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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함양 산청지역 나들이 ]
구천서원(龜川書院)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水東面) 효리(孝里)에 있다. 숙종 27년(1701)에 창건하여 춘당(春塘) 박맹지(朴孟智),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 일노당(逸老堂) 양관(梁灌), 금재(琴齋) 강한(姜漢), 구졸암(九拙庵) 양희(梁喜), 우계(愚溪) 하맹보(河孟寶)를 연향(聯享)하였다. 고종 무진(1868)년에 훼철되었다. 지금은 그 후손들이 수계하여 재와 비를 유허에 세우고 작헌례를 행하며 계명(契名)을 불망(不忘)이라 하고 재명(齋名)은 구천이라 한다. 정조 18년(1794)에 정진구(鄭鎭具)가 구천강당기龜川講堂記)를 지었는데 서원을 복원한 뒤 다시 새겨 걸었고, 1919년에 서원 터에 유허비를 세웠는데 정승현이 글씨를 썼다.

금호재(琴湖齋)
경상남도 함양읍 남쪽 임호(林湖) 뒷산 금등(琴嶝)의 남향 산언덕에 4척(尺) 높이의 묘가 있으니, 춘당(春塘) 박선생 휘 맹지(孟智)의 묘소이다.
반남박씨 9세 춘당공(春塘公) 맹지(孟智)의 묘소와 재각 금호재(琴湖齋) 있는 곳은 경남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로 매년 음력 10월 첫째 토요일 시제를 지낸다. 1929년 후손 규동(奎東)씨가 분연히 반론하고 모든 일가(一家)제족이 찬동하여 재실을 신축하고 금호재(琴湖齋)라 했다.

충신 반남박손지려(忠臣 潘南朴손之閭)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창평리에있느데, 박손(朴손)은 임진왜란 때 자기 마을에서 수천의 의병을 모아 서부 경남의 왜적을 무찔렀다. 그 후 왜병이 항복을 권했으나 "내 차라리 의리를 지켜 죽을지라도 불의에는 굴하지 않는다"고 하고 적의 칼을 받아 세상을 하직하였다. 선조조에 정려를 내렸다.

회양재(晦陽齋)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회동에 있다. 반남 박씨 회곡(晦谷) 박이관(朴以棺)의 묘각이다. 회곡 박이관(朴以棺)은 병자호란을 피해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의 10세손 박원서(朴原緖)가 재실겸 서당으로 세우고 박인서(朴仁緖)로 하여금 후학을 가르치게 하였다. 최병심(崔秉心)이 박인서의 청으로 기문을 지었다.

서계서원(西溪書院)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리에 있다. 진주서 국도를 따라 가면 산청읍내 들어가지 전에 단아한 고가가 보이는 데 바로 서계서원이다. 서계서원은 1983년 7월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덕계 오건(吳健)의 학문과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606년(선조 39)에 한강 정구(鄭求)를 비롯한 사림들이 창건하였다.
1677년(숙종 3)에 서계로 사액(賜額)받고 선현을 배향하고 지방 교육을 담당했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21년에 복원되었다. 경내는 3칸의 창덕사(彰德祠)를 비롯하여 4칸의 강당, 3칸의 부속강당, 각 2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대문, 3칸의 고사, 4칸의 태실(胎室)로 구성되어 있다.
제향 공간인 창덕사에는 덕계 오건을 주향으로 봉안하고 왼쪽에 오간과 박문영, 오른쪽에 오장(吳長)의 위패를 각각 봉안하여 해마다 음력 4월 2일에 사림들이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건물 구조는 전형적인 서원의 배치 형태로서 솟을 대문인 입덕루(入德樓)를 들어서면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고, 그 뒤 중앙에 강당인 서계 서원이 있다. 강당 뒤로 창덕사가 있고 덕천재(德川齋)와 장판각(藏版閣), 비각이 축을 이루고 있다. 강당은 원내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 강론장소로 이용되었다.

