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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 백림정 ]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과 동숭동 일대를 조선시대에는 상백동(上柏洞)이라 하였다. 즉 혜화동천주교회와 동성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곳을 백동(잣나무 골), 백자동 (柏子洞)이라 불렀고, 위 천주교회를 처음에는 백동교회라 하였다.
이 지명은 태종 때 박은 이 낙산 아래 이곳에 살면서 잣나무를 심고 백림정이라는 정자를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로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東小門圖>에 보면 낙산 서북기슭의 산아래 마을에 큰 기와집들이 즐비하고, 소나무 숲이 우거진 풍광을 잘 묘사해 놓고 있다.
박은(朴? 평도공 1370∼1422)은 반남박씨 6세손으로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자는 앙지(仰之), 호는 조은(釣隱)이다. 고려 말의 학자인 판전교시사 (判典校寺事) 박상충 (朴尙衷)의 아들이며, 이곡(李穀)의 외손자이고, 어효첨의 장인이다. 여섯 살 때 부모를 잃고 외롭게 자라났으며, 조금 장성하여 용기를 내어 글을 읽고, 19세 때에 급제하여 후덕부승(厚德府丞)에 임명되고, 1392년에는 개성소윤(開城少尹)에 이르렀다.
조선왕조가 개국할 때 지방으로 나아가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어 고과에 정치성 적이 제일이어서 좌보궐(左補闕)이 되었다. 태조 3년(1394) 지영 주 사 (知永州事)로 있으면서 정안군 이방원에게 마음을 바쳐 충성할 것을 약속하였다. 따라서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에는 지춘주사(知春州事)로서 지방 군사를 동원하여 이방원의 집권에 기여하였다.
이어 사헌중승(司憲中丞) 판사 수 감 사 (判司水監事) 지형조사가 되었으며, 1400년 이방원이 세자가 되자 인녕부좌사윤 세자좌보덕 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즉위 후 호조 병조 이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하고, 추 충익대좌명공신 (推忠翊戴佐命功臣) 3등으로 반남군 (潘南君)에 봉해졌다.
1402년 강원도 관찰사, 다음해 한성부윤 승추부제학을 거쳐 반성군(潘城君)에 봉해지고 계림부윤이 되었으나, 공신을 외임에 보낼 수 없다는 여론으로 정지되었다. 태종 6년 전라도 관찰사로 나아가 명나라 환자(宦者) 황엄(黃儼)이 제주의 동불 (銅佛) 을 구하며 무례하자 이를 예의로 잘 접대하여 황엄의 버릇을 고치고 국위를 선양 하였다.
이듬해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 에 다녀온 후 참지의정부사 겸 사 헌부대사헌 형조판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평 양부윤이 되어 평양성 축성을 완성하였다. 이어 병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를 거쳐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 봉해 졌으며, 참찬의정부사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 司事)를 겸임하여 옥사 (獄事)의 신문하는 형장(刑杖)을 한차례 30대로 정하는 등 형정제도를 개선 하 였다. 이어 이조판서 판우군도총제부사 우의정 좌의정이 되어 판이조사를 겸 하였다.
박은(평도공)은 성품이 명민하고, 기질이 크고 깊었다. 재주는 경제(經濟)에 능란 하고 헌장에 밝았으며, 언론이 당당하고 배울만하였다. 일찍이 유량(柳亮)과 좋지 않았던 관계를 은혜로써 풀어나가 존경을 받았으며,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태종의 선위하려는 심충을 읽는 과정에서 충녕의 장인인 심온(沈溫)과 대립 하였으며, 그 옥사 때에는 심온의 반대되는 입장에서 관여하였다.
그리고 문과 초 시에 제술보다는 강경(講經)을 주장하여 채택하였다. 시호는 평도 (平度)이다. 기강을 펴 다스려나가는 것을 평, 마음이 능히 의(義)를 재량할 줄 아 는 것을 도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