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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무섬마을 과 서릿골 전설 ]
[ 영주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 ]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은 "육지속의 섬"이다. 마을 뒤쪽 일부가 육지로 연결돼 있을 뿐 마을 주변이 안동 하회 마을이나 경북 의성포 마을처럼 온통 강물로 격리돼 있다.무섬은 옛날에는 진혈면 무섬이었다. 일제시대 이후 평은면에 소속되어 오다가, 1983년부터 문수면 지경에 편입되었다
반남박씨,선성김씨 집성촌으로 200여년 전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의 서편, 물건너 동네(머럼)에서 박수란 사람이 처음 들어와 나무숲을 쳐내고 집을 지어 터전을 마련 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세거하고 있는데, 이 마을에 선성김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한 시기는 영조말 무렵 선비 김대에서 비롯된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고 흘러가며 강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고가(古家)가 그대로 보존된 전통마을로 마을의 동남쪽만 육지에 이어져 마치 강으로 둘러싸인 섬처럼 보인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천 의성포 회룡포 마을은 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번잡하다.
관광명소로 부상하면 상업화되는 것처럼. 이에 반해 무섬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아직 닿지 않아 한옥 마을로서의 적막함과 조용함을 간직하고 있다 "물위에 떠있는 섬"이라는 뜻의 수도리가 무섬으로 바뀐 연유는 아는 이가 없다.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강을 감싸 안은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은 영주에서 흘러온 서천과 예천을 비껴 흐르는 내성천이 마을 앞에서 만나 350도 정도 휘돌아 나가는 물돌이동이다. 풍수적으로는 매화가지에 꽃이 핀다는 매화낙지라고 하고,물 위에 연꽃이 피었다는 연화복수라고도 하는 명당에 터를 잡은 마을이다.
영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반촌(班村)의 고즈넉한 고샅길을 걸으면 선조들의 체취와 삶의 정취를 흠뻑 느낀다. 세월의 덧게비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고가들,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시를 읊던 선비의 목소리가 토담 넘어 들리는 듯하다. 한가롭게 되새김질하고 있는 누렁이 소,찾아온 손님을 빈 입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며 차를 권하는 노인의 인정도 푸근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아스라한 옛날을 만날 수 있다.
물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가 생긴 것은 1250년쯤이고,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 선생(1641∼1699)이 강건너 머럼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하는데,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만죽재(晩竹齋)의 기와에 연대기가 새겨져 있고 최근에 보수를 끝냈다.
박수 선생은 1남 1여를 두었는데 아들 박창반(朴昌般 1669-1742)이 선성김씨 문중 김윤일(金允一)의 딸과 혼인하고, 딸도 선성김씨 김범석(金範錫)에게 출가 한후 반남박씨와 선성김씨는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마을을 휘감고 도는 강은 내천이다. 낙동강 상류 물줄기다. 강변에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깊은 곳이라야 허벅지에 찰 정도로 수심이 얕다. 시간을 정지시키듯 맑은 강물이 도도히 흐른다.
마을에는 아홉 곳의 가옥이 도(道)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으나 현재 해우당, 만죽재만 복원된 상태. 시내버스가 왕복 운행하는데 영주시내에서 30분 정도 걸린다.
무섬마을에는 현재 반남박씨,선성김씨 50여가구가 살고있다. 반남박씨 16세손인 박수 선생(1641∼1699)이 이곳에 거처하던 고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볼 때 17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이 곳에서 살았던 것 같다. 박수선생 선대는 7세 참판공 규葵, 8세 판관공 병균秉鈞, 9세 승지공 숙 10세 침琛, 11세 소장紹張, 12세 인수麟壽, 13세 종용從龍, 14세 농?, 15세 경안景顔,19세 수, 17세 창반昌般 으로 이어진다.
마을 가운데에는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인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3호 만죽재고택이 있다.
박수선생이 이 마을에 입향하여 건립한 이 집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정면에 5칸의 정침을 두고 양쪽으로 익사를 달았으며, 앞면에 사랑채가 달린 'ㅁ'자형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2호 해우당고택은 조선고종 16년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락풍 선생이 건립하였다.
경상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ㅁ'자형 가옥으로 앞의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큰사랑과 아랫사랑을 두었는데, 특히 우측의 큰 사랑은 지반을 높여 원주에 난간을 돌려 정자처럼 누마루를 꾸몄다. 이 집은 수도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으로서 기둥 서까래의 밝은 나무 색과 벽면의 흙빛이 살결처럼 고와 아직도 새집처럼 깨끗하고 넉넉한 기품이 있다.
