상의 근거를 다음에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수차(水車)>는 한발에 대비한 양수기로서 관개 수리 사업에 쓰이는 데 수차 이용에 관해서는 고려 공민왕 1년에 첫 기록을 볼 수 있다. 수차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용골차와 통차이고, 16세기 이후에는 용미차(Archimedes screw)와 옥형차 같은 서구식 수차가 도입되기도 했다. 고려말 이래로 수차라면 일반적으로 용골차, 즉 번차로 우리말로 '물자애(위)'라고 한다. 그것은 중국에서 한대(170년경)에 발명되어 삼국시대 우리 나라에 들어 왔다.
세종 11년(1429년)에 일본으로부터 통차가 보급되었는데 종래의 족답식보다 훨씬 효율적이어서 자격수차라고 불리었고, 이때부터 종래의 수차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하여 당수차라 하고, 통차를 일본에서 들여왔다 하여 왜수차라 했다.
성종 때부터 연산군 2년(1496년)에는 최부가 중국에서 보고 온 수전수차를 보급시키려고 노력했고, 연산군 8년(1502년)에는 전익경이 정교하고 능률적인 수차를 만들었다고 하며, 명종 15년(1546년)에도 중국의 수차를 보급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기록들이 실록에 나타나 있다. 숙종 때에도 물리학자 이민철이 성능이 좋은 수차를 만들어 숙종 9년(1683년)에 보급하였으나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 정조대에 이르러 서양계 수차인 용미차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 -중앙재해대책본부/자료-
물레방아의 개념
방아란 곡식의 낟알의 껍질을 벗기거나(탈곡) 가루로 만드는(제분) 행위를 말하고, 방아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절구가 있고, 이를 좀더 손쉽게 개량한 것이 디딜방아, 그 다음으로 소의 힘을 이용한 연자방아가 있다. 다음으로 물의 힘을 이용한 것이 물레방아이다. 즉 물레방아는 증기기관에 의한 동력이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에 가장 선진적인 방아인 것이다. 방아 찧는 기술이 발전된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절구방아(인력)->디딜방아(인력)->연자방아(소)->물레방아(수력)->원동기 방아(전기)
한편, 물레방아를 돌리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물레방아는 낙차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지에서는 곤란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을 이용하여 바퀴를 돌리려면 산골짜기와 같은 지형이 필요하다. 즉 평야지대는 낙차(落差)가 없어 불가능하고, 계곡이나 계곡 아래쪽의 경사진 구릉지역이 안성맞춤인 것이다. 물레방아는 순전히 물의 힘을 이용하여 방아를 찧는 것이다. 물레방아는 처음에는 순전히 방아만 찧었지만, 50년대 이후에는 물레(수차)에 발전기를 달아 방아 찧기와 동시에 수력발전을 하여 물레방앗간은 물론이고 인근 마을 단위로 전깃불을 켜기도 했다.
장구한 인류 역사에 있어 물레방아는 노동해방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사람 대신 물이 방아를 찧어주는 바람에, 사람은 물레방아간 뒷전에서 마음 놓고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쿵더쿵, 쿵더쿵, 음향효과에 맞춰......뛰는 것이 어디 가슴뿐이었겠는가.
한편, 연암 박지원 선생이 안의 현감으로 계셨던 1792년에서 1796년경 당시 물레방아를 설치했다면 마을 중앙을 흐르는 위천이나 상림 주변이 아닌 훨씬 더 위천의 상류 쪽이었을 것이다.
<물레방아의 개요>
- 물레바퀴: 직경 220~489cm, 폭 75~115cm
- 낙차거리: 10cm ~ 30cm, 회전속도: 18회~25회/분
- 마력: 8-10마력(H.P), 사용유량(流量): 0.316㎥/sec
- 바퀴의 날개수: 32개, 각도: 25. 날개길이: 400㎜
- 용도: 탈곡, 제분, 사료절단, 질그릇 제조, 제재소 동력원, 발전용, 한지공장 시료부수기, 돗자리짜기, 새끼꼬기, 솜틀, 면직기 등.
물레방아, 산업혁명의 씨앗
물레방아는 인간의 노동이 아닌 자연의 힘을 이용하여 방아를 찧는 장치이다. 여기에는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고, 회전운동을 수평운동으로 전환하는 기어(gear)의 원리가 들어있다. 따지고 보면, 18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도 그 씨앗은 이미 물레방아를 돌리던 시점에 파종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동력이 수력에서 증기의 힘으로 전환되었을 뿐 기어의 원리는 이전의 물레방아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함양군의 물레방아 축제를 다녀온 것을 계기로, 물레방아와 수차(水車)에 대해 살펴보았다. 관련 기록에 의하면 물레방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수차(水車)는 관개용수를 위한 장치로 이미 고려조에 중국을 통해 도입된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를 물레방아와 혼동하여 연암 박지원 선생이 처음으로 도입했다는 오해는 없어야하겠다.
다음으로 물을 이용하여 방아를 찧는 물레방아는 아마 연암 박지원 선생이 청나라에서 보고 온 뒤, 함양지방에 처음으로 제작 설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함양 지방 물레방아의 유래를 살펴보면서 연암 박지원 선생을 새삼 우러러보게 된다. 백성의 안락한 삶을 도모했던 실천적 목민관의 자세와 함께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정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느낌이다.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비록 이적(夷狄)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하여 배워야 한다. <월간 부문유 2004. 11 문화유산해설사 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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