용호(龍湖) 박문영(朴文楧) 선생
용호공(龍湖公) 박문영(1570~1623) 선생은 반남박씨 14세손으로. 이름은 문영(文英)이며 용호(龍湖)는 그 호(號)이다. 조선 선조 39년 丙午生員 에 합격하였다. 그의 조상인 교리(郊理) 박맹지(朴孟智)의 5대손이요, 아버지인 직장(直長) 박행(朴荇)의 아들로서, 1570년 산음현 효촌(山陰縣 曉村: 산청군 생초 어서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질이 순미하고 효성이 있어 애친(愛親)함과 경장(敬長)함이 성인과 다름이 없었다. 글 재주 있어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을 스승으로 섭겨 경자사서(經子史書)를 널리 배워 문장이 띄어났다. 특히 의리(義理)에 밝았고 인정이 두터웠으며 부모께 효성이 지극하였고, 불우한 사람을 도우는데 성력(誠力)을 아끼질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의 중망(重望)을 크게 받았으며, 동문(同門)으로서 명유(名儒)들인 오사호(吳思湖: 長), 권동계(權東溪: 濤), 권장령(權掌令: 潗)등과는 교도(交道)가 가장 밀접하였다.
1592년(선생 23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자 의병창의에 종군하여 동료(同僚)들과 산산히 흩어졌는데 그의 어머니 풍천 노씨가 무주(茂朱)로 피난 중 왜군의 위협이 질박했을 때, 마침 오사호(吳思湖)의 보호로 무사한 뒤 7년만인 1599년 오사호와 진안에서 처음 만나 서로 전쟁사를 되돌아 보곤 하였다.
용호 박선생은 전후수습에 바빴었고 학문에 더욱 힘써 1608년(선조39년 병호)에 성균관의 생원(生員)이 되었다.
이때 선조왕이 광해군(光海君)으로 세자(世子)를 삼으려 했는데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한 뒤로부터 선조왕은 세자를 바꾸려 하였음에 일부의 조신들이 정한 세자를 바꿔서는 안된다고 상소를 하자는데에 용호선생을 소두(疏頭)로 함을 거절하고 참여는 하였고 소두에는 하성(河惺)이 앞장섰던 것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왕이 된 뒤 하성은 곧 장수현감(長水縣監)이 되고 용호선생에게는 공신록권(功臣錄券)과 증조와 다른 종족에게는 증직록권(贈職錄券)을 주는 것을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그런데 광해군을 받드는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邇瞻) 등이 정권을 전횡하여 급기야는 영창대군과 김제남(金悌男: 선조의 장인, 인목대비 부친)과 그 아들 3형제를 역적죄로 몰아 죽이고 인목왕비를 폐비(廢妃) 하는등 패륜(悖倫)행위를 하였다.
그래서 세상인심은 졸변하고 선비들은 광해군의 불륜을 규탄하는 소장을 곳곳에서 내게 되었다. 이때 용호선생은 평생에 악인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는 지절(志節) 인데도 정인홍이 보낸 편지를 받고 그 편지쪽에 곧 "가야의 늙은 도적놈은 왜 빨리 죽지도 않느나"("伽倻老賊 胡不遍死")라고 크게 써서 돌려 보내었다. 그랬으나 정인홍은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그리고 정인홍은 문권이 함양 정일두(鄭一) 선생 서원(書院)에 많이 있는 것을 끌어내어 불살랐다. 또는 정동계(鄭東溪: 蘊)선생이 정인홍을 규탄한데 대하여 그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는 것을 신원(신원)하기 위해 영남 유림대표로 오사호가 글을 내었는데 또한 오사호마저 황해도로 귀양을 보내어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이에 용호선생은 오사호의 유시(遺尸)를 반장(返葬)하는데 힘을 다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용호선생의 절의와 우정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배워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호선생은 각 유의 향교, 서원 전후 복구에 힘써 유학진흥에 큰 공헌을 이루었으며 그 능날한 문장이 문집에 빛나게 담겨 있어 그 사상과 도학을 오늘에도 살펴볼 수 있다.
선생의 산수를 사랑하던 강정(江亭)이 생초면 경호강 상류 합강(合江) 마루터에 서 있고, 그의 유덕을 추모하여 산청읍 덕촌 서계서원(西溪書院)에 배향으로 후손과 유림이 향사하고 있다.
찾아가는길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산청IC→산청읍 지리 덕촌마을 국도3호선: 산청읍→지리 덕촌마을

와룡정(臥龍亭)
경남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와룡정(臥龍亭)은 용호선생이 은거하던 곳에 만든 정자로, 1565년 정복현(鄭復顯)이 정자를 지으려다, 이루지 못했고, 오덕계. 조종도 등이 절경을 즐겼으며, 여울물을 사이에 둔 江안 남쪽에는 노진 선생이 잠시 거주했던 임천강 언덕이 있고 조남명 선생도 와서 완상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후 1613년과 용호 선생이 이곳을 친구 오사호 선생과 산청의 경호강에서 분점(分占)하여 수학 장소로 삼고 집을 지었고, 1618년에 정자가 완성되었다.
1669년 용호 선생 손자 박상규(朴尙圭)가 그 아우 숭규(崇圭)와 함께 이곳에 정자를 짓고 와룡정(臥龍亭)이라 했다.