옛날에는 강물에 잠길 만큼 낮은 잠수교였다는 육지와 섬을 이어주는 수도교는 장마 때면 물이 많이 나가는지 높고 튼튼하고 마을 풍광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육중하다. 긴 제방 아래로 얕은 구릉을 배경으로 고풍스런 기와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대략 50여호와 1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 영주 서릿골 족제비 전설 ]
어느 족제비의 보은이 빚은 살아있는 실화 이 이야기는 전설이기보다, 영주의 명족 반남 박씨의 동족마을 서릿골에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화이다. 연화산 북쪽 기슭, 장수면과의 경계에 자리해 있는 서릿골은 소고공 박승임( 朴承任 1517-1586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로 경상북도 영주출신. 형(珩)의 아들이인데 이마을은 박승임의 7세손 박정구(朴鼎九 1719-1798) 선비가 터전을 열어 그 자손이 세거하는 동족마을이다.
대개 족제비란 쥐나 뱀을 잡아먹어, 사람에게 유익한 동물이지만 어쩌다가 병아리를 훔쳐 가는 일이 있기는 해도, 사람들이 탐내는 가죽이나 꼬리털을 가졌다는 것이 죄아닌 죄여서, 족제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눈에 뛸세라 조심조심 숨어 살아야만 하는 짐승이다.
그러나, 여기 서릿골의 족제비만은 그렇치 않아서, 대낮에 떼를 지어 골목길에 활개를 치고 다녀도 누구 하나 집으려 하지 않는다.옛날 이곳에서 어느 한 족제비에 얽힌 희한한 한토막 사연이 계기가 되어, 서릿골 마을은 수백년동안 족제비의 천국을 이루고 있음이다. 조선 정조 시대 진사 박문렵(朴文曄 1674-1719 반남박씨 16세손)의 둘째 아들 정구선비는 한정마을에서 서릿골에 살면서, 그 아버지께 문안을 드리기 위해 매일 같이 한정마을 큰댁 박정열(朴鼎烈 1704-1775)에를 오르내렸다.
아직 겨울이 채 물러가지 않은 이른 봄 어느날이다. 정구선비가 그 날도 문안길로, 동구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갑자기 커다란 족제비가 달려들어 선비의 도포 자락을 물고는 기를 쓰고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이리라 짐작되어, 족제비가 끄는데로 따라갔더니 과연 까닭이 있었다. 끌려 가고 보니, 부근에 있는 넓은 웅덩이 둑이었는데, 물가운데, 새끼 족제비들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옳거니!" 선비는 곧 옷을 걷고 물에 들어가 그것을 모두 건져내어, 옷자락으로 물끼를 말끔히 닦아주고 돌아섰다. 그런일이 있은후 몇해가 지난 뒤 어는날. 커다란 족제비 한마리가 선비의 집 툇마루에 와서 죽어 있었다. 족제비 털은 황모(黃毛)라 하여, 본래 황모무심필(無心筆)이라면, 선비의 문방에서는 귀물로 여기는 것이다. 전날 정구선비에게 새끼를 구원받은 바로 그 족제비가, 생명이 다하게 되매, 버려야 하게된 몸으로 선비의 은혜를 갚으려 함이었던 것이다 정구선비는 그 털로 붓을 만들었다. 그러고, 얼마아니하여 과거가 열리매 1798년(정조22), 그 손자 시원(時源 1764-1842)이 그 붓을 가지고 응시하여,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되는 영광을 차지한 바 되었으니, 실로 희한한 인연이다.
이렇게 맺어진 서릿골 반남 박씨와 족제비와의 사이는 지금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서릿골 수십가구는 거의 그 선비의 자손이어서, 오늘도 한결같이 족제비를 보호한다니, 진실로 훈훈함이 감도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박시원(朴時源)은 1764(영조 40)∼1842(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반남박씨의 19세손이다.. 자는 치실(穉實)이고 호는 일포(逸圃)로, 사표(師豹)의 아들이다
1798년(정조 22)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벼슬이 사간에 이르렀다. 천성이 진중(鎭重)하고, 마음이 진정되어 늘 평온하며, 몸가짐과 행동거지가 겉으로 꾸미는 일이 없었다.그러므로 조정에서 벼슬을 내리는 제명(除命)이 있으면 사양하는 관례와는 달리 즉시 명을 받들어 부임하였으며, 비록 남들이 꺼리고 싫어하는 용반산직(冗班散職)이라 할지라도 직무를 완수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하였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이룩될 때에 조용히 향리로 돌아와서 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후배들을 지도하고 가르칠 때는 항상 강학을 우선적으로 하였다. 저서로는 《일포집》 8권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